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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민(煩悶)

은퇴한 영웅은 기둥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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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민
작품등록일 :
2024.09.06 19:45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956
추천수 :
44
글자수 :
67,005

작성
24.09.07 06:25
조회
523
추천
9
글자
12쪽

01화_해신을 낚았다

DUMMY

“죽어.”


───스겅!


10번째 마왕을 죽였다.


“우와아아아!”


누군가에게 영광일 수 있는 이 순간을.

나는 10번이나 지나왔다.


이제는 지겹다.

고 속으로 외칠 때.


『용사여 고생하였다.』


신의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익숙한 차원문이 내 앞에 생겨났다.


**


『그래서 이번엔 어떤 것을 얻고 싶은 것이더냐.』


새하얀 공간.

포근하면서도 저음의 중후한 여성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여기도 이제 새롭지 않네.


용사는 고개를 들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신이란 존재를 쳐다봤다.

강한 빛 때문에 형체만 보일 뿐 또렷한 모습은 10번째 만남인 지금도 볼 수 없었다.

용사의 검은 눈동자는 공허했다.


『전처럼 금은보화를 내려주면 되겠느냐.』

“······”

『그럼 부와 명예를 주면 되겠느냐?』

“······”

『왜? 여자와 향락이 필요하더냐?』

“······”


용사는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정할 수 없었으니 당연한 흐름이었다.

3번은 금은보화를 받아서 부를 축적했고.

3번은 부와 명예를 받아서 작지만, 왕국 하나를 다스려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3번의 결혼을 했지만, 어째서인지 실패했었다.

그의 다른 자아도 용사여서였을까.

3명의 전 부인만이 이유를 알 뿐이었다.


『낯설구나. 용사여. 이토록 침묵을 귀하게 여겼던 적은 없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제야 입을 여는구나.』

“생각이란 걸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입을 뗀 것을 보니, 그 생각이란 걸 마친 듯한데. 어서 말해 보거라.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


나에게 필요한 것.


용사는 마음이 텅 빈 듯이 허전했다.

뜨거운 열망은 용사로 선택된 10년이 지났을 무렵 사라졌었다.

그때가 첫 번째 마왕을 물리쳤던 때였는데, 처음을 같이 했던 동료들은 그의 옆에 없었다.

처음이었고 혼자만이 살아남았던 터라, 용사의 마음은 쉽게 무너졌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자리를 잡은 허전함이란 녀석을 채우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왜 또 말이 없느냐.』

“다른 것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말해 보거라.』

“······”


전지전능하다면서 내 허전함을 채우지 못할까.


용사는 의문이었다.

기적을 행하는 존재지만, 어째서인지 용사의 문제점을 알아주지 못하는 신이 의심스러웠다.


『내가 의심스러운 것이냐.』

“어? 들리셨습니까?”

『나는 신이다. 당연히 알지.』

“그런데 왜 모른 척하셨던 겁니까?”

『네가 아니면 안 됐으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펜이 아니라 칼자루만 잡아서 생각이 짧거든요.”

『찾았다는 말이다. 너의 후임자를.』

“······!”


용사의 눈이 오랜만에 반짝거렸다.

그에게 있어서 후임자는 희소식인 셈.


『그래. 그간 미뤄왔던 일을 하고 싶은 게로구나.』

“네. 이제,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열 번의 마왕을 무찌른 용사여.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겠다. 마지막으로 나를 보는 것인데, 특별히 인과율을 조금 비틀어서라도 들어주마.』

“그 인과율을 지키기 위해서 마왕을 때려잡았던 건데, 제가 그러면 되겠습니까.”

『하하하하하!』


신은 만족한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아니다. 너는 인과율을 어겨도 된다. 내가 허락하지. 그리고 네가 인과율을 비틀어봤자 얼마나 비틀겠느냐.』

“인간은 유한하지만, 무한한 존재입니다. 그 때문에 다른 종족이 아닌 인간을 선택하신 게 당신이었지 않습니까.”

『괜찮대도. 이번에 소소하게 즐기고 온 것이 있는데.』

“······”


용사가 헛웃음을 지었다.


『왜 웃는 것이냐?』

“일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과율 총량을 두고 신들끼리 내기를 하신다고.”

『······』

“축하드립니다.”

『크흠!』


신은 들킨 것이 무안한지 헛기침했다.


『아무튼,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


신이 말을 멈췄다.

용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을 정리한 신이 말을 이었다.


『너는 이미 인과율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니더냐.』


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용사의 앞선 행동에서도 인과율을 지키기 위해서 10번이나 하계에서 올라오는 마왕을 저지했었다.

그런 사명감이 투철한 존재에게 네가 인과율을 벗어난 존재라고 하면 그동안 가졌던 가치관이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음.”

『왠지 이미 알았다는 눈치구나.』

“그래서 괜찮다고 한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하하.』


신은 용사가 기특했다.

이미 자신도 마왕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달았는데, 망연자실하지 않고 지금까지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이런 점 때문에 그 코흘리개였던 너를 선택했던 것이지.』

“칭찬 감사합니다.”

『그러니 너는 보상을 받아도 충분한 존재다.』

“······”

『거절은 거절한다. 그냥 받거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의 인연은 인간으로 따진다면 깊고 깊은 것이 아니더냐.』

“······”

『친우가 준다고 생각하고 받거라.』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아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해 보거라.』

“······”


용사는 이전에 대마법사와 나눈 얘기를 떠올렸었다.


**


8번째 마왕을 처치하고 휴식 시간을 가졌을 때.

용사에게 대마법사가 찾아왔었다.

노년에 접어든 모습의 대마법사는 행동거지는 젊은이처럼 가벼웠다.


“이봐! 미르! 집에 있는가!”


-쾅쾅!


수면 안대를 벗은 용사가 인상을 썼다.

단잠에 든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


“별거 아닌 거로 유난을 떤 거면 백색 마탑을 부숴버리겠어.”


문을 열자, 대마법사가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심드렁한 표정을 한 용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뭐야 이번엔.”

“내가 진짜 재밌는 걸 찾았는데.”

“본론만.”

“자네도 이걸 본다면 엄청 즐거워할 걸세!”


대마법사는 장담한다는 듯 소리쳤다.

고개를 가로저은 용사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따라갔다.


백색 마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지하로 내려갔다.

엄청난 설비와 함께 장치 가운데는 마왕을 토벌하면서 잡았던 블랙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가 설치돼 있었다.


“저건 블랙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잖아.”

“하하하. 그렇지.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담는다는 귀하디 귀한 재료지!”


자신감 있는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그래서 저 귀한 재료로 뭘 만들었지?”


용사의 물음에, 대마법사는 은근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른 차원을 엿볼 수 있지!”

“응?”

“놀랍지 않은가? 이 세상은 하나가 아니란 소릴세! 우리와 같은 지성체가 어딘가에서 살아 숨을 쉬고 있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이야기인가!”

“하하.”


용사는 건성으로 웃으며 반응했다.


“자자. 아주 짧은 시간만 엿볼 수 있으니. 집중해서 보게나!”

“다음은 없는가?”

“당연하지. 차원을 넘는 마법은 엄청난 마나가 필요한 것이니까.”

“그, 텔레포트는 잘 사용하지 않나.”

“그거야 우리 세계 한정으로 움직이는 것이니까. 8성 정도만 돼도 자유롭게 사용하는 거지. 이건 완전히 다른 차원을 보는 일이라니까.”

“그렇군.”


용사는 별 기대가 없었다.

괴짜라고 불리는 대마법사는 친구가 용사뿐이었다.

그만큼 유난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대마법사였다.


“자자. 시작하겠네!”


대마법사가 뭔가를 중얼거리자, 드래곤 하트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공으로 네모난 창이 떴다.

그곳에는 다양한 그림이 세로로 배치돼 있었다.

그림 옆으로는 글자와 숫자가 적혀 있었는데, 용사는 해독할 수 없는 문자였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대마법사가 소리내기 시작했다.


“해신을 낚았다. 낚시는 이렇게 하면 쉽다. 초보가 바다낚시에서 유의해야 하는 점.”

“······?!”


용사는 놀란 표정으로 대마법사를 바라봤다.


“이게 좋을 거 같군! 해신을 낚았다.”

“······!”


대마법사가 어딘가를 가리키자, 네모난 창이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서는 그림이 실제처럼 움직였다.

더군다나 놀라운 건 음성이 나온다는 것.


“이, 이게 대체 뭔가.”

“나도 차원 마법을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것인데, 자네는 우리 말로 안 들리는 건가?”

“그, 그래.”

“아! 역시! 이 마법은 사용자만 조정해주는 효력이 깃든 거 같군!”


대마법사는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쾌감에 어깨를 흔들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아, 동영상이라고 하는 건데. 지금 해신이라 불리는 돗돔이란 생선을 낚았다는 말을 하고 있네.”

“아···.”


용사의 눈에 들어오는 상황은 얇은 막대기로 바다에 드리운 줄에 걸린 거대한 생선을 낚는 순간이었다.


“우리와는 많이 다른 문화와 복식을 갖추고 있구만.”

“하하하. 어떤가! 재밌지 않은가?”


공허했던 마음이 어딘가 채워진 기분이었다.

용사는 다른 영상이 보고 싶었다.


“어?”


네모난 창에서 나오던 동영상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애석하게도 우리한테 허용된 시간은 여기까지라네.”

“······”


용사는 입맛을 다셨다.


“왜? 마음에 들었는가?”

“조금.”

“하하하.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지!”

“그.”

“왜? 뭐? 자네도 구미가 당기는가?”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없지는 않네.”

“뭔가.”

“블랙 드래곤의 하트. 그것을 구하면 되지!”

“······”


용사는 질문한 자신이 바보 같았음을 느꼈다.


“왜? 블랙 드래곤의 하트만 구하면 되는 일인데.”

“그놈이 언제 다시 깨어나는지 아는가?”

“아마···.”


대마법사가 손뼉을 쳤다.


“일전에 죽으면서 그랬다네! 쌍둥이가 복수한다고!”

“오!”


용사가 눈에 불을 켰다.

마음속, 공허함을 채울 기회였다.

갈증 나는 중에 마신 한 모금의 물처럼.

용사는 대마법사와 함께 블랙 드래곤 사냥을 나섰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두 편의 영상을 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대마법사와 나눈 마지막 추억이었다.


**


『멀더가 남긴 마법을 받았으면 한다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꽤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마법이구나.』

“안 됩니까?”

『아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하하하. 그래. 그래. 그럼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너에게 선물을 내리겠다.』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용사의 앞에 빛무리가 졌다.

빛이 흩어지고 작은 물건이 생겨났다.


“이, 이건!”


멀더와 함께 영상을 세 편이나 보면서 봤던 다른 차원의 물건이었다.


『그쪽 세상의 물건이다. 결제는 내가 다했으니까. 끊김 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니라.』

“아···.”


끊김 없이 볼 수 있다는 말에, 용사는 떠올렸다.

영상 중간중간에 나오는 의미 모를 이야기들이.


『이름은 아느냐?』

“스마트폰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다른 건 사용하면서 알아가면 되겠구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거면 충분하겠느냐?』

“네.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충분하기도하고 더 가질 목적도 없으니까요.”

『그래, 알겠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신이시여.”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신에게서 빛이 뿜어졌다.

용사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는 와중.

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100년의 고행을 짊어진다고 고생했다. 새로운 씨앗이 너의 짐을 대신 받을 것이니, 여생은 평안하기를 바란다. 용의 운명을 버리고 인간이길 선택한 미르여.』


용사, 아니 미르의 귓가에서 여신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그리고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현실로 돌아온 그는 병사들을 데리고 제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개선식과 열렬한 환대를 받은 미르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오랜만이네.”


아래로는 작은 마을이 보이는 산 중턱의 오두막집.

미르는 자신의 은신처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휴···.”


정리를 마친 미르는 목욕한 뒤, 먹을 것을 챙겼다.

그리고 방 한쪽에 작은 액자에 먹을 것을 올려두며 슬픈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 친구야. 이제는 마음껏 볼 수 있게 됐다. 우리 남은 시간 동안 같이 보면서 지내자고.”


그렇게 말한 미르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너튜브를 켰다.

스마트폰을 쥐는 순간 사용법이 머릿속에 입력된 모양.


“오랜만이지?”


그가 맨 처음 튼 영상은 대마법사 멀더와 함께 봤었던 ‘해신을 낚았다’라는 낚시 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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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화_적당한 자극 24.09.10 31 2 12쪽
10 10화_오크도 튀기면 맛있다. 24.09.09 30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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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7화_계절을 먹다니 신기하네(2) 24.09.08 76 2 12쪽
6 06화_계절을 먹다니 신기하네(1) 24.09.08 123 2 15쪽
5 05화_썰매는 누구나 좋아한다 24.09.08 175 5 15쪽
4 04화_떠나는 자와 머무는 자 24.09.07 224 5 13쪽
3 03화_크라켄을 낚았다(2) 24.09.07 280 6 14쪽
2 02화_크라켄을 낚았다(1) 24.09.07 395 7 14쪽
» 01화_해신을 낚았다 24.09.07 524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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