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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T 님의 서재입니다.

가시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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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T
작품등록일 :
2019.07.15 15:49
최근연재일 :
2019.09.22 09:05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503
추천수 :
11
글자수 :
133,117

작성
19.08.0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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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7. 악몽에 빠진 소년(7)

DUMMY

“크로바베에엘~!”


쾅쾅쾅!


목청이 나가도록 크로바벨을 부르며 쇠창살을 두드리는 주먹은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수감자, 히스텔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흐르는 자신의 피만큼 짙은 원한을 풍기며 상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추가된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차단천을 걷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쇠창살 안에 새로운 입주객들이 모두 들어서가 병사는 망설임없이 철문을 닫아버렸다.


쿵!


철컹, 철컹!


노예의 탈출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잠금장치는 이제 주인과 손님들이 쏟아지지 않도록 막게 되었다.


하지만 창살 밖으로 뻗어나오는 팔다리만큼이나 원성이 많아졌다.


“내보내줘!”


“으아아아아!”


“문 열라고 이 X끼들아! 내가 누군지 알아! 아냐고!”


애원도 하고 미친 척도 해보고 협박도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구슬로 가득한 주머니처럼 앉지도 못하고 서로 부대끼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저들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마도구로 덮으면 조용해질 테니까.


“거 되게 시끄럽게 구네.”


마지막으로 추가 입주를 끝내고 모든 마차들에 마나 차단천이 덮였다.


소음차단 효과 덕분에 조용해지긴 했지만, 창살 밖으로 뻗어나온 손발이 그로테스크한 형태로 천막을 밀어냈다.


“쯧! 싹 다 묶어버려. 괜히 벗겨지면 단장이...”


부르르...


뒷말을 하지 않아도 단원들과 병사들이 알아서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두꺼운 줄을 꺼내와서 칭칭 감기 시작했다.


숨은 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지만 타일리는 전혀 말리지 않았다.


저렇게라도 자신들의 주제를 파악한다면 싸게 먹히는 편이었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소음의 원흉들이니까.


지금 기를 죽여놓지 않으면 당분간 동행해야 하는 입장에서도 스트레스가 가득 찰 것이다.


자신도, 부하들도, 그리고 누구보다 상관인 크로바벨 역시.


앞선 둘은 버틸 수 있어도 마지막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저들은 처형당하고 끝이지만 자신들은 계속된 상관의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할 테니까.


고개를 휘저으며 잡음의 여운을 떨쳐낸 타일리는 본래의 위치로 복귀했다.


원래 자리에는 데이란을 살피고 온 크로바벨이 먼저 돌아와 있었다.


가장 큰 소음의 원흉이기도 한 크로바벨을 마주하자 왠지 모르게 한 마디가 하고 싶어졌다.


“저놈이 계속 단장만 찾던데 꽤나 애뜻한 사이였나 봅니다?”


누가 봐도 애뜻보다는 살벌한 관계였음에도 타일리는 단어 선택을 바꿀 맘이 없었다.


그러기엔 자신들이 너무 시달렸으니까.


다행히 크로바벨도 다른 방향으로 집중하고 있어서 비꼬는 어휘는 관심도 주지 않고 넘어갔다.


“나름 좋은 선배였는데 이렇게 뵙게 되서 안타깝긴 하지.”


입으로는 안타깝다고 하면서도 표정은 무심함의 극치였다.


애초에 크로바벨에게 좋은 선배라는 게 없어서 지극히 형식적인 답한 것 뿐이었다.


졸업 논문을 표절해서 유급당하고.


불법 인체실험을 행하여 학회에서 쫓겨났으며,


이제는 데이란과 관련된 행적에도 끼어들었다.


좋은 선배에겐 어느 것 하나 어울리지 않는 이력이었다.


물론 다른 의미로 꼰다면 정말 아낌없이 준 나무와도 같았겠지만.


이런 말을 하면 히스텔은 억울함에 복창이 터질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이 원해서 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크로바벨이 보기엔 답답한 면도 많았다.


“두 번이나 당했으면 세 번째는 더 경계할 법도 한데 참 나... 발전이 없단 말이지.”


아니, 잡히기 싫으면 알아서 잘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도 매번 자신의 실수를 드러내니 이젠 매번 잡았던 크로바벨이 황당할 지경이었다.


표절을 할 거면 그대로 옮기진 말든가.


납치한 아이들로 불법 실험을 할 거면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이번에도 자신의 손길이 가득한 마도구를 넘기면 대놓고 경계하라는 말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제삼자의 시점에서는 조금 달랐다.


“우와~,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길래 그랬던 겁니까? 제가 보기엔 그냥 빌빌거리는 약골인데요.”


웬만한 기사들의 평균을 뛰어넘는 덩치의 타일리에게는 누가 약골이 아니겠냐마는 히스텔은 특히 심했다.


비쩍 마른 몸에 홀쭉 들어간 뺨, 그리고 창백한 피부까지.


그나마 독기가 서린 눈빛은 살아있다고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요소였다.


옷만 바꿔 입으면 학대당한 노예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기에 반대임을 알아도 히스텔이 피해자 같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크로바벨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괜히 오해가 쌓이는 건 싫어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내가 참고하던 졸업논문을 표절하길래 고발한 거고. 두 번째는 노예상에게 납치된 줄 알았는데 발견한 거야. 이번은... 결국 재수가 없는 거지.”


“듣고보니 또 그렇네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는 크로바벨을 보니 진짜로 별거 아닌 일 같았다.


크로바벨의 주장에 따르면 길가다 눈에 띈 나무열매 같다고나 할까?


배는 안 찰 것처럼 작은데 잘 익은 게 눈에 보이니 하나 먹을까? 싶어서 손을 뻗은 느낌이었다.


히스텔이 들었다면 혈압이 올라서 쓰러질 정도의 모욕이지만 두 사람 모두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도 타일리는 그가 조금은 안쓰러워졌다.


본인은 저렇게 사력을 다해서 분노하는데 정작 그 대상은...


“뭐하십니까?”


“보면 몰라? 담요 만들고 있잖아. 아무래도 밤에 숲은 추울 테니까.”


말 위에서 실뜨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실뜨기라고만 하기에는 애매했다.


처음 털실을 손에 잡고 2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상체를 가릴 정도로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가지 색으로 밋밋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저 많은 털실은 어떻게 구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다양한 색들이 엮이면서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검술에 마술, 공작으로서의 업무도 모자라 뜨개질이라니.


도대체 저 인간이 못 하는 게 뭔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뜨개질보다 못한 관심을 받는 히스텔을 동정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좋은 취급은 아니었으니까.


“범죄자긴 하지만, 이 정도로 무시당하니 불쌍하네.”


“...그러게요.”


“엇!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요.”


혼잣말에 호응받아 놀란 타일리의 시선에는 소리 없이 다가온 벨로즈가 들어왔다.


너무나 조용한 등장에 놀란 그는 당장이라도 말에서 떨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다행히 균형을 잡아 위기를 모면했지만 식은땀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기척없이 다가오는 건 그렇게 신기할 일이 아니었다.


자신도 기습을 할 때는 항상 하는 일이고 상대는 같은 1급이라도 자신보다 뛰어난 기사였으니까.


얼마든지 은밀하게 다가오는 건 가능했다.


그럼에도 놀랄 수밖에 없는 건 벨로즈가 말을 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발굽소리는 어떻게...?’


사람의 기척을 죽인다고 해도 동물도 그럴 수 있을까?


사냥하는 맹수가 그러긴 했다.


소리에 민감한 사냥감이 기척을 듣고 도망치면 자신만 손해였으니까.


하지만 사람도 아니고 말이!


그것도 발굽에 강철로 된 편자를 박아둔 말이!


숙련된 기사인 자신의 감각을 피했다는 건 상식을 빗겨가는 일이었다.


마도구일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여태 함께 임무를 수행하며 벨로즈가 마도구를 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기척을 느낀 뒤로는 자신의 귀에도 제대로 벨로즈의 말이 울리는 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자신이 무심한 크로바벨과의 대화에 심하게 몰입한 것도 아니었다.


납득하고 싶어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타일리의 선택은 우직한 직진이었다.


“벨로...”


하지만 그의 직진은 상대가 받아줘야만 성립될 결심이었다.


그리고 벨로즈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여기는 연두색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렇네? 근데 털실이... 연두색 있어?”


“핑크색과 바꿔드릴게요.”


자연스레 크로바벨의 작업에 끼어든 벨로즈는 원하던 색상으로 털실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잠시 멈췄던 자신의 작업을 재개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도 좋을 두 사람이 나란히 말 위에서 뜨개질을 하는 광경은 기이한데 어울렸다.


“...”


멍하니 보고 있자니 저것도 검술 수련의 일부로 여겨질 정도로...


*


에스탈 시티는 센트나 제국에서도 조금 특별한 대도시였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플랑시 강이 서쪽으로 지나면서 덕분에 수상운송이 발달했다.


또한 동쪽의 구릉 너머로 거미줄처럼 뻗어가는 수많은 육로로 타지역의 상품들이 행상인들과 함께 방문했다.


비옥하다고 칭찬은 못해도 척박하지 않은 토양은 그런대로 곡식을 키워낼 수 있었다.


때문에 에스탈 시티는 제국의 중심지가 아님에도 물류 산업의 한 축을 맡고 있었다.


교역의 중심지인 만큼 세금 수입도 막대했기에 인근 영주들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황실의 관리 하에 두었다.


하지만 제도와의 거리상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었기에 직접적인 관리는 불가능했다.


대신 황실에서 선출한 세 명의 대리인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운영에 힘썼다.


물론 완벽한 균형점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도 에스탈 시티는 큰 문제 없이 지금껏 성장했다.


이런 도시에 행렬이 도착한 건 정오 무렵이었다.


하지만 크로바벨 일행은 여전히 성문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에스탈 시티의 검문이었지만 무려 3시간이나 소비하여 마침내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문제가 없으므로 출입을 허가하겠습니다. 개문!”


“개문!”


“개문하라!”


수문장의 호령에 병사들이 복창했다.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대도시인 만큼 에스탈 시티의 성벽은 낮고 성문은 많았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들어올 수 있었지만, 반대로 외부의 침입에 취약했고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지금과 같은 깐깐한 검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문이었다.


방문객들의 목적과 규모에 따라 차이를 두는 동시에 적습에 대비하도록 했다.


일반 여행객이나 행상인이 통과하는 작은 문은 많은 대신 쉽게 폐쇄할 수 있는 구조였다.


문을 닫아 시간을 버는 동안 반대편에 쌓인 돌탑을 무너뜨려 완전히 막는 식이었다.


큰 상단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중간 크기의 경우에는 겹겹이 쇠창살이 떨어지는 구조였다.


때문에 차라리 성벽을 넘는 게 뚫는 것보다 빨랐다.


마지막으로 크로바벨 일행처럼 국가적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단이나 군단이 사용하는 대형 성문은... 성문이 아니었다.


덜컹!


드르르...


쿠구구구...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움직인 건 성문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열리는 모습은 분명 성문이었지만, 닫힌 모습은 말 그대로 성벽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과거 기계장치에 관심이 많던 마술사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에스탈 시티의 움직이는 성벽이라는 이명으로 유명해졌다.


심지어 문이 열리는 걸 보고 싶어서 방문하는 관광객이 있을 정도!


하지만 움직이는데 큰 마나를 필요로 하는 만큼 웬만해선 잘 열리지 않는 문이기도 했다.


그런 문이 열린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행이 황실의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훌륭한 전과를 세워 이를 널리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지금처럼.


쿵!


“성문이 열렸다!”


“저거 뮈스카 기사단이다!”


“루브리플로아 공작가도 있어!”


“와아아아!”


실로 오랜만에 열린 대성문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탄성을 자아냈다.


하지만 군중의 환호와 열정의 대상이 크로바벨은 불편해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애써 관심을 성벽이 그대로 사용된 성문으로 돌렸다.


“매번 볼때마다 어처구니가 없네. 무식한데 대단해.”


“캬아~! 그래도 전 부럽기도 합니다. 제도의 성문도 이렇게 만들면 훨씬 방비가 단단해질 텐데... 아! 물론 검문은 좀 간략화하고요.”


타일리의 탄성 가득한 소원에 잠시 상상해봤다.


하지만 그런 짓을 벌였다간 황실의 등골이 휠 것이다.


매번 기사단의 출정 때마다 성벽을 열어야 할 텐데 그럴 때마다 동원될 마석의 비용은 상당할 것이다.


성벽 높이만 보면 가장 낮은 제도의 성벽도 에스탈 시티의 두 배는 되니 어쩌면 예상보다 더 큰 금액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또한 삼중으로 된 제도의 성벽도 문제였다.


가장 바깥의 외성벽은 괜찮아도 다른 두 성벽 열릴 때를 대비해서 항상 공유지로 땅을 놀려야 할 테니까.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짓이었다.


만약 정무회의에서 저런 발언을 했다면 그 자는 황성에 발도 못 들일 정도로 공격받을 것이다.


도저히 못 받아줄 대답에 후회하기 시작한 크로바벨을 구해준 건 길가에 서있던 한 사람의 노인이었다.


연미복을 차려입고 있는 그는 크로바벨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각하.”


“오랜만이야, 테네오. 아직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네.”


“각하께서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노인의 정체는 테네오.


루브리플로아 공작가를 모시는 집사장이었다.


무려 4대에 걸쳐 공작가를 위해 봉사해온 베테랑이었다.


기사단 일로 인해 공작령을 비운 크로바벨을 대신해 어머니와 함께 영지를 운영하고 있는 영주대행이기도 했다.


지금쯤 영지에 있어야 할 그가 이곳에 마중나왔다는 건 한 가지 의미였다.


“어머니께서 벌써 도착하신 건가?”


“예, 현재 공녀님과 함께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데이란를 생각해서 하루 더 늦게 도착한 걸 감안해도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소식에 대충 그 방법이 상상되었다.


“마중을 못 나올 정도면 많이 무리하셨나?”


“밤에도 멈추지 않은 마부들이 20시간째 깨어나질 않고 있습니다.”


“미안하군. 자네도 고생이 많았어.”


차마 아니라고 안심시키기에는 무리였던 테네오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말 대신 충분한 답을 받은 크로바벨은 이번에 온 사용인들의 휴가를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정을 검토하기 전에 테네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도... 공자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조심스레 묻는 노집사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공작가의 최고참 사용인인 그가 바뀐 호칭을 한 번 틀릴 정도였다.


크로바벨이 공작이 되며 더 이상 도련님이 아니게 된 데이란을 찾는 테네오의 눈빛은 정말로 간절하고 애달팠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축축하게 젖어든 슬픔에 공감될 정도로.


어차피 해코지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크로바벨은 순순히 데이란의 마차를 알려주었다.


“...공자님의 얼굴을 봬도 괜찮을까요?”


“상태가 많이 안 좋아. 그러니까 자네가 보고 어머니께 먼저 가서 잘 전해줘. 너무 충격받지 않으시게.”


“네.”


허락이 떨어지자 조심스레 다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담요였다.


담요라고 하기엔 굉장히 넓었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화려한 색 따윈 노안이 온 그에게 번잡해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담요가 시선을 사로잡은 건 털실들이 엮이며 그려낸 한 폭의 그림 때문이었다.


너무나 친숙한 방이었다.


그리움을 잊기 위해 집사장인 테네오가 직접 청소를 하던 장소인 동시에 주인을 잃고 쓸쓸함으로 가득하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방은 같지만 전혀 달랐다.


쓸쓸함 대신 공작가 식구들의 환한 미소가 채워져 있었다.


5년 동안 온기를 품지 못한 방은 생기 넘치는 기운으로 가득했다.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했고 보고 싶었던 순간이 그곳에 있었다.


주르르, 똑.


참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쏟아진 물방울이 턱 끝에 모여들어 방울방울 떨어졌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홍수에 연륜이고 냉정한 이성도 전부 휩쓸리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은 루브리플로아 공작가의 집사장이었다.


언제나 단정하고 침착하게 주인들의 곁을 지키며 손과 발이 되어주어야 할 가신이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 처해도 감정에 휩쓸려선 안 된다는 사상이 있기에 힘이 풀릴 뻔한 다리를 다잡았다.


그리고 시선을 천천히 움직였다.


서두르면 감정을 잡고 있던 이성과 사상이 손을 놓아버릴 것 같았기에.


신중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며 시선을 던졌다.


마침내 그의 눈에 데이란이 들어온 순간, 테네오의 눈물이 멈췄다.


비쩍 마른 몸이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그에게 뻗었을 악인들의 손길에 분노해서도 아니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나 아깝고 귀중했으니까.


대신 그의 가슴을 뛰게 한 건 기쁨이었고 감사함이었으며 설렘이었다.


아니, 이것만이 아니었다.


애달픔, 그리움, 황홀함, 기대감 등등.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늙은 몸뚱이에 힘을 넣어주었다.


복잡하게 연결되지만 단순하게 통일되는 감정의 흐름 앞에서 평소의 차분하기만 하던 테네오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휩쓸리지도 않았다.


오롯이 느껴지는 모든 감정들을 담고 담아낸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최고참 가신의 5년 간 이어진 기다림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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