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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라. 님의 서재입니다.

또 하나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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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라.
작품등록일 :
2023.01.1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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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1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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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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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황성

DUMMY

이른 아침에 준비를 모두 마친 원정군은 당군 포로 관리를 위해 보병 8천과 기병 2천을 남겨두고 나머지 3만여 병력과 기병 1만여 기를 동원해 성을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훑으며 점거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본대 1만 남짓을 비롯한 대막리지와 중대는 방 안에 그대로 머물렀다. 대신 어제 쌓은 장대 위에 올라가 원정군의 진군을 지켜보았다.


원정군은 점거에 앞서 장안성의 모든 군사와 백성들에게 집 밖으로 나와 대기할 것을 명령했다. 중환자를 제외하고 집 안에서 발각되는 사람은 즉결 처분될 것이라며 외치는 소리가 성안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중군은 폭 150미터의 드넓은 주작대로 양쪽으로 몇 개씩의 방들을 수색하며 천천히 진군해나갔다. 선봉은 장안성의 서쪽 정문인 금광문(金光門) 쪽으로 행군했고 후위는 동문인 춘명문(春明門) 쪽으로 행군하면서 주변의 방들을 서서히 장악해 나갔다. 나머지의 문은 철저히 봉쇄해 안과 밖의 소통을 차단했다.


현무문을 비롯한 북쪽에 있는 문들까지 장악하면 성을 완전히 포위할 수 있었으나 장안성의 북쪽은 성 전체와 비슷한 넓이의 거대한 금원(禁苑)에다 한나라 시대의 장안성 유적까지 있는 지역이었다. 무척 넓기도 했지만 언덕과 숲이 많아 당군의 매복이 염려되었으므로 원정군은 남쪽으로부터의 점거와 수색에만 집중했다.


거대한 하나의 도시인 장안성 안의 수많은 방들을 일일이 다 검색하고 장악하려면 며칠로는 턱도 없이 모자랄 시간이었다. 남쪽과 동서 세 방향 모두 일반적인 행군으로 황궁까지 도달하는 데만도 한 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당군의 매복과 도시 게릴라전에 대비해 미리 척후를 보내고 앞쪽의 방을 먼저 장악한 다음에 초병을 세우고 본대가 전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으므로 진군에는 몇 배의 시간이 걸렸다. 성의 동남쪽에 있으며 경치가 아름다워 유원지로 알려진 곡강지나 우뚝 솟은 대안탑으로 인해 멀리서도 보이는 자은사 근처에는 아예 가보지도 못했다.


대신, 자은사(慈恩寺)에 머물고 있으며 최순 영감에게 불사를 보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던 현장법사((玄奘,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주작대로 앞에까지 나와 수천 명의 승려들과 함께 원정군을 지켜보았다.


아직 장안성은 전성기를 맞이하기 수십 년 전이었지만 낙양보다 다양한 인종들의 사람들이 득실댔고, 108개의 방으로 구획을 정해 획일화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화려한 건물들로 가득 찬 모습에서 문화적 풍요로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작전이었지만 원정군의 각 부대들이 황성의 남문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정오가 지난 뒤였다. 지나오는 동안 장안성 내에서 군사나 백성들의 소요는 전혀 없었고 그저 말없이 지켜만 볼 뿐이었다. 낙양성처럼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떠난 뒤였지만 아직도 10여 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장안성 내에 머물고 있었고, 낙양성에서와 같이 전투를 치르거나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원정군이 함부로 다루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한 듯했다.


원정군은 외성에 비해 훨씬 높고 견고해 보이는 황성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황성의 성벽은 높이 10미터, 윗부분이 8~10미터 정도의 두께였다. 성벽 위에는 외성보다 훨씬 넓은 마도가 있었다.


현대에 관광객이 보는 서안 고성은 이 황성과 궁성 유적의 일부에 불과했다. 명나라에 이르면 외성은 이미 그 흔적이 사라진 다음이고 황성과 궁성도 일부분만 남은 뒤였기 때문이다.


황성까지 이르렀는데도 아직 당군의 별다른 준동은 없었다. 최순 학사의 말대로라면 도중에 한번쯤 도발을 해오거나 적어도 상당 규모의 군사들이 눈에 띄어야 했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 외에 군사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각 방의 문 앞이나 황성 남문을 지켜야 할 수비군까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원정군이 병사들을 사로잡아 문초하는 것을 염려했던 것일까? 백성들 몇몇을 심문해보았다. 군사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더러 보였으나 오늘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황성 성벽 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성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다시 한번 무반동총이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더 쉬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날쌘 고구려 병사 여럿이 갈고리 밧줄을 던져 올려 성벽을 타고 넘어갔다. 활짝 열린 황성의 정문인 주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거기서도 인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붕을 맞대고 서 있는 무수히 많은 관청 건물들만이 반길 뿐이었다.


병사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불만의 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약탈 금지령으로 승자의 한풀이 같은 건 꿈도 못 꿀 상황이었는데, 그저 무릎 꿇릴 만한 당군마저도 없는 것이다. 한 나라의 수도라는 곳에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왔는데, 당에 불만을 가진 듯한 소수의 사람들만 반겨줄 뿐이고 애꿎은 백성들 외에는 꽁꽁 틀어박혀 숨었는지 도망을 갔는지 보이지도 않더니, 황성에 들어서서도 인기척은 없고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당조의 수만에 달하는 관리며 황궁을 방위할 군사들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졌다. 그토록 전투마다 패하고도 또다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즈음에서 성안에 매복이 있다는 학사 최순의 말에 의문이 갔다. 오랜 옛적 가문의 일부터 시작해서 구구절절 그럴듯한 사연을 늘어놓았던 것이 시간끌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당군이 작전을 바꿨다면 외성이 아니라 황성 혹은 궁성, 그것도 아니면 금원에서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외성에서는 반격이 적당하지 않았거나 시기를 놓쳐 뒤로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최순 학사도 매복에 가장 적지는 금원이 첫 번째이고 그다음은 황성이나 궁성일 것이라고 했다. 금원은 숲이 울창하여 단병접전을 벌이기 유리하며 패했을 경우 숨거나 산으로 도주하기에도 적당하므로 가장 적지라고 했다.


유목민족들이 세운 왕조에서는 금원의 역할이 중요했다. 궁궐의 북쪽에 위치한 넓은 숲과 개활지는 병사들이 머물기에 적당했고 사냥이나 훈련장으로 쓰였으며 필요시 몸을 숨기기에도 좋았다. 거병할 때도 금원에서 군사들을 출정시키곤 했다. 황궁의 북쪽 출입을 담당하는 현무문은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핵심 요처로 기능했고, 이곳을 지키는 부대는 핵심 정예병들이었다.


관청 건물이 대부분이며 민가가 없고 매복해 시가전을 벌이기 가장 좋은 황성 지역이 그다음 매복지로 꼽혔다. 지금껏 반나절 동안 신중히 점거해온 터라 다소 맥이 빠지긴 했으나 이제 다시 반나절만 투자하면 드넓은 장안성을 단 하루 만에 점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래 황성의 서편인 순의문 인근에는 황성을 지키고 치안을 담당하는 우금오위가 있고 동편인 경풍문에는 좌금오위가 있었는데 선봉과 후위가 도달했을 때는 이들 위진도 모두 비어 있었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황성 앞에 원정군 수만 명만이 모여 있었다.


대막리지는 황성에서 반드시 적의 매복이 있을 것이니 특히 주의하라 이르고는 군대를 물려 황성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한 후 밖으로부터 성문을 폐쇄하고 신군 3당에 사격을 지시했다.


대막리지가 있는 원정군 본대와 성안으로 들어간 진입군 사이의 통신은 무전기를 갖고 들어간 소자마라 통신 부사수가 담당했다. 방해전파라고는 전혀 없는 고대의 하늘 아래에서 통신은 원활했다.


3소대의 포 3문이 멀리 있는 황성을 겨냥했다.


그러나 황성에 대한 포격이 거론될 때부터 반대해왔던 참군 예위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대막리지를 만류했다.


“황성에 매복해 있을 당군이 염려되기는 하나, 당조를 비롯하여 그 전 고대의 수많은 전적들이 황성에 있을 터인데 모두 사라진다면 중원을 다스리는데 도움되지 못할까 염려되나이다. 없애는 것은 쉬우나 보존키는 어려운 것이 과거의 전적일 것이니, 안위가 중요키는 하나 다른 방도가 있을지 찾아보시고 숙고하소서.”


평소의 예위 답지 않게 다소 강경한 어조의 간언이 있자 준혁도 용기를 내 한마디 거들었다.


“예전 먼 서역의 이집트에서 수세에 몰린 로마 장군(카이사르를 말한다)이 불을 질러 서역 제일이라 자랑했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전부 불타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와 문물을 보관했던 도서관에는 서적만 20만권에 두루마리가 10만개나 있었다고도 하고 혹은 70만권의 책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한 번의 결정으로 인해 그 오랜 고대의 사료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진시황의 분서도 마찬가지로 진나라를 제외한 육국의 문물을 불태워 비난을 받았습니다. 후세에 혹여 허물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바입니다.”


예위와 준혁 외에도 몇몇 장수가 포격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수들은 가장 손쉬운 방법인 포격에 찬성했고, 대막리지도 처음부터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어 보였다.


인류의 공동 문화유산을 보존한다는 개념은 근래에 생긴 것일 뿐이었다. 과거의 역사에서 적국의 문물을 파괴하는 것은 필수였다고 할 만큼 흔했고, 패전국의 문화는 거의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668년 9월, 당군의 장수 이적은 고구려를 점령한 후 ‘변방의 이적이 이렇게 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으니 그냥 두면 반드시 다시 일어나 후환이 될 것이다. 모두 불태워 없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한 뒤, 모든 서적들을 모아 불태우고 건물과 성벽을 모두 무너뜨려 장안성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략했던 프랑스 장교 앙리 쥬베르(Henri Zuber)도 종군기에서,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조선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기록했다.


건축물의 파괴에 대해 로버트 베번은 ‘집단 기억의 파괴‘에서 말했다.


‘친숙한 사물을 모두 잃는다는 것, 한 개인을 둘러싼 환경이 남김없이 파괴된다는 것은, 그 사물들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으로부터 추방당해 방향감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이는 역사 이래 한 나라가, 한 문명이, 한 부족이 경쟁 상대를 파괴해왔던 이유였다.


문명의 아이콘은 멀리 있지 않고 늘 가까이 보고 겪는 건축물이나 예술품, 언어와 노래 같은 것들에 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 대상들이 파괴되고 사라짐으로써 사람들은 쉽게 체념하고 정체성을 잃어가며 결국 상대방에게 동화되어 사라져간다. 그 대상은 어떤 스토리가 될 수도 있고 건축물이 될 수도 있고 민족이나 문명과 같은 큰 범위의 것일 수도 있다.


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단순히 이웃한 나라 간의 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라 주장하는 당나라와 하늘의 자손이며 역시 세상의 중심임을 자처하는 고구려 간의 피할 수 없는 문명대전이었다.


중국이 주변에 있던 수많은 상대국들 중 유독 고조선, 고구려, 백제 등에 대해 그토록 폄하하고 왜곡해 기록했던 것은 그들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문명권이었고 그들이 감추고 싶은 과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인류문명의 발달에서 가장 큰 방해가 되었던 것은 파괴와 말살로 인한 문화적 다양성과 지속성의 단절이었고, 예위는 물론 준혁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크게 잘못된 방향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통치자의 입장은 달랐다. 여러 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막리지는 완강했고 장수와 병사들에게 포격의 필요성을 강변했으며 그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원정군에 협조하던 당나라 사람들이 주위에 다수 있었고, 장안성의 백성들 일부도 있어 그런지 모르나 대막리지는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비록 이 성의 백성들이 고려의 국인(國人, 백성)은 아니나 그 폐해를 우려하여 천군에게 약탈조차 금지시켰거늘 당조는 무릎 꿇어 잘못을 고하지 아니하고 숨은 채 다시금 우리를 해하려 하고 있다. 화족들이 기회가 될 때마다 그들 외의 다른 제족들에 대해 문물의 씨를 말리려 해온 것은 모두 아는 일일 터.

지금 당장 온 성안을 도륙하고 무너뜨릴 수 있으나 살아있는 것을 모두 없애고 높은 것을 쓰러뜨리고 메워 평지를 만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니, 무릇 산 것은 계속 살아있게 하고 지금 있는 것은 후대에도 계속 있게 하여 그 쓸모를 다하도록 하는 것이 천리요 다스리는 자의 법도일 것이다.

나는 당조를 폐하려 할 뿐 이전의 흉족들(중원을 유린했던 민족들을 말한다)처럼 중원을 모두 황야와 초지로 만들려 함이 아니니 제장과 천군들은 나의 뜻을 따르기 바랄 뿐이다.

지금 당왕은 잔당을 데리고 어딘가에 숨었거나 이미 성을 떠나 험한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니, 황성과 궁성의 전각들은 그들이 버린 쓸모없는 집에 불과하며 이를 부순다 하여 백성들에 해가 되지도 않을 터. 오히려 혹여 모를 잔당의 도발을 막고 우리 병사의 수고를 더는 것일 뿐이다.

고래의 서적과 문물 중 귀한 것은 궁성에 두었거나 이미 이곳에 없을 진대, 황성이 무너지더라도 문물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나를 창칼만 휘두를 줄 아는 자로 여기지는 말기 바라노라. 지금은 우리 군사의 목숨 하나가 더 소중할 뿐이므로, 제장들은 각 부대를 통솔하여 뒤를 경계하고 섣불리 나서지 말며 뛰쳐나오는 잔당만을 참하도록 단속하라.”


군사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대막리지의 말에 열렬히 호응하며 우레와 같은 함성을 올렸다. 사기를 올리는 것은 때로 말 몇 마디면 충분했다.


원정군 일부가 황성을 둘러싼 성벽 몇 곳과 장대 위에 올라 자리를 잡고 나머지는 여러 개의 성문을 비롯한 황성 성벽 바깥에서 진을 갖추었다. 준비가 다 되자 북소리와 군기를 신호로 하여 사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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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131. 마지막 독대 +6 23.04.10 321 14 12쪽
130 130. 간극 +1 23.04.07 374 20 12쪽
129 129. 귀환 3 23.04.07 324 15 12쪽
128 128. 귀환 2 +1 23.04.06 335 18 13쪽
127 127. 귀환 1 23.04.06 364 14 13쪽
126 126. 다시 낙양으로 +1 23.04.05 336 12 13쪽
125 125. 서하 +1 23.04.05 323 13 12쪽
124 124. 파촉 23.04.04 345 14 12쪽
123 123. 한중 23.04.04 350 13 11쪽
122 122. 사천정벌 +1 23.04.03 393 16 12쪽
121 121. 태극전 23.04.03 336 15 14쪽
120 120. 다시 장안성으로 +2 23.03.31 413 17 12쪽
119 119. 달빛 전투 23.03.31 335 15 12쪽
118 118. 반격 +1 23.03.30 362 15 12쪽
117 117. 추격 23.03.30 356 13 12쪽
116 116. 금원 +1 23.03.29 398 17 12쪽
» 115. 황성 +1 23.03.29 349 13 14쪽
114 114. 장안의 밤 23.03.28 420 19 14쪽
113 113. 장안성 공략 +1 23.03.28 403 19 12쪽
112 112. 장안성 앞 2 +2 23.03.27 372 21 12쪽
111 111. 장안성 앞 1 23.03.27 354 16 12쪽
110 110. 장안으로 2 23.03.24 435 15 13쪽
109 109. 장안으로 1 +2 23.03.24 415 15 13쪽
108 108. 진입 +1 23.03.23 433 19 13쪽
107 107. 심문 23.03.23 439 19 13쪽
106 106. 낙양성 전투 4 +3 23.03.22 441 18 14쪽
105 105. 낙양성 전투 3 23.03.22 397 16 14쪽
104 104. 낙양성 전투 2 23.03.22 427 1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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