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점점 불리해져 가고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설리와 조금씩 검술이 능숙해지는 비제.
서로가 싸움을 빨리 끝내기 위해 무리하게 검을 휘둘렀고 검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군요.
그렇게 치열했던 싸움은 비제의 검이 날아가면서 설리의 승리로 끝이 나고 말았답니다.
비제는 눈앞에 서있는 설리를 바라보며 포기한 표정으로 서있네요.
'죽이는 건 무리였나. 역시 나는 이브처럼 싸울 수 없구나. 재능의 차이가 느껴지네. 무기는 날아갔고 상대는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다. 빌쓰를 사용할 시간도 없어. 승부는 끝났다.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줍기 전에 상대가 나를 베어버리겠지.'
비제는 떨리는 손을 쥐며 눈을 감았답니다.
'뭐, 무기를 잡을 수 있어도 싸우는 건 무리겠지만. 이제 몸도 한계고 공격을 막느라 손도 아프고. 정말 무식한 힘이네. 받아넘기지 않고 힘으로 맞서 싸웠다면 바로 패배했을 거야. 이것이 파이트의 힘인가.'
죽음이 가까워지자 비제의 예전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군요.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인 비제는 설리의 마무리 공격을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네요.
왼쪽 팔이 잘리자 비제는 비명을 지르며 주머니에 있는 빌쓰를 꺼냈답니다.
"꺄아아악!"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쓸데없는 발버둥을!"
간발의 차이로 빌쓰를 먹은 비제는 눈앞에 다가오는 설리의 검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나에게 힘을 줘! 부탁이야. 기적이 필요해.'
하지만 비제의 바람과는 다르게 힘은 생기지 않았고 결국 비제는 검에 목이 베여 죽고 말았답니다.
그렇게 비제가 죽자 설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는군요.
'강적이었지만 나렌님을 지키는 나를 이길 수는 없어. 그래, 나는 나렌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 이런 곳에서 죽을 리가 없잖아.'
그럼 이제 란스의 상황을 보도록 하죠.
곤히 자고 있는 나렌을 업고 거리를 달리던 란스는 작은 건물을 보더니 문을 두드렸답니다.
"미코 선생님! 안에 계세요? 저예요! 란스에요! 문 좀 열어주세요!"
란스가 소리치자 뒤늦게 문이 열리더니 아치기의 보건 선생님인 미코가 하품을 하며 말을 거는군요.
"한밤중에 무슨 일이야?"
"정체 모를 적들이 쿠쿠로를 공격하고 있어요.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나렌을 보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적이 왔다고?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깜짝 놀란 미코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답니다.
평소와 똑같은 풍경이군요.
"갑작스러운 공격이라 대비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안심하세요. 이곳은 성문이랑 반대 방향에 있으니까 쿠쿠로가 함락당하지 않는 이상 적들이 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네 말이 사실이라면 빨리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도망갈 곳이 있나요?"
"다른 도시로 도망가면 되지 않아? 라가라가 있잖아."
"쿠쿠로로 오기 위해서는 라가라를 지나갈 필요가 있어요. 제 예상이지만 라가라는 아마 함락당했을 거예요."
"거짓말! 그런 일이 가능해?"
"가능할지도 모르죠. 지금 우리는 적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요.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요. 적들은 우리가 물리칠 테니 미코 선생님은 나렌을 보호해주세요."
"으응, 그래."
"잘 부탁드립니다."
란스의 기세에 눌린 미코가 고개를 끄덕이자 란스는 조심스럽게 나렌을 건네줬답니다.
그렇게 란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가버리자 미코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란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군요.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전에 만났을 때보다 믿음직스러워진 것 같은데.'
미코가 멍하니 서있자 방문이 열리더니 나래가 잠옷 차림으로 나왔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이야기 소리가 들리던데."
"으응, 그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사양하지 마세요, 선생님. 저는 일자리를 주신 선생님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요."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던 나래는 미코에게 기대서 자고 있는 나렌을 보더니 깜짝 놀라 소리치는군요.
"나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선생님, 이게 무슨 일이죠?"
"나도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일어나고 있어."
"네?"
"정체 모를 적들이 쿠쿠로를 공격하고 있는 것 같아."
나래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미코를 쳐다봤답니다.
"적이 안 보이는데요?"
"여기는 성문이랑 반대 방향에 있으니까 말이야."
"..."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 줘."
미코가 난처한 표정으로 서있자 나래는 차분하게 말하는군요.
"저는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자리도 주시고 잘 곳도 마련해 주셨으니까요. 저는 진심으로 선생님을 존경하고 신뢰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이렇게 감사 받는 건 오랜만이네. 소미에게 감사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소미...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미코가 죽은 소미를 생각하고 있자 나래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납치는 아니죠?"
"아니야!"
미코가 소리치자 다른 건물에 있던 파이트가 소리를 지르는군요.
"조용히 해라! 잠 좀 자자!"
"죄, 죄송합니다!"
한편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궁전으로 돌아온 란스는 바닥에 널부러진 시체들을 바라보더니 시감에게 말을 걸었답니다.
"아버지,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란스? 왜 돌아왔냐? 나렌이랑 같이 도망가라고 말했잖아."
"나렌은 안전한 곳에 맡기고 왔어요. 그리고 왕자인 제가 파이트들을 버리고 도망갈 리가 없잖아요. 그런 파이트는 황제가 될 자격이 없어요."
"흥, 말은 잘 하는구나."
"그것보다 적이 벌써 궁전 안까지 쳐들어 온 건가요?"
"걱정하지 마라. 궁전 안에 있는 적은 전부 처리했다."
"그건 다행이네요. 기습공격만 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적은 도대체 누구죠? 다른 나라의 움직임은 언제나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가 적의 시체를 잠깐 조사해봤다만... 뭔가 이상하더구나. 다른 종족하고는 뭔가 느낌이 달랐어."
시감과 란스가 대화를 나누고 있자 병사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상황을 보고하는군요.
"시감님. 적들이 도망가고 있습니다."
"뭣이? 이렇게 쉽게 물러간다고?"
"그리고 희소식이 있습니다. 인전터로 갔던 요카님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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