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패전국의 영애] # 0. 프롤로그
후기와 질의응답은 서재의 공지란에 올라갔습니다.
이북으로 출간됩니다.
소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아름다운 드레스의 밑단이 흙먼지로 인해 더럽혀졌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녀의 행동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노인이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노인을 손수 부축하는 소녀의 눈에는 연민과 분노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소녀의 뒤에는 하인으로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다. 주인이 무릎을 꿇고 손수 노인을 부축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한발자국 물러서서 주인의 행동을 방관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일이 빈번했었는지, 아이는 놀라지도 않았다.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서 있는 아이의 붉은 눈동자에 ‘귀찮음’이 묻어났다.
“얼른 돌아가시지 않으면 영주님께 들킵니다.”
들키면 매를 맞는 것은 아이였다. 주인을 똑바로 모시지 않았다는 이유로, 등에는 채찍 자국이 남을 터였다. 그나마 나이가 어리고 아버지가 집사인 덕분에 흉이 남을 정도로 세게 맞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사정을 저 아가씨는 모르고 있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저 아가씨는 워낙에 여려서, 하인들을 때리기라도 하면 자기가 맞은 것처럼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렇게 하면 하인들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재촉에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려던 소녀가 동전을 꺼내 노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소녀의 행동에 아이의 표정은 이제 짜증으로 번져 갔다. 아이의 이러한 감정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소녀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인이 애써 돈을 거부했지만 소녀는 기어코 동전을 쥐어주었다. 노인이 돈을 쥐자, 우울하던 소녀의 표정이 그나마 밝아졌다.
“치료사를 찾아갈 정도의 돈은 될 거야. 아까 그 녀석을 대신해서 내가 사과할게.”
“아가씨.”
아이가 단호하게 소녀를 불렀다.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소녀가 울컥했는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노려보았다.
“귀족은 평민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대가로 잘 살 수 있는 거야! 나 역시 귀족으로써 평민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그게 대체 언제 적 사고방식이랍니까?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애써 억누른 아이가 티 안 나게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침묵을 수긍이라고 생각했는지, 소녀가 다시 웃으며 노인을 돌아보았다. 소녀의 모습에 감동이라도 받은 건지, 노인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기가 차다는 듯 응시하던 아이가 습관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집사인 아버지는 물론이고, 주인까지 소녀의 부재를 눈치 챘으리라. 허공을 가르는 채찍의 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울렸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 있지? 난 정말 귀족이 싫어.”
내가 조금만 더 작위가 높았어도, 말려줄 수 있었을 텐데, 정말 미안해. 조그맣게 덧붙이는 소녀의 모습은 천사 그 자체였다. 하긴, 아까 노인을 때린 녀석들은 백작가의 자제들이었다. 겨우 지방 남작가의 영애인 소녀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무능력이 한탄스러운지 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소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이가 슬쩍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는 아가씨도 귀족이십니다만.”
끝내 비아냥거리고 만 아이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소녀는 아이의 주인이었다. 알려지지도 않은 지방 남작가라고는 해도 귀족이었고, 애지중지 키우는 외동딸이었다. 이런 식의 말대답은, 집사인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경스러운 짓’ 이었다. 소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아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소녀의 적갈색 눈동자에 우울한 빛이 스쳤다.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던 소녀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는 너무 딱딱해. 조금은 감정을 드러내도 되잖아? 그렇게 딱딱한 태도는 싫어. 동갑이잖아. 친구라고.”
그러면 당신이 ‘집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보던가. 방금 전의 사과도 잊고 또 다시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를 뻔 한 아이가 혀를 깨물며 말을 참았다. 하루 이틀 보는 모습도 아니건만, 소녀의 저 순진한 행동과 말은 아이를 무섭게 만들었다. 친구라, 참 속편한 소리였다. 평민과 귀족이라는 것만으로 이미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걸까?
아이가 보는 소녀는 말 그대로 온실 속 공주님이었다. 언제나 동화책만 봐와서 현실도 동화인 줄 알고, 언제나 예쁘게 핀 정원의 꽃만 봐서 현실도 예쁜 꽃밭인 줄 아는 순진한 공주님. 그 순진함이 얼마나 오만하고 잔인한 것인지 절대 알 리 없는 공주님.
입을 꾹 다물고 하인의 모습을 유지하는 아이를 안타깝다는 눈으로 보던 소녀가 두 손으로 주먹을 꾹 쥐며 말을 이었다.
“너도, 나도 결국 다 같은 사람인데, 신분을 나눈다는 것은 웃기잖아! 일은 평민이 다하는데 귀족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도 웃기잖아! 불공평해! 귀족들에게는 평민을 무시할 권리 같은 건 없어!”
“그거 아십니까, 아가씨?”
아이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한 두 번이면 모를까, 시도 때도 없이 귀족이 싫다고 징징대는 저 목소리는 배알이 뒤틀려서 못 들어줄 지경이었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이는 아이의 입에서 지독히도 시니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가씨 같은 귀족이 저는 제일 싫습니다.”
결국 베푸는 건 알량한 동정심과 동전 몇 푼 밖에 안 되면서, 마치 세상의 부조리를 다 떠안은 사람마냥 정의를 운운하는 귀족 따위 제일 싫었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속이 울렁거리도록 만들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정의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말이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아이를 응시했다. 지금의 언행을 아버지에게 들킨다면, 채찍질도 모자라 삼 일간 식사도 끊길 테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주변에는 아버지가 없었고, 이런 ‘불경스러운 짓’을 일러바칠 사람도 없었다. 저 멍청한 아가씨야 하인이 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니, 이런 언행을 이를 일도 없겠지.
“어째서?”
소녀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이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목구멍에서부터 신물이 치밀었다.
“아가씨는 결국 ‘귀족’이니까요.”
아이는 소녀를 외면했다. 그래, 뭐라고 지껄이던 결국 소녀가 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평민을 좋아하는 것과 평민인 것은 엄연히 달랐다. 적어도 저 입만 살아있는 아가씨가 방금 전의 노인처럼 길목에서 거치적거렸다고 다짜고짜 두들겨 맞을 일은 없는 것이다. 아이의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소녀가 잠시 동안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나 이내 분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내가 원해서 귀족이 된 게 아니야! 귀족 따위! 겉치레나 신경 쓰고 허영심만 가득한 그런 귀족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태어날 곳을 정할 수는 없었다. 소녀가 귀족이 된 것은 소녀의 탓이 아니었다. 소녀의 외침에 아이가 입매를 비틀었다. 원해서 귀족이 된 게 아니겠지. 아이 또한, 원해서 평민이 된 게 아니듯. 소녀가 불만을 가지고 있듯, 아이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불만을 가진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평민이 되고 싶다고 하시는 겁니까?”
냉담한 아이의 물음에 소녀가 이를 악 물었다.
“차라리 평민이 나아! 빵 한 덩이를 나눠먹는 그런 따뜻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싶었다고! 내가 귀족이라는 걸 기뻐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반쯤은 어린아이가 가지는 치기라는 걸 눈치 챘지만, 아이는 가만히 서서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녀의 머릿속에 박힌 평민의 이미지라는 게, 상당히 이상적이고 허황된 것이라는 걸 아이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였다. 결국 이래나 저래나 소녀는 이상적이고 환상적이고 뭐든 아름다운 세상의 ‘귀족’ 이었다. 아마 평생가도 모를 테지. 삼, 사일 굶는 것 정도는 예삿일인. 목욕도 마음대로 할 여유가 없는 그런 생활을. 아이의 표정이 심술궂게 변했다.
“그렇다면, 기회가 오면 얼마든지 평민이 될 의향이 있으시다는 거군요?”
“뭐?”
예상치 못한 아이의 반문에, 소녀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소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이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감히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주인을 바라보다니, 하인으로서 실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례 역시, 소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어째서인지 조금, 힘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그건 아닙니까? 하기야. 어느 귀족이 자처해서 평민이 되겠습니까. 그 많은 특권들을 버리고 말이죠.”
은연중에 깔린 조롱을 느꼈는지, 소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소녀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입술을 깨물고 주저하는 소녀를 외면하고 서 있던 아이가 슬쩍 소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흔들리는 소녀의 적갈색 눈동자를 확인한 아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씀해 보세요. 바꿀 자신이 있으십니까?”
마치 계약을 권유하는 악마의 미소같이, 아이는 매혹적으로 웃었다. 위험하게 반짝이는 아이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주저하던 소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끄덕임을 확인하는 순간, 잠시나마 생기가 돌던 아이의 표정은 다시 사무적으로 돌아왔다.
“지금 그 대답, 기억해드리죠.”
지금 서둘러 가도 채찍질은 면할 수 없다. 아까처럼 재촉하는 대신, 아이가 소녀가 앞서가도록 비켜섰다. 소녀는 어쩐지 꺼림칙하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곧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소녀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걸었다. 그런 소녀를 묵묵히 뒤따르며 생각에 잠겨있던 아이가 문득 말을 내뱉었다.
“아마 노인은 치료사에게 갈 수 없을 겁니다.”
“……뭐?”
무슨 뜻이냐는 소녀의 시선에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설명을 해줄 생각이 없다는 아이의 뜻을 알았는지, 소녀가 조금 미간을 좁히며 걸음을 옮겼다.
“갔을 거야. 돈도 주었잖아.”
그래, 평민들은 만져보지도 못할 금화를 쥐어주었다. 일 년 동안 일을 해서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겨우 금화를 구경할 수 있는 게 평민들의 사정이었다. 방금 받아간 금화라면 치료를 받고도 꽤 오랜 시간을 놀 수 있겠지. 아이의 얼굴에 언뜻 비웃음이 스쳤다.
지금쯤이면 노인은 죽었을 것이다. 분명 지나가던 평민들이, 그의 손에 들린 금화를 뺏기 위해 노인을 죽였을 것이다. 평민들의 세상이란 그러하니까. 그렇게 큰돈을 덜컥 쥐어주는 행동은, 무책임한 선택이었다. 소녀는 순수한 호의로 건넸을 테지만, 그 호의가 노인을 지켜주는 건 아니지 않던가.
“아가씨! 어딜 다녀오십니까?”
멀리서 검은 집사 복을 입은 자가 뛰어왔다. 걱정스럽게 소녀를 보던 남자는 뒤에 서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남자의 표정변화를 확인한 아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오늘 저녁은 굶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작가의말
완결란에 잠자고 있을 왕의 조언자를 끝낸지 어언 2년!
드디어 새로운 소설을 들고 왔습니다만, 저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군요. 흑흑.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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