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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라. 님의 서재입니다.

또 하나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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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라.
작품등록일 :
2023.01.18 17:20
최근연재일 :
2023.04.11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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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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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간극

DUMMY

원정을 통해 고구려에 잡혀온 당인들은 옛 황제와 황후를 비롯해 관리 만여 명, 궁인 4천여 명, 당군 10만여 명, 낙양과 장안 등 대도시의 백성 등 28만여 명이었다. 이전의 전투들에서 고구려로 보낸 당군들도 적지 않았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포로들도 있었으므로 엄청난 인원이 고구려로 밀려드는 셈이었다.


역사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끌려간 수십만의 인력과 물자가 당나라의 문화와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처럼, 당의 인력과 물자들도 고구려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 엄청난 물량으로 인해 고구려의 색채가 희석되거나 안일함에 빠질 것을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






시월 초엿새.


2진의 남대에 이어 1진과 3진도 차례로 장안성으로 귀환했다. 도중의 여러 거점에 병력을 주둔시킨 뒤라 돌아온 원정군의 병력은 몇만에 불과했다.


원정군의 귀환에 맞추어 백제와 신라에서 당 정벌에 대한 대규모의 축하 사신단을 보내왔다. 고구려가 만들어 나갈 천하에 대해 찬사와 더불어, 그 천하에 함께 포함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통일된 주체가 없이 여러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던 왜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사절을 보내왔다. 교통이 불편하고 통치력이 미치는 곳은 큐슈 지역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낙후된 왜는 고구려의 천하에 들 자격조차 갖추기 힘든 곳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고구려의 위세를 빌어 지역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것뿐이었다.


고구려는 이제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조율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드디어 연개소문이 원하던 천하가 완성된 것이다.






시월 초아흐레.


오래 전부터 준비되었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


궁성으로도 불리는 내성에서는 태왕 이하 고구려의 모든 대신들과 5부의 대가들, 모달 이상의 장수들과 큰 공을 세운 장병들, 신군대당의 간부와 모든 병사들이 포함된 잔치가 열렸다. 중성과 외성에서, 그리고 온 고구려 전역에서 모든 고구려인이 참여하는 거대한 규모의 축하잔치들도 같은 날에 함께 열렸다.


내성의 연회에서는 제례와 태왕의 축사에 이어 대막리지가 나서 이번 원정의 대강을 설명하고, 천하를 평정하게 된 것은 하늘과 조상의 보살핌이 있었던 덕분이었다는 상투적인 말로 끝을 맺었다. 다음으로, 무예 시범과 춤, 음악이 어우러지며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관과 대모달들 수십여 명이 자리한 커다란 식탁 한가운데에 앉은 대막리지의 모습은 마치 원정 중의 지휘관 회의 때를 방불케 했지만, 그때의 진중함과는 달리 이젠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의 얼큰하게 취한 붉은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바로 옆에는 남생, 남건, 남산의 세 아들들이 역시 거나하게 취한 채 떠들고 있었다. 평소에도 준혁에게는 상당히 껄끄러운 사람들이었지만 원하는 목적을 달성한 연개소문이 자신의 아들들과 준혁 사이의 충돌에서 누구에게 손을 들어줄지가 문제였다. 아마도 앞으로의 행보는 훨씬 더 부담스러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쪽 자리를 차지한 신군대당에서도 서로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원정에 참여하지 못했던 2소대 5분대와 106밀리 5분대는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쉬움을 토로하다 장안성에까지 접근했던 당군을 106밀리와 박격포의 위협 사격으로 어렵지 않게 격퇴시켰던 소소한 전투 경험으로 맞대꾸를 하곤 했다.


준혁은 불편한 자리에서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왔다. 승리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었던 이가 눈에 띄지 않아 찾던 중이었다. 을지도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대막리지와 신군을 연결하던 유사라는 사람이 귀환한지 며칠이 지난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원정에 함께 하지 않았을 때도 잠시 의문을 가지긴 했지만 중대장을 비롯해 원정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엔 크게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준혁은 주위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을지도의 행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잔치가 열리고 있던 을밀대를 나섰지만 장안성 내에서는 사방 어디를 가나 시끌벅적한 분위기였고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은 찾기 힘들었다. 시대를 건너뛴 지 3년이 넘었고 많은 부분이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존재했는데 이러한 번잡함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였다.


한동안의 노력 끝에 준혁은 어렵사리 뜻밖의 이야길 들었다. 작년 원정 출발 즈음의 반란 때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는데, 그중 을지도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으나 쉽게 대답하지 않던 모달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체포된 지 불과 이틀 만에 모든 반란 가담자들이 조용히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너무나 은밀히 진행되었기에 당시에 이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고 함구령이 떨어졌으며, 원정군도 곧바로 출발했기 때문에 더더욱 이 사실은 알려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장안성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사실이라 했다.


충격적인 소식에 준혁은 놀라움을 넘어 끝 모를 막막함에 부닥쳤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거의 마지막으로 안 것에 대한 서운함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을지도는 개인적으로 마음을 터놓고 말을 나눌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고구려인이었고, 앞으로 펼쳐 나갈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을지도에게 고조선과 백제의 근원, 왜의 실체, 신라 박석김씨의 진정한 유래 등에 대해서도 물어볼 작정이었다. 현대에는 사라져버려 궁금증만 자아내던 많은 책과 유적들을 함께 찾아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진정한 천하의 중심이 되어갈 고구려를 위해 오래도록 함께 일해보고 싶었다.


신군이 일으킨 바람은 장안성을 넘고, 천군을 넘어 고구려의 여러 곳으로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개념,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것들이 온 고구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구시대의 사람이었고, 이제 그의 시대는 끝났다. 아직 유사에 불과한 을지도였지만 새로운 물결을 구체화하고 현실에 적용시키는 데는 적격이었다. 준혁에겐 을지도가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은 서로 미약한 힘이지만 언젠가 그 힘을 펼칠 때가 오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모든 바람과 계획은 이제 물거품처럼 하늘로 흩어져 버렸다.


비록 역모에, 그것도 진짜 역모였는지 알 수 없지만, 관련되었다 하더라도 원정에서 돌아올 때까지 살려둘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준혁을 보아서라도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려버렸다.


연개소문은 때때로 절대자의 권위에 불복하는 자는 누구든지 살아남을 수 없다는 단호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을지도를 죽임으로써 절대자 외에는 모두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시켜 주었다. 이제 연개소문은 함께 할 수 있는 동지가 아니라 그저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명의 절대자로 돌아가버렸다.






다음 날, 준혁은 곧바로 연개소문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어디서 그런 무모함에 가까운 용기가 솟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두려웠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태전합에서 다시 만난 연개소문은 한창 일에 몰두해 있었다. 예위 외에도 다른 몇 명의 사람들이 탁자 위에 가득한 지도와 문서들을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준혁이 다가가자 연개소문이 고개를 들었다. 분노와 깊이를 알기 힘든 물음으로 가득한 준혁에 비해 연개소문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마치 준혁의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준혁의 이빨을 꽉 깨문 모습을 보면서도 늘 그렇듯 연개소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내 일이 바빠 이녘과 독대할 시간이 많지 않네. 어인 일로 급히 이곳을 찾았던가?”


분명히 준혁이 을지도를 찾아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연개소문은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준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을지도 유사가 어떻게 된 것인지 여쭙고자 합니다.”


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와 두려움과 체념이 뒤섞여 몸으로부터 올라오는 떨림이었다. 예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안타까운 일이나 유사는 역모에 가담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을 따름이네.”


연개소문의 말은 길지 않았다. 그 간단명료함이 잠시 누그러졌던 준혁의 분노를 일깨웠다.


“을지도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녕 모르시는 것입니까?”


준혁도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 담겨 있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준혁이 길게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을지도가 준혁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던가를 강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에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대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준혁에겐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연개소문에겐 그저 수많은 유사 중의 한 명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내게 반대하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지낼 수 있겠는가? 을지도가 세상에 더없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내게 반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네. 내게 반하지 않았다면 또한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았겠는가?”


연개소문의 판단기준은 명확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준혁에게 어떤 사람이라는 사실로는 연개소문의 판단기준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다시 한번 묻고 싶었으나 예위의 말이 준혁에게 차가운 현실을 인식하게 했다.


“합하께서 말씀하신 것은 역사 이래로 어긋난 적이 없었음을 유사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소. 다시 그 일을 논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절대자의 판단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물음을 다시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준혁은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서 나왔다. 모든 것을 걸고 다시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 결과가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연개소문의 분노만 확인하게 될 것이다.


준혁은 연개소문과 이미 다른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고야 말았다. 아니, 연개소문이 가는 길에 준혁이 잠시 함께 했을 뿐이었다. 공존을 통한 상생과 경쟁으로 동아시아의 발전을 이루어보겠다는 준혁의 작은 바람은 그저 짧고도 아련한 혼자만의 꿈에 불과했다.


연개소문은 처음부터 공존과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온 세상을 발 아래에 둘 천하에 대한 욕망 뿐이었다. 그 기회가 왔고 잘 활용했을 뿐, 그 외의 모든 것들은 간과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아마 다음 단계는 천하의 주인인 황제나 다른 이름의 절대자가 될 것이다. 평소의 온화함과 여유는 결정적인 순간의 단호함과 치밀한 계획을 감추는 표면적 얼굴이었을 뿐이었다.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아침저녁으로 차갑던 대기가 이젠 한낮을 제외하곤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고구려의 백성 모두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한 달 동안의 긴 축하연이 계속 이어졌다. 물론 꼭 필요한 곳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그 몫을 해내고 있을 테지만 공식적인 업무는 대부분 중단되었고, 오로지 축하, 축하, 그리고 축하뿐이었다.


그러나 준혁에겐 승전의 기쁨이나 축하연은 딴 세상의 일들에 불과했다. 서늘한 바람이 준혁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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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132. 마지막 독대 2 +1 23.04.10 347 20 14쪽
131 131. 마지막 독대 +6 23.04.10 321 14 12쪽
» 130. 간극 +1 23.04.07 375 20 12쪽
129 129. 귀환 3 23.04.07 324 15 12쪽
128 128. 귀환 2 +1 23.04.06 335 18 13쪽
127 127. 귀환 1 23.04.06 364 14 13쪽
126 126. 다시 낙양으로 +1 23.04.05 336 12 13쪽
125 125. 서하 +1 23.04.05 323 13 12쪽
124 124. 파촉 23.04.04 345 14 12쪽
123 123. 한중 23.04.04 350 13 11쪽
122 122. 사천정벌 +1 23.04.03 393 16 12쪽
121 121. 태극전 23.04.03 336 15 14쪽
120 120. 다시 장안성으로 +2 23.03.31 413 17 12쪽
119 119. 달빛 전투 23.03.31 335 15 12쪽
118 118. 반격 +1 23.03.30 362 15 12쪽
117 117. 추격 23.03.30 356 13 12쪽
116 116. 금원 +1 23.03.29 398 17 12쪽
115 115. 황성 +1 23.03.29 349 13 14쪽
114 114. 장안의 밤 23.03.28 420 19 14쪽
113 113. 장안성 공략 +1 23.03.28 403 19 12쪽
112 112. 장안성 앞 2 +2 23.03.27 372 21 12쪽
111 111. 장안성 앞 1 23.03.27 354 16 12쪽
110 110. 장안으로 2 23.03.24 435 15 13쪽
109 109. 장안으로 1 +2 23.03.24 415 15 13쪽
108 108. 진입 +1 23.03.23 433 19 13쪽
107 107. 심문 23.03.23 439 19 13쪽
106 106. 낙양성 전투 4 +3 23.03.22 441 18 14쪽
105 105. 낙양성 전투 3 23.03.22 397 16 14쪽
104 104. 낙양성 전투 2 23.03.22 427 1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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