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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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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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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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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04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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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회색시대-4.따뜻한.(1)

DUMMY

“아버지, 산책 하시겠어요?”


목공소가 모처럼 휴일인 어느 날, 인휘에게 물어봤다. 산책 한번 모셔야 하는데, 하는데 생각만 하다가 목공소가 쉬는 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한 번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도 가끔 동네 산책정도는 했지만, 현실이 힘들고 무거워 자주 챙기지는 못했다. 집 안에만 있어 다리가 앙상하다. 지금도 현실은 무겁다. 하지만,


-아저씨를 조금씩 모시고 나와. 주변 눈을 속일 수 있게.

-아버지를?

-응, 아저씨도…….


혜인이 했던 말. 그날 그렇게 거리에서 만났을 때 혜인은 낮게 몇 마디를 속삭이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졌다.


-지금 있는 곳을 알려주기는 조금 위험해. 기다려, 내가 찾아 갈 테니까. 아저씨도, 그때…….


색을 찾아야 하고, 혜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거리를 헤매다 기적처럼 만났었는데. 만남은 순간이고, 색은 더 볼 수 없었지만 희망을 남기고 갔다. 혹은 기다림이라는 것을. 그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다.


“그래, 진아, 어디 나가고 싶니?”

“그냥……. 어디든지요.”


마침 아버지도 정신을 조금 차리고 계신 터라 모시고 나가기도 두렵지 않았다. 진은 낡은 겨울 망토를 아버지께 입히고, 자신도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아버지의 뭉뚝한 팔목은 망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동네 산책을 가끔씩 나간 것은 이런 현실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칙칙한 골목에 겨울 햇살이 들어온다. 다닥다닥 붙은 낡은 건물 사이로 난 좁다란 골목에 조금씩 흩뿌려진 겨울 햇살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진다. 인휘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진은 천천히 걸었다. 따사롭다. 날씨는 추워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골목을 한참 내려가다 인휘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고, 진 역시 아버지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살폈다.


인휘의 시선은 바닥에 꽂혀있었다. 돌 담과 바닥 사이에 핀 작은 꽃 한 송이. 하얀 꽃 한 송이가 고개를 꺾고 있었다.


“진아, 겨울이지?”

“예, 아버지.”

“겨울인데도 아직 지지 않은 꽃이 있구나.”


인휘는 미소지었고, 진도 살그머니 웃었다. 아버지는 늘 그랬다. 미치지 않았을 때도, 미쳤을 때도, 늘 이 분의 시선은 무언가를 발견 해냈다. 인휘는 한동안 꽃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장하다, 장하다, 장하구나 장하다. 진도 그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그래요, 한겨울에 살아 남은 꽃이 장해요, 아버지, 꽃에 장하다고 말하신게 아니라 제게 장하다고 말하고 계시다고 믿고 싶어요. 살아남고, 버티고, 기다리고, 소망해서, 희망을 남겼으니까,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러니 혜인아, 꽃에 서리가 내리기 전에 와다오,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둘은 걸어걸어 골목 끝까지 나왔다. 아이들은 뛰어 놀고, 할 수 있는 일 없는 노인은 귀퉁이에 의자 하나 내놓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본다. 진에게는 그들이 담고 있는 색이 보였다. 저이를 데리고 가구를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것이 어울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날이올까. 혜인을 만난다고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 것만, 이전 같은 답답함이 아니라, 다른 어떤 기대가 샘솟는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인휘에게는 제법 먼 거리였나보다, 이 짧은 골목이. 아버지가 숨차하는 모습에 진은 그를 데리고 길 한편의 낮은 담벼락에 그를 앉혔다.


“아버지, 조금 쉬다 가지요. 힘드시면 집으로 돌아가고요.”

“그래…….”


인휘의 눈이 골목의 풍경을 담고 있다. 진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전에는 산책을 나와도, 혹여 아버지가 발작하실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했는데, 오늘은 이런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색을 보았기 때문일까, 혜인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또한 두렵기도 하다. 무엇도 아닌 자신조차도 하나를 보면 그것을 화폭에 담고 싶어하는데, 지금 아버지는 또 얼마나 바라고 계실지. 그러니 혜인아, 내게 길을 알려다오.


“진?”


진은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저 멀리 카르가 보였다. 카르는 밖에 나온 인휘에 놀랐는지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었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제복 윗도리를 벗어 팔에 걸쳤다. 진은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문득 카르 옆에 누군가 하나 더 있는 것이 눈에 띠였다.


“뭐하나?”

“경정님, 죄송하지만 윗옷 잠시 벗으셔야겠습니다.”

“뭐?”


카르는 옆에 있는 일스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인휘 일리스비가 제 정신이 아닌 상태라 검은 제복만 봐도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예?”

“내 알 바 아니지. 내 일인가? 용의자 상태까지 배려해줘야 하나?”


일스가 다시 인휘와 진을 향해 걸어가자 카르는 다시 그를 잡았다.


“경정님.”

“왜?”

“지금 심문하러 가는 길인데, 인휘가 발작하면 물을 것도 못 묻습니다. 용의자 상태의 배려가 아니라, 우리 심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카르의 말에 경정은 짜증스레 하, 하고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넘겼다.


“추워.”

“예?”

“난 춥다고. 내가 춥지 않고, 인휘가 발작하지 않을 방법은 뭔가?”


일스의 말에 카르는 굳은 듯이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인휘 옆에 서 있는 동안 경정님이 진을 따로 불러 물어볼 것 물어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경정은 어쭈, 하는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곧 피식 웃고 말았다.


“네가 인휘 옆에 있으면 발작 안 한다 이건가?”


카르는 멈칫했다. 과연 그럴까. 모든 근원인 어린 배신자를, 인휘는 알아보지 못할까? 진 없이 인휘와 단 둘이 있었던 적이 있었나? 없었다. 그저, 검은 제복만이 그의 마음을 흔든다는 것을 알 뿐이었다.


“아마도……”


카르의 자신없는 대답에 일스는 다시 비웃었다.


“아니면, 저 두 사람 집으로 돌려보내고, 거기서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 원래 그렇게 하려고도……”

“됐어. 가서 진을 불러와라.”

일스는 카르의 말을 자르고 턱짓으로 진을 가리켰다. 카르가 다가오는 모습에 진은 한 발짝 아버지 앞에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


“진…….”


기분 좋은 산책을 잡쳤다고 생각했다. 카르만 봐도 그런데, 거기에 저 경정이라니. 멀리 있어도 금세 알아보았다, 저 얼굴.


“무슨 일이십니까?”


진이 얼굴을 굳히고, 카르도 어색한 듯,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경정님이 좀 물어볼 것이 있다고 부르신다.”

“이쪽으로 오시면 안 되는 겁니까? 보시다시피, 아버지께서……”

“경정님께서 윗도리 벗으실 생각이 없다고 해서……. 내가 아저씨 곁에 있을게, 너 가서 짧게 대답만하면 된다. 별거 없을거야…….”

“네가…아니 경위님께서 아버지 옆에요?”


급히 말을 바꾸는 진을 향해 카르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저 멀리 경정이라는 사람이 차가운 얼굴을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이고, 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지금은 도와줄 사람이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진은 낮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께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십시오.”


진은 인휘의 망토를 다시 추스려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 누가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요, 잠시, 여기 계세요. 친구가……. 곁에 있을 거에요.”


인휘는 그새 세상을 눈에 담느라 바빴는지 답이 없었다. 그러하기에 진은 한층 더 불안해졌다. 혹여 또 무슨 상처가 도지지 않을지, 카르가 곁에서 혹시나 이상한 소리라도 하지 않을지.


“진 일리스비.”


경정이란 자가 부르는 소리에 진은 번뜩 정신이 들어 총총히 달려갔다. 그리 달려가며 한 번 뒤돌아 아버지를 보았다. 카르는, 진이 그랬던 것처럼 몸으로 시선을 가렸다. 아들을 보지 못하게, 아들이 보지 못하게, 혹은 검은 제복을 보지 못하게.


진이 일스에게 다가가고 몸을 돌릴 때까지도 인휘는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테니까. 카르는 조심스레 인휘의 옆에 앉아, 저 멀리 진과 일스가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그림을 놓친 후에 함정에도 안 걸린다. 모든 조직도 침묵하고 있어. 마지막 그림이 인휘 일리스비, 분명 우연은 아니야. 진이란 녀석에게 가봐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아니, 같이 간다.


하여, 일스와 같이 온 것이다. 진은 두려워서 아무것도 안 했고, 안 해왔고, 안 할텐데, 인휘의 아들이란 낙인에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진은 왜 오늘 같은 날 산책을 나왔담, 그냥 늘 그렇듯이 집에 있을 것이지. 하기사, 내가 간다고 또 무어가 크게 달라질까. 검은 옷에 몸 담은 똑같은 놈들인데.


“카르야……”

“예, 아저씨…….예?”


생각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생각없이 예, 하고 답했다가 카르는 지금 누가 불렀는지 깨닫고 깜짝 놀라 인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휘 아저씨가 자신을 보며 살며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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