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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T 님의 서재입니다.

가시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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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T
작품등록일 :
2019.07.15 15:49
최근연재일 :
2019.09.22 09:05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501
추천수 :
11
글자수 :
133,117

작성
19.07.15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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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프롤로그. 가시넝쿨 소년

DUMMY

철그렁~.


소년의 뒤척임에 따라 연결된 쇠사슬이 차갑게 울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앙상한 팔다리를 움츠려도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거적때기는 차가운 돌바닥의 냉기를 여과없이 투과했다.


그럴수록 소년은 본능적으로 사지를 심장이 가까이로 중심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소년에게 당장 필요한 건 한 줌도 되지 않는 온기가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마른 몸은 당장 먹을 음식이 필요해보였다.


제대로 된 영양분을 먹지 못해서 또래보다도 훨씬 왜소한 체격과 젖살은커녕 움푹 패인 뺨은 말라버린 미라를 연상시킬 지경!


꿈틀거리는 사지와 힘겹게 움직이는 흉부는 소년이 생존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걸 알렸다.


하지만 소년의 호흡은 매우 위태롭고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갓 태어난 신생아조차 생존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행하는 행위였으나 소년에겐 가장 힘들고 어려운 활동이었다.


마치 팽팽하게 당긴 실위에 푸딩을 올려놓은 것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꼬르르르~.


벌써 이틀째 어둠 속에 갇힌 소년의 배는 상황도 모르고 음식을 요구했다.


지금에 와서는 쥐똥이 담긴 식판이 던져지더라도 그곳까지 손을 뻗을 힘조차 남지 않았다.


사실 소년의 상태는 어떻게 보더라도 죽음의 문턱에 한 없이 가까웠다.


아니, 죽지 않고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굶고 갇혀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 아로새겨진 온갖 학대와 실험의 흔적들은 도저히 인간이 견딜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 겉모습만이 아닌 몸속조차도 엉망이었기에 노예상조차 소년의 생존을 포기한 상황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을 거치면서 본래의 신분도, 이름도 사라진 노예.


그런 소년을 헐값에 드려온 건 어디까지나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하고 죽어버린 채무자 탓이었다.


근데 이렇게 쓸모가 없어서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게 손해였다.


아니, 고칠 수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리고 팔 수 없는 노예는 화상 입은 엘프, 손이 잘린 드워프보다도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죽여서 암매장한다는 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되었기에 신경 쓰이지 않도록 지하감옥 가장 안쪽에 처박아놓고 방치했다.


그러자 가장 이득을 본 건 지하 감옥의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의 주된 업무는 감옥과 노예들의 관리 및 교육!


오래된 폐성의 지하감옥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하수시설 같은 게 제대로 되어있을 리가 없을 터!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만큼 노예의 기를 죽이고 교육하기 좋은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물을 그대로 방치했다가 전염병이라도 돌면 큰일이었기에 그들 관리자들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용주인 노예상에게 따졌다가는 그의 곁을 지키는 어깨들과 면담 후 사라질 것이고 상품인 노예들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판매를 포기하고 방치한 노예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어차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망가진 상품은 그 이상 망가져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소년처럼 방치된 노예들 중 오래 사는 사람은 없었다.


때리고 굶기고 괴롭히고.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를 상대로도 그들의 행위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저항하지 못하는 약자에게 향하는 폭력은 그들에게 우월감을 만끽하는 기회로 작용했다.


노예상도 따로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자신 대신에 손을 더럽혀주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 없었으니까.


오히려 저들이 스트레스를 풀고 다른 노예들의 관리에 더욱 힘쓴다면 노예상의 입장에선 이득이었다.


그래서 방치하길 반년.


금방이라도 개미가 뭉개지듯이 사라질 것 같던 소년은 여전히 지하감옥 최심부에서 살아남았다.


뼈가 부러지고 입안이 터져도 죽지 않았다.


며칠을 굶겨도 거꾸로 매달아도 죽지 않았다.


눈을 가리고 공포심을 부추겨도 죽지 않았다.


죽을 것 같으면서도 결코 죽지 않는 모습은 혹시 사람이 아니라 마수인가 싶은 의구심까지 낳았다.


하지만 인간형 마수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러니 소년이 유달리 명이 길다는 뜻이었고 이는 노예상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반신을 뒤덮은 흉측한 문신 말고는 다른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변화라고 해도 조금 진해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


하지만 조명에 의한 차이로 치부될 수준에 그쳤기에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래도 특이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바!


비록 상품으로써의 가치는 없었지만 선물로 할 수는 있었다.


“마술사 님께 드릴 선물로 해야겠군요.”


마침 며칠 뒤에 열릴 큰 경매 행사에 참가하기로 한 마술사가 있었다.


불법으로 어린 노예를 사서 인체실험을 한 경력으로 인해 협회에서 추방당한 그는 노예상처럼 뒤가 구린 이들과 상생하는 불법 마술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거기다 여전히 과거의 취향을 버리지 못한 바.


이 소년 노예의 이야기를 듣고 선물 받는다면 꽤나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했지만.


때문에 노예상은 일단 관리자들에게 소년을 괴롭히는 걸 멈추게 했다.


하지만 검증을 위해서는 당일까지 굶기는 걸 멈추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오늘!


마술사를 포함한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는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


보통이라면 빛 한 점 없는 세계에 적응했을 눈은 포기를 선택했다.


애당초 어떤 빛도 없는 곳에 적응한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시야가 막히는 만큼 다른 감각들은 예민하게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도 도움이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쥐나 벌레들의 기척, 그리고 다가오는 관리자들의 발소리는 몸에 새겨진 아픔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미각은 차라리 없는 게 좋을 정도로 입안의 단내만 느끼고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하며 몸에 밴 체취는 둔하게 만들었는데 오히려 예민해진 촉각은 날아드는 주먹의 아픔만 키웠다.


어떻게 봐도 이득이 없는 상황 속에서 소년은 세상을 원망했다.


왜 아파야 하는지.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


누가 자신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세상은 계속해서 아픔만을 주었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서서히 생각은 바뀌었고 소년은 포기를 배웠다.


결국 묻지 않았다.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목숨을 애원하지 않았다.


구원의 손길은 그의 곁을 찾지 않았으니까.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세상엔 자유 따윈 없으니까.


그러자 아픔에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사지를 비틀어도 버티게 되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좌절도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모든 걸 포기해도 생물의 3대 욕구, 그 중에서도 식욕과 수면욕은 놓을 수가 없었다.


‘배, 고파.’


이젠 소리를 내기도 어려운 몸은 허기를 넘어 아픔이 된 굶주림과 악마의 유혹 같은 수마 사이에서 저울질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마의 기세에 소년은 끝을 직감했다.


‘드... 디어...’


오래 전에 포기했던 삶이 드디어 끝을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그대로 죽음의 꿈에 삼켜지리라.


드디어 끝낼 수 있다는 기대에 소년은 복부의 고통을 억누르며 수마의 세력에 서서히 몸을 맡겼다.


역시나 연약하고 지친 몸은 이미 크게 한쪽으로 추가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기대는 다시 한 번 좌절의 위기를 맞이했다.


파드드득.


나무기둥이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멀어져가던 귓가를 때렸다.


“하윽!?”


동시에 문신으로 뒤덮인 반신을 통해 심각한 아픔이 전해졌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피부를 긁는 듯한 고통은 가까이 다가왔던 죽음의 수마를 물리쳤다.


‘아, 안 돼!’


소년의 바람과 달리 아픔은 더욱 또렷해졌고 죽음은 소년을 떠났다.


그리고 소년을 지키겠다는 듯이 반신을 덮고 있는 날카로운 가시넝쿨 문신들이 변했다.


노예상의 의심은 착각이 아니었다.


소년이 괴로울 때마다.


소년이 죽음과 마주할 때마다.


소년이 포기할 때마다.


가시넝쿨 문신은 더욱 넓고 진한 모양으로 자라나며 소년의 생존을 종용했다.


문신의 존재는 경이적이었다.


몸이 아무리 망가져도 단단한 뿌리쳐럼 지탱해줬다.


정신이 피폐하게 무너지면 단단한 줄기로 옮아매 무너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지친다면 자신의 양분을 나눠줘 삶을 연장시켰다.


마치 숙주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기생충처럼.


가시넝쿨 문신은 소년을 지탱하고 독려했다.


숙주인 소년의 의사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처음엔 이 특별한 능력에 감사했다.


가시넝쿨 문신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진작에 죽었을 테니까.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장소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단 희망을 꺼지지 않게 해줬으니까.


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병들고 무너뜨리는 화약이 되었다.


가능성 없는 희망은 절망이, 다가오지 않는 구원은 원한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살려주는 문신 자체에 대한 원망과 저주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저주한다고 해도 기생충처럼 몸을 차지하는 가시넝쿨 문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그게 너무나도 싫었고 이전에 있던 곳들도 싫어했다.


그러나 아무리 싫어해도 문신은 떨어지지 않았다.


보기 흉하다며 피부를 벗기는 자도 있었다.


안에 든 먹을 뺀다며 바늘로 계속 찌른 자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역효과가 날 뿐이었다.


결국 모두가 포기했고 소년도 포기했다.


이건 저주였다.


절대로 자신을 편하게 죽도록 하지 않는 끔찍한 저주.


*


몇 분 지나지 않아 소년은 이변을 깨달았다.


모든 감각이 무의미해지는 어둠 속에 있던 탓에 무뎌진 감각으로도 느낄 정도의 진동이었다.


쿵...


푸스스...


“으아아아!?”


“무, 무슨 일이야!”


멀리서 아스라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모래가 떨어졌다.


이곳에 갇힌 동안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일에 다른 노예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반면 소년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게 정확했다.


문신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썩은 시체가 되었을 몸이다.


반응하고 싶어도 숨을 쉬는 것도 의식적으로 해야 할 만큼 쇄약한 몸으로는 비명은 고사하고 놀라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무거운 몸에 갇혀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소년은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얼핏 관리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폐성의 지하 5층.


상품가치가 없거나 떨어지는 최하급 노예들이 수용된 장소였다.


때문에 관리가 허술했지만 동시에 가장 아래에서 폐성을 지지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곳까지 진동이 전해진다는 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쾅!


쿠르르르...


콰과과광!


마치 소년의 기대에 부흥하기라도 하듯이 조금 전보다 훨씬 큰 폭음과 진동이 지하감옥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 갇힌 노예들에게 들려오는 폭음과 진동은 서서히 조여오는 죽음의 소리 그 자체였다.


“이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문 열어!”


“죽고 싶지 않아!”


소년과 달리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노예들은 쇠창살에 달라붙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언제나 소란에 달려와 화를 내던 관리자들은 침묵으로 답해왔다.


그리고 관리자들의 무대응은 노예들에게 사형선고로 받아들여졌다.


밖에서 들려오는 폭음과 진동, 희미하게 섞여든 다양한 소음들은 최하층의 노예들이 애원과 분노에 파묻혔다.


“으아아...!”


“만물의 아버지이신 가이언과 어머니이진 폰티스시여...”


“어서 이거 열어어어어!”


“미안해, 크레아...”


비명을 지르는 사람, 신을 찾는 사람, 고함을 지르며 창살에 매달리기도 하며 지키지 못한 약속을 사과하기도 했다.


소년을 괴롭게 하는 건 원인 모를 진동과 폭음이 아닌 벽면을 타고 울리는 저들의 애원과 삶에 대한 집착이었다.


저들이 어떤 소리를 내어도 구원은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모든 것을 소년은 해봤으니까.


미친 듯이 가족들을 불렀고 믿지 않던 신들을 찾았다.


사지를 비틀며 난동도 피우고 악마에게 거래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어떤 응답도 없었다.


그렇게 부질없다는 걸 배운 소년은 저들의 행위가 짜증나고 어리석게 여겨졌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어쨌든 지하 5층에 수용된 노예들이 전부 지칠 정도의 시간은 흘렀다.


어느 샌가 바깥에서 들어오던 소리도 감옥 전체를 흔들던 진동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소동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적막도 긴장감을 한껏 높였다.


이윽고 모두가 긴장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또 다른 패닉에 빠지기 직전.


저벅저벅.


지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층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선형 계단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곳에 닿을 리 없는 빛과 그림자들 대동하며 지하 5층.


폐성의 최심부에 도착했다.


“...”


“...”


“...”


“...꿀꺽.”


당장 사람이 오면 난리를 피울 것처럼 굴던 노예들이 침묵의 재갈을 물고 마른침조차 삼키길 꺼려했다.


하지만 어둠과 침묵의 중심에 선 이는 천천히 지하 5층 감옥에 발을 들였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지 들고 있던 불빛을 여기저기 비추며 기웃거렸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는 기색이었으나 이는 길지 못했다.


교차로 너머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불빛은 조급하게 움직였다.


깜박깜박.


그리고 소년과 땅 모퉁이 한 번 정도 남았을 때 우뚝 멈췄다.


이곳의 구조는 단순하다.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상품가치가 없는 노예들이 갇힌 형식이었다.


즉, 불빛을 든 자가 누군가를 찾으러 온 거라면 조급해지는 게 당연했다.


갈수록 심각한 몰골의 노예들로 가득한 쇠창살 안을 본다면.


이곳에 올 정도라면 정말 안 찾아본 곳이 없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저 모퉁이 앞에 있는 사람은 정말 끔찍한 모습이었다.


관리자들의 말로는 어느 변태귀족의 수집품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 귀족의 취미는 아름다운 것을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것이었고 지금 저 창살 안에는... 엘프가 있었다.


한쪽 귀를 잘리고 염산으로 얼굴의 절반이 뭉개진 몰골의 엘프가.


그 심각한 몰골에 관리자들도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이곳까지 노예를 보러 온 ‘손님’들도 저기서 발길을 돌렸다.


이미 살아도 산 게 아닌 노예들을 봤는데 이보다 더 안이라니.


만약 안쪽에 자신들이 찾는 존재가 있다면 이보다 훨씬 끔찍한 몰골이라는 뜻일 테니까.


그런 모습으로 마주하느니 사람들은 죽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 이상 끔찍한 모습으로 자신들을 기다릴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불행해질 것만 같을 테니까.


그 막연한 두려움은 사람으로서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 당장 알고 있는 것보다는 모르는 걸 두려워하는 게 사람이라는 존재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저벅.


“?”


멀어질 거라고 여겼던 기척이 가까워졌다.


혹시 잘못 느낀 건가 싶었지만 자신의 머리 위를 비추는 빛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어차피 어둠뿐이기에 감고 있던 눈꺼풀 너머로도 강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어쩌면 자신이 싫어하는 빛으로 괴롭히려는 관리자일지도 모른다는데 생각에 짜증이 났다.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한계를 맞이한 가시넝쿨 문신이 살리지 못하게 되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저항할 방법도 의지도 소년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이젠 그냥 어떤 수단이든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설령 그게 공포와 아픔이 가득한 최후라고 할지라도.


하지만 소년에게 찾아온 건 어느 쪽도 아니었다.


“데이란?”


-데이란!-


‘!’


빛을 든진 사내의 저음과 함께 악몽 속에 묻혀있던 기억의 단편이 겹쳐졌다.


상냥하고 조심스러운 지금의 목소리와 달리 비통하고 처절한 외침이었지만 소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내의 입에서 나온 건... 자신의 이름이었으니까.


오래 전 이미 잃어버렸다고, 사라졌다고 여겼던 이름.


설마 모든 것을 포기한 이때.


죽음만을 바라고 있을 때 희망이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안했다.


어차피 일어날리 없는 기적이니까.


그런데 오늘... 그 기적이 일어났다!


어떻게든 기적을 잡기 위해 소년의 의지는 이미 깨질 대로 깨진 마음을 추스르며 대답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몸은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수십, 수백 번의 죽음에서 끌어올려진 육체는 정신과의 합일을 거부했고 이대로 서서히 풍화되길 바랐다.


육체와 정신의 괴리는 결국 육체의 승리가 되었다.


고개를 들기는커녕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기도 어려웠다.


“데이, 맞니?”


-데이야~.-


다시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번엔 훨씬 앳된 소년의 부름이 따라왔다.


혹시라도 불안하게 걷는 자신이 넘어질세라 소중하게 잡은 손길이 더없이 듬직했던 기억이 함께했다.


-데이야, 코오~ 하고 자자.-


뒤이어 떠오른 건 다정하게 등을 두드리는 손길의 감촉이었다.


잠투정에 진정시켜주던 온기가 떠올랐다.


비록 과거의 잔영이고 미약한 추억이지만 그때의 감각을 기억한 몸이 아주 조금 희망을 바라봤다.


“...형?”


간신이 의지를 따라준 성대가 울렸지만 그 진동은 너무나 미약했다.


내뱉는 숨소리와 거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그건 마지막 숨이었다.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져버린 소년의 갈비뼈는 생존을 위한 움직임을 포기했다.


결국 모든 게 부질없었다.


그렇게 여기며 죽음을 따라가려는 찰나.


스르릉~.


무언가 매끄러운 물체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츠아아앙~!


츠아아아앙~!


티디디디디딩!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잘려나간 쇠창살이 바닥을 굴렀다.


창살에 가로막혀 다가올 수 없는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기척은 그림자로 소년을 덮었다.


그리고는 소년을 뒤집어 빠르게 상태를 확인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데이! 정신차려, 데이! 의사! 당장 의사를 불러라!”


모든 것이 몽롱하게 흐려지며 어둠에 막혀가는 세상으로 잠겨드는 소년에게 다급한 형의 외침은 수면 밖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뿌옇게 그려졌다.


5년 전 순백의 밤, 실종되었던 루브리플로아의 작은 공자 데이란의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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