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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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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센트
작품등록일 :
2020.01.0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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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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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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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006 패도의 정점

.




DUMMY

"크루나의 모든 동식물이 패도적입니다만, 그 정점에 선 건 누가 뭐래도 크루나인입니다. 그들은 그 짧았던 진화의 길에서 마주친 모든 중, 대형 동물을 맹렬한 속도로 멸종시키며 달려갔지요. 동족이나 다름없는 유사 크루나인들을 포함해서요. 크루나인은 마치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만이 그들의 본능에 내려온 사명이라는 듯, 압도적인 파괴를 멈추지 않아 왔습니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서는... "


노교수 넥탄은 물 한 잔을 마시며 숨을 골랐다.


"더는 파괴할 곳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됐지요. 정복할 곳을 잃어버린 크루나인들은 정복의 효율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 크루나에 살고 있는 동식물의 '모든' 생과 사를 통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모든' 생명체의 삶과 죽음을 통제하다니?

대체 어떻게?

대체 왜?

대체 뭘 위해서?


"크루나의 모든 동식물은.. 그래요. ‘모든' 이라 말해도 될 겁니다. 모든 동식물은... 그들에 의해 조건부 생존이 허락된 겁니다. 크루나인에 의해 태어나고, 크루나인에 의해 성장해, 크루나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지요. 크루나의 주요 작물들은 대개 1-2년간 살아가는 식물입니다. 크루나에서는 이 식물들을, 식물이라고도 부릅니다만, 그보다 '작물' 혹은 '곡물' 이라 칭하는 게 보통입니다. 존엄성을 가진 존재 이전에 크루나인이 섭취할 '영양소'나 '제품'으로 여기는 단어이지요."


"크루나인들의 농업은 어떤 형태일까요. 그들은 먼저 땅과 싸웁니다. 토양을 작물이 잘 자랄만 한 환경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새로운 흙을 붓고, 그 작물에 방해되는 곤충을 살해합니다. 애초에 그곳에 있던 토착 생물이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지는 그들에게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새로이 조성된 논과 밭에는 선택받은 작물이 집단적, 일관적, 계획적으로 땅에 꽂힙니다. 크루나인들은 이들에게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지요. 그 작물을 먹기 위해 다가오는, 크루나인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고서 다가오는 수많은 척삭동물과 연체동물은 모두 살해당합니다."


“용맹한 멧돼지도, 유려한 고라니도, 아름다운 까치도, 사랑스러운 참새도. 예외는 없습니다. 모두 죽입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길러진 그 작물은... 몇 달 후 열매를 맺고선 거대한 기계에 빨려 들어가 생을 마감합니다. 이게 바로 크루나의 '농업' 입니다. 아루의 농업과는 개념이 많이 다르지요? 게다가 속이 울렁거리는 설명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음 얘기는 더욱 그럴 거예요."


적막한 강의실에서 넥탄의 말이 이어졌다.


"돼지는 20년 수명을 가진 대형 포유동물이지요. 돌진 시 파괴력이 엄청나서 성체 호랑이조차도 쉽게는 상대하지 못한다더군요. 다 자라면 200킬로그램을 넘습니다. 하지만... 크루나에선 제품에 불과하지요. 크루나인들에게, 20년간 살아갈 수 있는 이 거대 동물은 식재료에 불과합니다. 돼지는 크루나인에 의해 비자의적으로 태어납니다. 양 귀에 번호 식별 구멍이 뚫린 채, 생후 6개월간 전염병과 기아에서 해방돼 크루나인의 적극적인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


노교수는 시선을 잠시 내리곤 입술을 핥았다.


" ..... 공장으로 이동되어 기계장치를 통해 차례대로 살해당합니다. 이게 바로 크루나의 '축산' 입니다. ... 왜 20년간 살 수 있는 동물을 6개월 만에 죽이는 걸까요? 크루나식 관점에서 보자면 아주 당연한 이유가 있습니다."


“20년간 키우면 200킬로의 사체를 얻을 수 있지만, 6개월만 키워도 100킬로그램의 사체를 얻을 수 있거든요. 동물과의 교감이나 섭리를 생각하지 않고, 투자 대비로만 따지면 20배나 고효율인 겁니다. 사실, 크루나는 행성 전체 생명체들이 잔인한 효율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비단 크루나인뿐 아니라 크루나의 다른 동식물도 마찬가지예요. 행성의 지배종인 크루나인이 이런 방식의 축산을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적막했던 강의실은 마치 서리가 끼얹어진 것처럼 얼어붙었다.

평이함과 객관을 가장한 넥탄 교수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고,

학생들은 충격을 넘어선 충격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대체... 왜...왜...왜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학생들의 시선이 모였다.

한 여학생이 두 손을 모은 채, 눈물 흘리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녀의 질문 아닌 질문에 넥탄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페. 답을 알고 있잖아요?"


"ㅁ..물론, 효율을.... 효율 때문이겠지만... 너무해요... 크루나에 대해 알면 알수록 너무 괴로와요 선생님 !!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이런 말을 어디에서 할 수 있겠어요...!!! "


사페가 울부짖었고, 넥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오늘의 제 역할은 여기까지인 거 같군요... 크루나인의 생존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 걸까요? 이제부터 자유 토론을 하기로 하죠."








"악마 족이라 해도 크루나인을 형님으로 모실 거야!"


"이미 모시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해 !!"


"듣고도 믿을 수가 없고, 지금도 믿고 싶지 않아.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할까?"


"사체를 더 효율적으로 얻기 위해서, 고작 그 이유로 6개월 된 어린 동물을 살해하다니... 이게 정말 현실일 리가...."


"더 놀라운 게 뭔지 알아? 크루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살해 행위가 일부 특이 개체의 발상이 아니라는 거야 !! 이 행위에 대해서 행성 전체의 합의가 이루어진 거라고 !!!! 지금 이 순간에도 !! 하루에도 수백만 마리의 어린 돼지가 살해당하고 있다는 뜻이야!!"


"이게 말이 돼? 그들이 육식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나 비윤리적인 행동이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마땅히 자연사한 사체만을 먹어야지 !"


"당연하지 !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어 !"


"게다가 크루나인은 육식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생존이 가능해 ! 크루나에도 채식만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게 그 증거야 !"


"다들 너무 감정적으로 과열된 거 같아. 생각해봐. 크루나는 육지 면적이 아루 절반에 불과해. 그 중에서 혹한지와 혹서지, 험준한 산맥까지 계산하면 정상적으로 식물이 자랄만한 땅은 아루의 2할도 안될 거야. 인구는 우리의 30배가 넘는데 말야. 그들이 잔인할 만큼의 효율을 추구하는 건 그들 나름의 생존방식 아닐까?"


"오, 유마... 말도 안 돼. 500년 전만 해도 크루나의 인구는 우리보다 더 적었어. 그들의 인구수가 폭발하기 시작한 건 공장식 사육과 경쟁적인 농업 때문이라 보는 게 더 타당해 !"


"그것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더 들어봐. 그들은 하루 2천 칼로리 이상이 필요한 생물이잖아? 우리와는 필요한 에너지 단위 자체가 다르다고?"


"유마, 대체 네가 왜 크루나인의 칼로리 걱정을 해주는 거지?"


"에푸, 너 말하는 방식이 너무 크루나인스럽고도 불경하다. 게다가 네 말은 논점에서 벗어났어."


드물게도 화끈한 주제에,

더욱 드물게 학생들의 토론이 불타올랐다.








수.세나와 사용인들이 왕궁으로 떠난 지도 한참 지났고,

경철이 바이크 스로틀을 땡길 때가 됐다.


몇 번의 외유를 통해 알게 된 건데,

아루인들은 시속 60킬로는커녕 30킬로도 버티지 못했다.


잘 깔린 아스팔트 위에서라면 모를까 비포장도로에서의 시속 60킬로는 그들에게 학대를 넘어서 고문과 다름없는 짓이었고,

'시속 20킬로도 이들에게 만만치 않다' 는 걸 알게 된 경철은 느긋하니 1박 2일 코스로 왕궁에 가기로 했다.


고작 70킬로 남짓한 거리를 1박2일로 여행한다는 게 웃기지만,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자체를 재미로 여기기로 했다.




동승한 수.휘비는 20분도 안 되어 멀미를 했다.


"속도 좀 낮출까?"


속도계는 시속 14킬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경철님. 충분히 참을 수 있습니다."


"다 죽어가면서."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고르던 휘비를 기다리며 잠시 적막해진 분위기에 녹차를 마시던 경철이 먼저 말을 던졌다.


"카사는 이럴 때 저기 평원이 어쩌고 강이 어쩌고 말 해주던데, 넌 안 해주냐?"


"경철님이 그런 걸 알고 싶어하실리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죄송스럽게도, 저는 누.카사만큼 지리적 지식이 많지 않습니다. 경철님이 원하신다면 이제라도 공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 됐다. 네 말대로 내가 그런 걸 궁금해 하겠냐."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부족하나마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모두 답해드리겠습니다."


"글쎄. 그렇게 말하면 갑자기.... 어, 맞다. 너랑 세나는 친족이 아니잖아? 그런데 성이 같은 게 예전부터 이상했어."


"아... 경철님. 아루인들의 성은 가문이나 혈족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직업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와 수.세나의 이름 앞에 붙은 '수' 라는 성은 집사라는 직업을 뜻합니다."


"그랬구나... 그럼 '수'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전부 집사인 거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 라는 성은 오직 초대자님의 집사에게만 허락된 성입니다. 행성 전체에 저와 수.세나 2명이 있을 뿐입니다. 일반적인 집사는 '나' 라는 성을 사용합니다."


수.휘비의 대답에는 자부심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럼... 성은 바뀌기도 한다는 뜻이겠네. 넌 내 집사가 되기 전 성이 뭐였어?"


"저는 다른 왕국의 도서관에서 일하던 사서이자 연구생이었으며, 성 없이 휘비라는 이름으로만 불리웠습니다. 성을 받는 사람은 아루에서 극소수입니다. 도서관에서 계속 근무했다면 도서관장이나 연구소장이 되어 다른 성을 가질 수도 있었을지 모르나, 그보다는 초대자님의 집사가 되기를 바랬기에 시험을 치러 발탁됐습니다."


"시험에 합격해 집사가 돼? 어떤 시험?"


"이번 경철님을 보필할 집사 임용시험에는 명문대학 졸업생 9천 4백 명이 몰렸고 4개월간 1차 시험이 치러졌습니다. 각 왕국 제2대학 이내 졸업생들과 현역 연구생 이상으로 응시 자격이 제한되었고, 180개 과목으로 세분화된 시험으로 지원자들의 소양을 파악했습니다. 1차 합격자 30명은 2차 시험을 다시 5개월간 치렀습니다."


"..... 놀랍네... "


정말 놀라웠다.

늘 가까이에서 편하게 보던 세나와 휘비가 이런 초슈퍼울트라 엘리트 애들이었을 줄은.


에파.루 크루나와 그 인근 왕국 최명문 출신 엘리트들이 1만명 가까이 몰렸고,

거의 1년에 걸친 시험과 검증을 거쳐 고작 2명.

세나와 휘비가 선발되었다는 얘기다.

이건 대한민국의 4대고시를 아득하게 넘었고,

조선시대 대과 급제 난이도조차 넘어선 시험 아닌가.


"그럼, 세나가 집사 시험에서 1위였고 네가 2위였다는 말인 거지?"


"그렇지 않습니다. 1집사와 2집사는 순위나 서열이 아닌 구분상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4명을 선발하게 되는데, 그 4명은 1집사와 2집사를 선택하게 됩니다. 저는 처음부터 2집사를 지망했으며, 1,2집사 사이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3집사와 4집사는 1,2 집사의 보조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렇구나. 근데 난 너네를 서포트해야 할 3집사 4집사를 본 적이 없는데?"


"3,4 집사 역할을 맡아야 할 그 둘은 연수원에서 중도 포기했습니다. 현재 결원을 채우기 위해 다시 연수원 교육이 이루어지는 중입니다."


"음... 휘비야. 네가 하는 일을 무시하는 건 아닌데 말야, 크루나에서 살다온 나로서는 집사가 그렇게까지 전문적인 직업인지 잘 모르겠다. 네 말대로라면 너랑 세나는 내 수발 드는 것보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해야할 애들 같거든?"


"경철님. 저와 수.세나는 더이상 의미를 찾기 어려울 만큼, 충분한 기쁨으로 가득차 경철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말야. 너넨 아루 행성 전체에서 20,30대 최고 최강 스펙을 가진 애들인데, 여기서 내 심부름이나 하고 있기엔 너무 아깝잖아?"


휘비는 살짝 미소지었다.

늘 변화 없던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발견한 표정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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