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정태 아버지라구? 그 박소령이?
다음날 서울역.
"조상사님! 흑흑"
"이중사님! 흑흑"
정태와 기현, 이 두 녀석은 헤어짐이 못내 아쉽다는 듯.... 아니 그런 척 연기했다.
"언능 내려가 이것들아. 한창 훈련중일 때 고참들이 빠지면 밑에 애들이 뭘 보고 배우냐!"
이렇게 말하며 두 녀석을 바라보는 철혁이는 정말 군입대를 앞둔 친동생을 대하는 형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 두 놈이 서울역에 도착해 제일 먼저 들른 곳이 로또판매소라는 걸 안다.
역사에 들어오자마자 두리번거리던 정태 녀석은 자기도 기현이 꿈에 나온 번호로 사야겠다며 로또판매소로 향했다.
그런 정태를 보던 기현이 녀석도 뭔 생각이 든 건지 당첨금을 정태랑 똑같이 나눌 수 없다면서 로또판매소로 향했다.
하.... 이것들이..
하늘같은 선배랑 오랜만에 만나 헤어지는 마당에 이런 식으로 나와?
꽝이라구 이것들아!!
니들 지금 휴지조각 사러 가는 거라구~
난 이 덜 떨어진 녀석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제일 따뜻한 인사를 내뱉었다.
"한 번만 더 꿈에 나왔네 어쩌네 하면서 올라오믄 너네 둘 다 디진다."
녀석들은 내 말을 듣고도 희멀거니 술이 덜 깬 눈으로 헤헤거리며 말했다.
"조만간 또 찾아 뵙겠슴당! 로또 당첨금타러 올라와야 하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당! 필승!"
하... 이 머저리들...
아무튼 내게 일확천금의 기회가 있었음을 놓치기 전에 깨닫게 해 준 고마운 두 녀석이 다시 창원으로 떠났다.
철혁이와 난 이동수를 만나러 합정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철혁이가 물었다.
"야. 근데 지금 생각해도 진짜 신기하다."
"응? 뭐가?"
"니가 기현이 꿈에 나타나서 줬다는 로또 번호가 어제 니가 사다 준 로또 번호랑 같다는 게 말야. 그리고 그 꿈 꿨다고 휴가까지 내 가지고는 우릴 찾아온 이 녀석들도 말야."
"후후후."
"정말 난 이게 꿈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넌 안 신기하냐?"
철혁이는 아무래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거 데자뷰 비슷한 거라니깐. 내가 로또 사다줬을 때 정태가 딱 그게 걸린 거야. 그리고 기현이한테 전염된거고."
난 마치 데자뷰가 전염병이라도 되는 듯 얼토당토 않은 개소릴 해댔지만 철혁이는 그런 내 말에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그런가... 하긴 꿈에 니가 말한 번호가 정작 사러 갔을 땐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래 니 말이 맞겠다. 데자분가 뭔가 하는 그거."
"그래. 그리고 그 놈들 다 꽝이라는 데 내가 270억 건다."
"헐.. 에? 근데 왜 하필 270억이냐?"
"그냥 나온 말이야 임마. 흐흐흐."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는 있지만 나 역시 내심은 이 녀석들과 비슷했다. 다른 이유로.
하필 전생에 전역 후 딱 한 번, 그것도 내 인생 통틀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로또를 샀던 일이 이 녀석들과 관련되어 있었던 거니까.
또 하필 이 녀석들이 올라와 로또 얘길 하는 바람에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이고.
뭔가 운명적인 게 느껴진달까..
전생대로라면 270억인데 번호도 같으니 당첨금도 같겠지? 흐흐흐흐.
난 얼마 전 환생을 시켜도 뭐 이렇게 시키냐며 하늘에 대고 불평을 늘어놨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때였다.
- 쉬유우욱. 처컥.
"회개하라!!"
헉!
"주의 심판이 곧 있으리니! 주 여호와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으십시요.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옆 칸에서 넘어온 한 노인이 손에 뭘 들고는 저렇게 외치며 내 앞을 지나갔다.
난 짧지만 내 죄를 회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
죄송함돠..
멍충이같은 놈이 이런 큰 그림을 모르고 불평 불만이나 쏟아 놓고..
정말 제가 머리가 어떻게 되었었나 봅니다.
저 환생시켜 주신 거 정말 감솨함다. 진짜예요.
그리고 주신 돈은 아니지 주실 돈은 제가 정말 잘 관리해 보겠슴다.
... 어...
어떻게 좀 화가 풀리셨을지..
진심어린 회개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회개를 받아주신 건지 다시 내 몸속에 아드레날린이 넘쳐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 콸콸콸콸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그러고 있는 날 뭔가 미친놈 보듯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사주경계와 더불어 팀원을 커버해 주는 게 자연스러웠던 철혁이도 그걸 눈치챘는지 앞의 여잘 힐끔 보더니 고갤 돌려 날 쳐다봤다.
"너.. 뭐하냐?"
"야 철혁아. 너도 회개해라."
"엥?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마. 저 분 지나가시면서 하는 말 못 들었냐? 회개해야 너와. 내 집이. 구원. 받는다잖아. 니가 회개해야 내가 집이 생기는 거야 임마."
...
"구뤠? 뭐 까짓거 해주지 뭐. 니가 집이 생긴다는데.. 어따가 해줄까. 강남? 잠실? 미친새끼."
철혁이는 낄낄거리더니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야 근데 너 기억나냐?"
"뭐?"
"박소령 말야."
"응? 웬 박소령?"
"아 왜 우리 사고 나고 나 수술받고 있을 때 너 찾아왔다는 그 박소령말야."
"아~ 흐흐 기억나지. 차무진 소장도 기억나고. 아우 그때 멋있었지. 나 그때 처음 봤잖아. 그 차장군을 말야. 히야 근데 그거 선배들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더라구. 병실에 들어서는데 아우라가 그냥~"
"아 됐고. 그 얘긴 너한테 열 번도 더 들은 거 같다. 차장군 얘기 할라는 게 아니고 박소령 말야."
"어. 그 인간 왜?"
"정태 아버지다. 크크크큭."
"에~엥?"
진급이 막혀서 그렇다쳐도 소령치고는 나이가 많아보였는데 박중사 아버지였다구? 이런..
그 박소령이 정태 그놈, 박중사의 아버지라는 말에 황당한 얼굴을 하는 날 보더니 철혁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어제 알았다. 큭큭큭. 어제 택시타고 들어와서. 넌 동수형님 만나러 가고 우리 셋이 있었을 때 말야."
철혁이가 말해준 내용은 이러했다.
당시 차장군은 작전수행 중 당한 사고로 인해 누워있던 날 문안하겠다 했고.
정보장교 출신으로 차장군을 수행하고 있던 박소령은 민간에 그 일이 새어나가기 전 내부에서의 수습이 먼저였기에 방문한 김에 사고가 발생한 경위를 듣고자 했는데 차장군이 그를 만류했다.
그렇게 병실을 나가는데 아무리 특임대 베테랑이라고는 하나 중사 나부랭이가 자길 쳐다보더니 썩소를 날리더란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괘씸했던 박소령은 당시 특임대에서 하사로 근무하던 아들 정태에게 물어봤단다.
내가 이러이러 해서 조완이란 중사놈을 봤는데 어떤 놈이냐고.
정태는 내가 특임대에서 수행했던 작전들과 훈련 중 활약상에 대해 박소령에게 얘기했고 내가 전역하기 전 박소령은 나처럼 되고 싶다는 정태에게 그랬다고.
- 조완이 전역신청했다 임마. 부대장이 그렇게 잡았다는데 못하겠다고 그만두겠다고 했대. 맨날 볼 테니까 너도 이미 알고 있지? 본받을 놈을 골라도 하필 전역하겠다는 놈을.. 쯧쯧
내가 전역한다는 사실을 정태는 아버지로부터 듣기 전엔 몰랐었다고 한다.
당연하지. 승인 떨어질 때 까진 부대장 외엔 누구에게도 말 안 했으니까. 부대장도 괜히 팀 사기 떨어진다고 당부하기도 했고. 아마 한동안은 몰랐을 터였다.
그래서 그랬나..
전역하기 한 달 전 정태 녀석이 나한테 와서 쌩뚱맞은 소릴 해댔던 게 기억난다.
- 조상사님, 이런 말씀 조상사님께 드리면 안되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중사님 돌아가신 거 그거 조상사님 잘못 아니란 거 아시잖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난 그때 이 녀석에게 그랬다.
- 어디 낮술을 쳐 마시고 와서 개소리냐? 니가 뒤지고 싶어 환장했구나. 잠수복입고 5분안에 튀어와!
그날 정태는 바다도 아닌 육지에서 잠수복을 입고 미친 듯이 굴러야 했다.
사실 낮술은 내가 마셨는데.
아버지한테 내 얘길 들어 알고 있었군 녀석..
평소 까불거리며 오바라고 생각드는 리액션도 마다 않는 녀석이었기에 그런 내막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난 지금 옆에 있는 이 녀석이 전역한 이유가 결국은 나로 인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주변 그 누구의 마음도 헤아려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하튼 그 후에도 박소령은 철혁이와 연락한 정태를 통해 두어 번 내 얘길 전해 들었다고..
헐.. 박소령이.. 내가 사는 얘기를..?
나는 박소령이 정태 녀석 아버지였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퍼뜩 고개를 쳐드는 어떤 생각때문에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고대표와 박소령이 서로 알고 있는 관계라면?!
난 아무리 이 회사가 사람 뒤를 잘 캐내는 곳이라 해도 애시당초 나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거 자체가 늘 의문이었다.
날 어떻게 알고 뒷조사를 한 것이며 사진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연락했다고는 하지만 전혀 일면식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철혁이의 아이디를 통해 접근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날 처음 만난 날 고광철이 날 대하던 태도나 눈빛, 얼굴 표정은 이미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자라야만 취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 외에도 의문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특임대 시절 사진이란 것 과는 전혀 관련 없이 살았던 철혁이가 전역 후 얼마 되지 않아 카메라를 들고 다니게 된 이유까지.
뭐 물론.. 레이싱 모델을 쫓아다니는 이 녀석을 보고 있자면 진심인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허나.
고광철이 박소령과 아는 사이였다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적어도 요 며칠 간 내게 일어난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개연성 있는 설명이 가능했다.
흠··· 장각진보다도 고광철에 대해 먼저 알아봐야겠군.
어제 뒷 좌석에 윤정혜랑 같이 타고 있던 인물이 과연 예상대로 고광철 이었는지도 확인할 겸 말이지.
만약 박소령이 관계되어 있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것임은 분명했다.
지금까지의 정보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정황은 대충 이렇다.
박소령은 그 어떤 이유로 더 이상 진급이 어려운 상태에 직면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군에 오랜 동안 몸 담아 온 박소령이 고광철을 알고 있다면 그건 학연이거나 고광철이 박소령의 후배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해군 장교로서의 후배인 경우를 포함해서.
고광철은 평소 박소령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걸 알고 박소령에게 접근했겠지.
전역하면 한 자릴 약조했는지도 모른다.
박소령이 나와 철혁이의 정보를 고광철에게 넘길 때 이런 일을 하는 조직이라는 걸 알았을까?
애매하군..
하지만 박소령은 정태를 생각해서도 깊이 관여되어 있어선 안됐다.
에휴.. 박중사 아니 정태 이놈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하나...
이런 저런 생각으로 골몰해 있을 때 진동이 울렸다.
- 위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이동수다.
“예 형님.”
- 어 완아 후배들은 잘 보냈어? 지금 어디?
“네 한.. 10분쯤 후에 도착할 거 같은데요. 어디서 볼까요?”
···
이동수는 어제 피곤했을 텐데도 벌써 합정에 와 연습실 근처 카페에 앉아 있다고 연락이 왔다.
오늘은 꼭 애들이 점심먹으러 나오는 걸 봐야겠다고.
그리고 윤정혜가 돌아온 건지 아닌지 확인해봐야겠다며.
어휴.. 녀석 피곤할텐데..
철혁이가 전화를 끊는 날 보더니 물었다.
"동수형님? 합정이래?"
"응."
"오~ 드디어 오늘 윤정혜를 실물로 볼 수 있으려나~~ 유후!"
난 잔뜩 기대하고 있는 철혁일 보며 그냥 웃었다.
오늘 윤정혜를 보긴 힘들 것이다.
잔뜩 기대하며 들떠있는 이 녀석도 실망하겠지.
그러나.
철혁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면 그저 실망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 같다.
우린 합정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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