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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님의 서재입니다.

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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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최근연재일 :
2019.05.1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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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77,838

작성
18.10.0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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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1)

DUMMY

<2018.01.19. 금요일 / 일본 도쿄 스기나미(杉並)>


새벽 다섯 시 첫 전철이 쇳소리를 내며 오기쿠보(荻窪)역을 깨우고 있었다. 케이진(圭珍 규진)은 철삿줄 같은 겨울바람에 눌려 온몸을 잔뜩 웅크린 채 전철역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를 길러주었던 양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케이진은 집에서 출가했다. 양아버지에겐 두 명의 친아들이 있었다. 케이진보다 두 살 많은 형의 이름은 히데오, 한 살 어린 동생은 유토, 물론 그들은 일본 국적을 갖고 있었다. 지난주에 양아버지의 49재가 끝나고, 저녁 식사로 더운밥을 나누어 먹고 난 후 형은 갑자기 케이진에게 집에서 나가 달라고 했다. 날짜까지 못박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유언이라고만 짧게 설명했다.


동생은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굳게 입을 다문 채 듣고 있었다. 이따금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형은 아버지의 유언에 관해 설명을 이어갔다.


‘길러준 은혜 같은 건 마음에 담아둘 정도로 대수롭지 않다. 갚아야 할 빚도 없고 감사할 온정도 보잘것없으니 자유롭게 살라.’는 유언이었다.


인연을 끊고 싶다는 모진 말이긴 했지만, 양아버지의 오랜 고민과 배려가 전해졌다.


케이진이 먼저 가족을 떠나면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오해받을 부담을 떠안아야 하지만, 이런 유언이 있다면 명분이 되는 것이다. 유산도 빚도 없이 맨손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다. 어차피 양아버지 밑에서 자란 고아에게 유산 따위는 없다. 빚이 없다는 건 그나마 출발선이 나쁘지 않다.


양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기르게 된 경위나 출신의 단서가 될 만한 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혹시 출생에 관한 유언은 없었는지 물어보았지만, 히데오는 고개를 돌려 유토 쪽을 잠시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유언이 없었다는 의미인지, 지금은 동생이 있어서 말하기 곤란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케이진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 패배의 굴레에 스스로 빠져드는 거다.”

히데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스무 살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히데오는 돈 봉투를 내밀었다. 빈손으로 나갈 걱정에 당장 잘 곳이 막막했던 케이진은 약간 안도하며 히데오를 쳐다봤다. 히데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주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남기신 돈이다. 방 구할 때까지 지내도록 해라.”


우울한 히데오의 표정을 읽은 케이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종종 찾아와서 같이 밥 먹어도 되지?”

“더운밥이라면 언제든 줄 수 있다.”

지금까지 비장한 말투와는 달리 히데오도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마지막 인사였다. 국적 불명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왔던 케이진은 이제 주거불명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달게 되었다.


밤새 방을 깨끗이 청소한 후, 형제들이 일어나기 전에 더플백을 매고 케이진은 출가했다. 정식으로 입적된 양자가 아니었기에 짐은 간단했다. 물려 입은 낡은 옷가지들 몇 점과 운동화 두 켤레가 전부였다. 민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한글로 된 책을 모두 버렸기 때문에 책상과 책장은 텅 비어 있었다. 친부모가 징표로 남겼을 법한 팔찌나 펜던트 따위의 소지품도 일절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선 케이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길러준 것에 대한 감사도, 한겨울 길거리로 쫓겨가는 것에 대한 불만도 없다. 다 자란 범은 새로운 산기슭을 향해 고독한 여행을 떠나기 마련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을까?”

새벽 네 시 반, 히데오와 유토 형제는 깨어 있었다. 창밖으로 케이진이 떠나는 것을 보더니 유토가 슬픈 목소리로 히데오에게 물었다.


“아버지 유언이다. 케이진이 만 스무 살이 되는 날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함께 살았던 가족으로서 케이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친절이라는 그 말 너도 들었잖아?”


유토는 창밖을 계속 내다보았다. 케이진이 사라지고 난 골목을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바쁜 걸음으로 걸어갔다. 벽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른 시간인데 골목길에 행인이 있네.”


“정말 괜찮을까?”

창밖에 비친 검은 옷의 사내가 누군지 아는 히데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동생을 내보내는 게 마음 편할 리가 없는 건 히데오도 마찬가지였다. 히데오는 16년 전 케이진이 처음 집에 들어온 날을 아직 기억한다. 방금 전 골목길을 지나간 그 사내가 다섯 살 케이진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만나던 그 날, 어린 케이진의 눈빛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철을 타기 전 케이진은 지갑 속을 열어보았다.

한국(韓国) 국적이 찍힌 재류(在留)카드 한 장과 교통카드, 그리고 현금 5만엔(약 50만 원) 정도 그게 전부였다. 재류카드는 외국인등록제도를 대신하는 새 신분증이었다. 히데오가 준 돈 봉투는 가방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다.


양아버지는 그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했으며, 재일교포 학교에 다니게 했다. 한국 국적은 그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제대로 된 취업은 하지 못하고 프리터족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국적이 한국이기 때문이었다.


새벽 다섯 시 첫 전철이 역으로 들어왔지만,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한 그는 전철에 오르지 못했다.


그제야 케이진은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2018.01.20. 토요일 / 경기도 용인>


유엔은 시노의 집에서 눈을 떴다.


옆에는 아직 시노가 자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일 년간 유엔은 거의 절반 이상을 시노의 집에서 지냈다.


유엔은 옆에 누워있는 시노를 말없이 내려보았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시노에 대한 악감정은 없다. 시작은 나빴지만, 시노는 유엔에게 좋은 친구였다. 다만 시노의 아빠, 최대식이 유엔의 불행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걸 떠올릴 때마다 유엔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지난 1년 동안 박재열은 시노에게 많은 사업기회를 제공했다. 거래 실적이 매달 조금씩 늘어나더니 얼마 전에는 일본산 우동 그릇을 국내에 유통하는 일에도 큰 도움을 줬다.


오늘 오후에도 시노는 박재열과 만날 약속이 잡혀있다.

최대식은 몇 달간 한국에 오지 않고 계속 일본에 머물렀다. 시노는 아빠 대신 한국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까지도 도맡아 해야 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시노는 돈을 벌기 위해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유니폼을 입고 전시회에서 회사 홍보를 하기도 했고, 술집을 돌며 신규출시한 소주 판촉 행사도 진행했다. 추운 겨울에도 짧은 치마를 입고 신장개업하는 가게를 홍보하며 길거리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용돈을 받으며 대학교에 다니는 유엔이 부러울 법도 했지만, 시노는 불평하지 않고 부지런히 살았다. 얼마 전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였다.


시노의 엄마는 자신의 병을 오랫동안 숨겨왔다. 엄마의 병이 심해지고 나서야 최대식은 병간호 때문에 한국에 들어올 여유가 없다고 사실대로 설명했다. 엄마의 병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시노는 더 열심히 일했다.


급한 일만 처리하고 나면 잠시라도 일본에 건너가 엄마를 만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좀처럼 여유가 생기지 않은 탓에 최근 시노의 신경은 꽤나 예민해져 있었다.



자는 시노를 바라보던 유엔의 눈빛은 따뜻하게 누그러들었다. 처음 시노와 만났을 때 외나무다리를 걷는 고양이처럼 신경이 곤두서 있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는 동안 시노에 대한 경계는 많이 무너졌다.


유엔은 박재열이 베푸는 호의가 양날의 검이라고 확신했다.


아직은 반대쪽 칼날이 보이지 않았지만,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믿었다. 시노도 박재열이 일감을 빌미로 어떤 요구를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막연히 아빠와 좋은 관계를 맺은 거래처 사장이 베푸는 선의 정도로만 생각했다. 엄마가 아프다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부쩍 시노의 판단력은 흐려졌다.



“일어났어?”

시노는 몸을 뒤척이더니 TV 쪽으로 돌아누우며 아침 인사 대신 어제 하던 이야기만 계속했다.

“오늘 약속 같이 가. 너도 직원이잖아.”


유엔은 시노의 회사 일을 자주 도왔다. 운송조건에 따라 물류 예약도 하고, 수입 통관에 필요한 서류를 거래하는 관세사로 보내는 일도 했다. 아직은 시노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대수롭지는 않아서 따로 월급을 받지는 않았다.


돈을 떠나서 진심으로 시노를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열심히 사는 시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최근에는 일을 핑계 삼아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시노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난 안 가고 싶은데.”

유엔은 아무리 생각해도 박재열을 직접 만나는 건 불편했다. 게다가 오은명 여사가 유엔에게 주의하라고 당부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


“사장으로서 업무 지시입니다. 오늘 회의에 참석하세요. 복장은 비즈니스 캐주얼입니다.”

시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유엔을 팔을 잡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할 수 없지.”

유엔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속 장소는 시노의 사무실이다.

여전히 낡은 사무실을 계속 쓰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엄마와 함께 살겠다는 마음이 강했던 터라 집이나 사무실 공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아빠도 없이 사무실 이전을 처리할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 오래 살긴 했지만, 집을 이사하거나 사무실을 이전하는 복잡한 일은 시노에게 막막하기만 했다.


유엔은 책상에 앉아 진짜 정규직 회사원들이 일하는 것처럼 컴퓨터를 열어 부가세 신고 서류를 살펴보더니 담당 세무사의 사무장과 추가 증빙서류에 대해 통화를 했다.


시노는 자기에게 없는 유엔의 능력을 높이 샀다.


시노는 한국에 살며 경영사무를 배우고 있지만, 유엔처럼 손익계산서나 재무제표를 이해하지 못했다. 유엔은 경영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있으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업무처리를 했다.



박재열이 사무실에 들어온 것은 오후 4시였다. 짙은 차콜색 정장에 무채색에 가까운 진한 보라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옅은 줄무늬나 체크 무늬 하나 없는 단색의 정장은 언뜻 답답해 보이면서도 묘한 위압감을 줬다.


박재열을 본 유엔의 눈빛은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박재열은 젠틀하게 인사했다. 말하는 눈빛과 표정에서 격이 느껴졌다. 유엔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어색하게 일어나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여원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M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면서요.”


“네.”

박재열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기운을 풍겼다.


유엔은 차갑고 서늘한 기운에 몸을 움츠렸다.


작가의말

마침내 운명의 주인공 규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만 스무살 생일날 고독하게 집을 나선 그를 기다리는 운명은 무엇일까요? 우연이 아닌 유엔과 시노의 만남, 그 사연에 감춰진 비밀이 이제 드디어 정체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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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4) 18.10.16 199 3 12쪽
12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3) 18.10.12 219 3 13쪽
11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2) 18.10.09 209 4 13쪽
»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1) 18.10.07 247 4 11쪽
9 3장 굴속의 너구리 (3) 18.10.02 219 4 11쪽
8 3장 굴속의 너구리 (2) 18.09.29 242 4 12쪽
7 3장 굴속의 너구리 (1) 18.09.26 260 3 11쪽
6 2장 유엔과 시노 (3) 18.09.25 270 5 12쪽
5 2장 유엔과 시노 (2) 18.09.20 271 3 12쪽
4 2장 유엔과 시노 (1) 18.09.13 298 3 11쪽
3 1장 염곡동 살인사건 (3) 18.09.06 328 6 13쪽
2 1장 염곡동 살인사건 (2) 18.08.30 363 8 13쪽
1 1장 염곡동 살인사건 (1) +1 18.08.22 581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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