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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인데 글 안 쓰면 죽음

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윤준모
작품등록일 :
2024.01.16 17:54
최근연재일 :
2024.02.03 10:11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15,521
추천수 :
463
글자수 :
113,605

작성
24.01.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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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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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화. 이거 거절해야 돼

DUMMY

공모전 접수 마감이 한 달 하고 보름 전이다.

그사이 대본을 써봐야 얼마나 써놨을까.

그래서 넷플러스 콘텐츠팀 직원들은 집필 진도에 큰 기대를 두지 않았다.

3회차가 완성 단계면 다행이지 않을까?

그런데 이게 웬걸?

예상과 달리 대본이 나왔다.

그것도 무려 5회차까지.

심지어 크랭크인 전에 8회까지 다 집필하겠단다.


“혹시, 공모전 접수 전에 미리 써놓으신 겁니까?”

“아뇨. 3회차부터는 공모전 이후에 쓴 거죠.”

“집필 속도가 빠르시네요.”

“무림 작가님의 장점 중 하나죠.”

“진짜 크랭크인 전에 집필이 마무리된다면, 저희로서는 대환영입니다.”


쪽대본.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만연한 문화.

괜히 초반에 빌드업 잘해놓고 중반에 잘 터트렸다가 마지막에 힘 빠지는 드라마가 넘쳐나는 게 아니다.

대상 수상작인 ‘전염’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지금의 흐름은 넷플러스 입장에서는 매우 바람직했다.

김성민 콘텐츠 팀장은 생각했다.


‘이거, 진짜 대박 냄새가 솔솔 나는데?’


제작비 더 올려달라고 시위하길 잘한 것 같다고.


* * *


한나은, 28세.

무명 배우.

그녀는 새해에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이제 진짜 배우 그만둬야겠다!’


꼬일 대로 꼬인 배우로서의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자고,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말자고.

마음을 내려놓은 직후.


“어서오세요! 어? 박강호 매니저님!”

“간만이네요, 한나은 배우님. ‘묵비권’ 크래크업 기념 회식 이후로 몇 달 만이죠?”


박강호가 대뜸 그녀를 찾아왔다.


“한나은 배우님께 긴히 드릴 제안이 있어 찾아뵀는데, 실례지만 언제 퇴근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죠? 저 5시는 돼야 퇴근해요!”

“아, 괜찮습니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대충 10분 정도?”


마실 것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한 뒤, 구석에서 노트북을 꺼내. 중간중간 통화.

한나은은 박강호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뭐지? 나한테 무슨 제안을 하려는 거지? 나 이제, 배우 그만두려고 했는데, 이러면 설레잖아!’


자꾸 박강호에게로 힐끔힐끔 시선이 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퇴근해. 마음이 꽃밭에 가 있는데 일이 제대로 되겠어?”

“에이~ 무슨 소리세요, 사장님. 근무 시간 채워야죠!”

“나은이 넌 정신 팔려 있으면 사고 쳐서 안 돼.”

“저 제정신인데요!?”

“방금 컵 하나 깨놓고 그런 말 해도 설득력 없는 거 알지?”

“사장님, 팩트 폭력은 나쁜 거예요!”


결국 한나은은 평소보다 일찍 근무를 끝마쳤다.

실제로 박강호가 찾아온 것에 정신이 팔려서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니까.


‘음, 그래. 은퇴는 잠시 미뤄두자.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잖아? 대신 이상한 이야기 하면 면전에 대놓고 욕할 거야!’


한나은.

그녀의 은퇴가 잠시 미뤄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박강호는 업무를 보는 내내 중간중간 그녀를 훔쳐보았다.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있어. 연기력도 꽤 괜찮았으니, 가이드라인만 잘 잡아준다면 이거 100% 통할 거야.’


몇 달 전.

‘묵비권’의 촬영 현장에서 봤던 그녀의 이미지가 그때와 동일함을,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업무를 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나은이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카페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를 벗은 채 박강호의 앞에 앉았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여기 디저트랑 음료가 맛있어서 음미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네요.”

“아, 그거 우리 가게 시그니처예요! 제가 사장님 졸라서 만든 거고요.”

“어쩐지 맛있더라.”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 속.

박강호가 기습적으로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저희 GH액터스는 한나은 배우님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싶습니다. 계약 기간은 3년, 계약금은······.”


업계 평균을 웃도는 전속계약 조건.

데뷔 초를 제외하면 필모그래피가 없다시피 한 한나은에게 있어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 이 조건을 저한테 제시한다고요?”

“아. 물론 조건이 하나 붙긴 합니다.”


일순간.

한나은의 낯빛에 그늘이 졌다.

그마저도 잠시뿐, 이내 그녀는 특유의 밝음을 드러내며 박강호에게 말했다.


“스폰 같은 거만 아니면 돼요!”

“약 보름 후에, 이 작품의 비공개 오디션을 봐주시면 됩니다. 연기하실 역은 수정입니다.”

“으응? 오디션이요?”

“네. 작가님은 한 배우님을 원하지만, 넷플러스 쪽에서 최소한의 확인은 하고 가자고 해서요. 여기, 한나은 배우님이 오디션을 보실 작품입니다.


한나은이 반신반의하며 대본을 건네받았다.

얼마 후.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박강호를 바라보았다.


“제가 비공개 오디션 배역이 수정 맞아요?”

“네. 수정 역입니다.”

“이 배역······ 주연 아니에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여주인공 역이죠.”

“이 작품은 넷플러스 드라마 공모전 대상 수상작이고요!?”

“제대로 알고 계시네요.”


이 순간.

한나은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거 혹시, 신종 사기 아냐?’


필모그래피가 없다시피 한 20대 후반의 여배우에게 대뜸 넷플러스 드라마 공모전 대상 수상작의 여주인공 비공개 오디션을 보자고 하다니?

심지어 작가의 마음에는 들었단다.

캐스팅이 반쯤 확정된, 사실상 확인 절차만이 남은 상황이라고 보는 게 맞다.

한나은이 아닌 다른 배우였다고 하더라도 사기를 의심해 볼 법할 만큼, 지금의 상황은 현실성이 없었다.

그녀의 반응과 달리 박강호는 더없이 진지했다.


‘한나은 배우님은 수정 역을 훌륭하게 연기할 거야. 애초에 현장에서 연기하는 걸 보고 이미지를 반영해서 수정 캐릭터를 만든 거니까.’


‘묵비권’의 촬영 당시, 박강호는 현장에서 한나은의 사연에 대해 김시국 감독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연기에 대한 재능이 넘쳐나는 배우가, 소속사의 만행으로 인해 필모그래피가 단단히 꼬여서 수년 동안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음이.


‘덕분에 우린 우린 재능 있는 배우를 아무 경쟁 없이 GH로 데려올 수 있게 됐지만, 마냥 좋아하긴 힘드네.’


물론 동정심으로 수정 캐릭터를 만들고 무명에 가까운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겠다고 한 건 아니다.

박강호는 그녀가 배우로서 성공할 재목임을 확신했다.

‘묵비권’의 현장에서 봤던 그녀의 연기에 매료됐다. 그날 이후로 늘, 박강호는 자신의 두 번째 담당 배우가 그녀이기를 소망했다.

‘전염’의 여주인공은 한나은이 펼쳐 나갈 배우 인생 2막의 시작점이 되어주리라.


“왜 절 원하시는 거예요?”


수많은 의문을 함축한 질문.

어떤 말을 해야 설득하기 쉬울까?

고민하던 박강호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매니저로의 전향을 결정할 당시, 박영우 대표로부터 들었던 조언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때로는 진심이 수많은 설명보다 나을 때도 있어.’


확실히 지금은 감언이설보다는 진심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박강호는 한나은의 시선을 마주하며 진심을 담아 무덤덤하게 답했다.


“한나은 배우님이 제 두 번째 담당 배우가 되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전, 한나은 배우님이 좋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남들보다 빛이 날 기회를 조금 늦게 찾아올 뿐이죠.”


대답 직후.

한나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뚝. 뚝. 뚝.

테이블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일순간 카페에 있던 혈기 넘치는 남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박강호에게로 집중됐다.

육두문자가 섞인, 속삭이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선명하게 잘 들렸다.

어······.

이건 좀 억울한데.

오해야, 얘들아. 내가 안 울렸어.

박강호는 손님들의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한나은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한나은이 뒤늦게 감정을 추슬렀다.


‘쪽, 쪽팔려! 다 쳐다보고 있잖아!’


시선이 집중된 것을 느끼고서 귓불까지 붉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즈음.

박강호가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좀 진정됐어요?”

“죄, 죄송합니다!”

“이해해요. 배우 생활, 쉽지 않았을 테니까.”

“배우하면서 누가 절 원한다고 한 게 처음이라서, 저도 모르게 울컥했던 거 같아요.”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전 제 배우들 자존감 채워주는 게취미라, 저랑 함께 하면 앞으로 지겹도록 듣게 될 거거든요.”

“진짜로 지겨워질지 궁금하네요!”


속 시원할 정도로 울어서일까?

한나은이 환한 미소를 지은 채 펜을 잡았다. 계약서의 내용을 다시 한번 꼼꼼히 검토하며 박강호에게 물었다.


“이 계약서에 사인하면, 절 톱스타로 만들어주는 건가요!?”

“한나은 배우님. 그런 말 하는 사람 있으면 명함 들고 3대 연예기획사 찾아가서 물어보고 신고하세요. 100% 사기꾼이니까.”

“오~ 완전 믿음직스러워!”


이쯤 되니 한나은은 인정하기로 했다.

배우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고, 현실적인 이유들로 인해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속상하고 아팠지만 애써 숨긴 거라고, 기적같이 자신에게 찾아온 이 기회가 너무 기뻐서 숨이 막힐 것만 같다고.

계약서에 사인을 한 직후.

쾅!

한나은이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매니저님! 저 비공개 오디션 잘 준비할게요! 만장일치로 합격점 받는 걸로 반드시 보답할게요! 아자아자, 파이팅!”

“네. 보름 동안 같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 보도록 하죠. 저도 최대한 도울게요.”


‘전염’의 여주인공, 전속계약 완료.


‘주연 라인업 완성됐으니, 이제 제작사 미팅만 깔끔하게 마무리하면 되겠네.’


1월의 초.

‘전염’의 프리 프로덕션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 * *


OTT의 시대가 도래하며 많은 제작사가 생겨났다.능력 있는 PD나 감독들은 방송사의 대우에 만족하지 못한 채 독립을 하는 케이스가 비일비재했다.

제작사 드림메이커.

과거 세 차례 최고 시청률 20% 이상을 기록한 드라마를 합작했던 송준석 PD와 윤지명 카메라 감독이 설립한 제작사 또한 그렇게 만들어졌다.

설립 후 5년.

나름대로 업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너튜브를 비롯해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제작을 맡으면서 다방면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2024년 새해.

드림메이커는 새로운 목표를 품었다.


“올해는 반드시 OTT 독점작 하나 잘 만들어서 대박 터트린다! 이왕이면 넷플러스로!”

“넷플러스 좋지. 잘 만들면 말이야. 망하면 바로 한강 수온 체크하러 가야 해서 문제지.”

“하하하! 윤 감독은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우리 실력에 실패할 리가 없잖아!”


코로나를 기점으로 OTT의 영향력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 뒤, OTT에서 대박을 터트린 제작사들의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다.

자연스레 드림메이커의 시선도 OTT로 향했다.

때마침 신년부터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이걸, 진짜 우리랑 하고 싶다고?”

“네. 송 PD님과 윤 감독님이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조건으로요. 작가님이 원하시는 부분이고, 넷플러스와도 이야기 끝났습니다.”


넷플러스 드라마 공모전 대상 수상작 ‘전염’을 제작할 기회가 말이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매니저이자 무림 작가의 대리인으로서 미팅에 참여한 박강호가 대화를 나누며 송준석 PD는 들뜬 마음을 쉽사리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이건 기회야! 이로써 드림메이커도 1티어 제작사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제대로 제작만 하면 떡상은 확정이다.

송준석 PD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요구 조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회사의 명문이 달렸는데 못 들어줄 게 뭐 있을까.

반면, 윤지명 감독은 달랐다.


“조건은 그것뿐이야?”

“캐스팅라인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 물론 추천은 언제건 환영입니다.”


박강호가 내건 조건에 윤지명 카메라 감독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작가 정보는 대외비인데 캐스팅라인에는 관여하지 마라? 주연 경험 없는 서준혁이 서브주연에, 이름 처음 들어보는 여배우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겠다고 말해놓고서? 이거, 까닥 잘못하다가 망하는 거 아냐?’


넷플러스? 좋다.

근데 그것도 작품이 망하면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 박강호만 한 말만 들으면, ‘전염’은 전형적으로 망조가 드는 작품의 흐름이었다.

그렇기에 윤지명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우리 둘이서 대화 좀 나눠도 될까?”

“얼마든지요.”

“실례 좀 할게.”


윤지명 카메라 감독이 송준석 PD를 데리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송 프로, 이거 거절해야 돼.”


작가의말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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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화. 이미지가 너무 다른데? +2 24.01.27 801 18 13쪽
10 10화. 그림 괜찮은데? +2 24.01.26 846 25 13쪽
» 9화. 이거 거절해야 돼 +4 24.01.25 872 2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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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화. 제가 뒤끝이 좀 긴 편이라 +3 24.01.23 963 30 14쪽
6 6화. 왜 여기에 있어? +3 24.01.22 984 29 13쪽
5 5화. 그러다 턱 빠지겠어요. +4 24.01.21 1,023 28 13쪽
4 4화. 이게 왜 진짜야? +4 24.01.20 1,048 3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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