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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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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피
작품등록일 :
2020.08.05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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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4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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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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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DUMMY

사정을 끝낸 수컷 거미의 머리를 암컷 거미가 씹어 먹는다. 그렇게 수컷 거미는 한순간의 욕망으로 목숨을 잃었다. 암컷 거미의 덩치는 수컷 거미보다 수배는 컸다.


나는 거미집을 손으로 긁어냈다. 암컷 거미는 구석의 퇴각줄을 이용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마 안전한 장소를 찾겠지. 그 후 알을 낳고 그 알들이 부화하면 자신의 어미를 잡아먹는다. 본래가 거미라는 것들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거미줄을 만졌던 손을 몇 번 털어낸 후, 그 암컷 거미를 밟아버렸다. 찐득한 체액이 가죽 구두에 묻어나온다. 내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준 셈이다. 블랑이 그 모습을 불쾌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으나 나는 그 시선을 흘려보냈다. 손은 거미줄로 인해 끈적였다.


“이제는 청소 할 인원도 안 남은 모양이지?”


전장에서의 시간은 현실보다 빠르게 흘러갔었다. 레몬색 머리가 실명된 왼쪽 눈을 가린다. 그 덕에 슬슬 이발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라바티안 치고는 뾰족하며 카벨리족 치고는 짧은 귀너머로 머리를 쓸어 넘긴다. 무게 탓에 얇은 머리털 몇 개가 삐져나왔고 나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그 머리카락을 제자리로 옮겼다.


“너무 섭하게 생각하지는 마쇼 누님. 벤디후크는 여전히 델림의 땅이니...”


최근의 수면 부족 탓에 평소보다도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오랜만의 쉬는 날이었다. 집에서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이번 일로 인해 그럴 수도 없었다.


그동안 내 야망이 적은 덕분에-정확히는 정치와 권력에 무관심했던 탓에-우린 나름 괜찮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시아의 잦은 출정 실패와 정책의 실패로 시민 절반이 죽기 전까진 그러했다.


이번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시민들의 공포와 불신이 증폭되었고, 여기저기서 반란의 불씨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해결책으로 영주와 의원들은 차라리 전장 경험이라도 많은 내가 벤디후크 변경의 자치권 전체를 가져가는 것을 바랐다, 그동안은 그녀의 지시에 내가 일방적으로 따를 뿐이었다면, 이제는 스스로 행정과 전투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영토 분쟁지역의 통치권과 절반 이상의 병력 인계는 사실상 나라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이로써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목을 베고 키예트 공화국의 지도자가 될 권한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의원들도 그걸 원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혼돈을 원한다. 혼란을 틈타 식탁 밑 부스러기들을 주워 먹는 게 그들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작 이야기의 중심인 시아는 내게 시선 하나를 주지 않고 자리에 앉아있다. 깃털 끝에 묻은 잉크가 종이 위에서 빠르게 춤을 춘다. 나는 책상 옆 벽장으로 다가가 입이 둥근 유리잔 하나를 꺼내고, 블랑은 와인을 꺼내든다.


“불러놓고 한마디도 안 하기야? 하긴 나 같아도 그렇게 실패만 해대니 할 말이 없긴 하겠다만.”


나만의 대화법을 시도한 거였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까 싶었지만, 우리에게 그런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동정한다며 반감만 살 것이다.


“패배자를 비웃으러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시아는 일부러 거리를 두며 말했다.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벤디후크가 내게 넘어오면서 사실상 델림 가문의 땅은 하나이자 두 나라로 나뉘게 되었다. 여전히 페시로아스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기는 하지만 연합의 주축인 키예트 공화국은 분열한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개의치 않았으나, 그녀는 그러지 못한 듯 보인다.


평상시에도 비효율적이고 외적인 것에만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답다. 왕이면 왕이지, 총통이란 이름을 새로 쓰는 이유도 모르겠고, 군주선거제면서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도 우습기만 하다. 그녀처럼 나도 바보 같은 단어들을 외워야 한다니 앞으로가 걱정이다.


우린 성장 속도가 느린 카벨리족이다. 귀와 머리 색을 제외하면 라바티안 청년에 가까울지 모른다. 나이는 마흔하나, 마흔여섯이었으나, 나나 누님에게서 그 나이에 맞는 격식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대화를 하기 위해선 이 유치하고 재미없는 놀이에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말투를 흉내 낸다고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품격이 직위를 못 따라갑니다. 여왕님.”

“여왕이 아니라 총통입니다. 그리고 반쪽짜리 지도자를 대하고 있긴 하나, 기본적인 예는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한 말이란 걸 알았다. 나는 그대로 돌려주었다.


“너무 본인을 폄하하진 마시지요.”


나는 올 때마다 사용하던 유리잔 하나와 술병, 그리고 승리의 미소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예전 같으면 이쯤에서 시아가 특유의 분노와 무표정이 오가는 얼굴로 방을 나가곤 했다.


그녀는 조용하게 책상과 서류에 눈을 고정한 상태다. 창 너머의 햇빛이 그녀의 갈색 머리와 붕대 사이 에메랄드 눈을 비추었다. 노란 머리는 염색하여 숨길 수 있었으나, 카벨리인 특유의 눈과 뾰족한 귀까지는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 그래. 동생한테 땅 좀 떼어준 게 그리 아깝다면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하지 그래. 아니면 영주들한테 내가 대신 말해줄 수도 있고 말이야. 그 삐진 세모 입을 계속 보고 있는 것보단 그게 낫겠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줘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서로 싸울 일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말이 오히려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여전히 철이 없군요. 눈치도 없고.”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


몇 년간 사귄 여자친구랑 싸우는 기분이 든다. 이건 명백한 시간 낭비다.

그녀가 오래도록 답하지 않았기에 차라리 땅바닥에 먼지 수나 세기로 했다. 아니, 그만하는 게 좋겠다. 버림받은 개처럼 눈을 아래로 까는 꼴이라니, 나는 고개를 다시 세웠다. 기다림에 지친 눈은 이곳 저것을 방황하다가 가져온 유리잔에 머무르게 되었다.


잔을 쳐다보는 내 얼굴의 근육이 일그러진다.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쓰던 잔이었으니 바뀌었을 리는 없고, 블랑과 시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블랑이 잔에 포도주를 따른다.


내가 잔을 들자 그녀는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이 시선을 던져 주었다. 정확하게는 그 유리잔 밑바닥이 은은하게 푸른빛으로 빛나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거미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였고, 내게 급격한 우울을 던져 주는 잔이기도 하였다.


“안 마실 겁니까?”


그녀가 질 나쁜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 역시 그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웃음도 없었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진지하게 이 일을 바라보는 듯 하다. 나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두들기기 시작했다.


내가 권한을 돌려준다 한들, 시민과 영주들이 납득 할 리 없다. 그녀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고,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인자를 세상에서 지우고 싶어하는 것 같다. 원래부터 좋은 사이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렇게나 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거라 생각하나? 아니, 내가 죽고 나면 다음에 죽는 건 그녀다. 그걸 시아도 알고있을 터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손가락이 슬슬 아파질 때 즈음 다시 입을 열었다. 몸 안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올라온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니었으나 다른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어쩌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잔을 닦는 걸 잊어버렸나 봐?”

“글쎄요. 거미줄도 못 치울 상황인지라...”


그녀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평상시에도 큰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던 누님이었으나 오늘은 특히 더 차갑게 느껴졌다.


“...키예트 공화국이 분열되면, 지금보다도 많은 카벨리인들이 죽을 겁니다.”


그러니 두 명의 지도자는 필요 없다는 게 그녀의 뜻이다. 확실히 라바티아에 맞서기 위해서는 연합국의 신뢰가 중요하다. ‘키예트의 분열은 그 신뢰를 깨뜨릴 수 있다는 건가?’


“재미없는 농담이야.”

“나는 농담을 안 좋아합니다.”


단언컨대 나는 내 성격치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친구나 병사들, 그 누구도 내가 관리인을 시켜 안부편지를 쓰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손톱을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


“그게 제일 재미없는 부분이지.”


지금 한 자릿수를 버려도 40년, 죽을 고비를 수 없이 함께 넘어온 동생의 앞에 독이든 잔이 놓여져 있다. 이게 그녀가 내게 주는 선택지였다. 내가 그녀를 계속 쳐다보고 있지만 돌아오는 건 죽은 눈동자뿐이었다. 그녀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 모양이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은 아니잖아?”

“하나의 목숨으로 수백만의 목숨을 구한다면 가치가 크겠죠.”


헛웃음을 짜내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생각했으면서도 쉽지 않았다.

라바티안과 카벨리인의 혼혈, 게다가 수인의 이름까지 갖고있는, 되는대로 섞어놓은 귀리죽 같던 유년기가 떠올랐다.


“꼭 잔을 마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잔을 빙글거리며 돌린다. 그녀의 수관인 블랑이 다가오며 말을 건다. 말끔한 차림의 서른이 조금 넘은 남자다.


그 역시도 유리잔의 비밀을 알고 있는 눈치다. 그리고 오랜 기간 우리 둘 밑에서 있었던 만큼, 우리를 잘 알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영주와 의원들도 그녀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할 수는 없다. 단지 그녀의 무능함이 사람들을 죽여 갈 뿐이다. 그렇게 되면 반란의 불씨가 더 깊어질 테고 빠르든 늦든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확실히 대책이 필요하다.


“마시지 않으실 거라면 잔을 내려놓으시지요.”

“지금 편지를 쓰는 게 바스티엘 가문이야?”


그를 무시한 채 그녀에게 묻는다. 그녀도 나를 무시한 채 블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스티엘 가문은 이번 전쟁에서 우리에게 배를 지원해줬었다. 시아는 답하지 않는다.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아마 서신이 돌아오지 않았을 거야. 앞으로도 돌아오지 않을 테고.”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움직이던 펜을 잠시 내려놓는다. 간신히 관심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핏기없는 얼굴이다.


“왜 돌아오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그녀의 다른 표정이 보고 싶었다. 아마 한 동안 서로 얼굴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간의 화풀이도 하고 갈 생각이다. 과연 다음에 하는 말까지 무표정으로 흘릴 수 있을까?


“내가 그놈들 머리통을 창살에 꽂은 채 성문 앞에 걸어놨거든.”

“뭐? 이런 멍청한...”


그녀가 오늘 처음으로 생기있는 반응을 보여줬다. 시아의 눈썹이 이마 중심으로 모여드는 건 굉장히 희귀한 장면이다. 포도주병을 기울여 그대로 한 모금 넘겼다. 최고의 안주다. 그러나 나도 방금 전처럼 값 싼 웃음을 짓지는 않았다. 그런 헤픈 녀석은 방금 전 독이 든 잔을 마시고 죽어버렸다.


“부정적 여론을 만들던 게 그였어. 부친을 죽인 무능하고 잔인한 거미 여왕과 자기 이익밖에 볼 줄 모르는 도마뱀의 자식이 합심해 라바티아에 나라를 팔려고 한다던가, 우리 둘 사이에 숨겨진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거나. 내 심복 중 하나가 바스티엘 가문 아낙네들의 불건전한 다과회에서 들은 내용이지.”


시아는 다시 침착을 되찾았다. 정확하게는 눈썹이 흔들리는 걸 억지로 누르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병사를 많이 잃었군요. 그의 원조가 이번 전쟁에서는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뛰어난 안목과 재능이 드러나는 대사였다. 그녀와 나 둘 중, 페시로아스 연합의 미래를 위해서 누가 죽어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뭐, 칭찬을 기대하진 않았어. 등 뒤에서 칼을 든 놈을 아군으로 생각하는 년이 뭘 알겠어. 아직도 병사가 절반이나 살아있다는 거에 감사나 하지 그래.”


일부러 더 자극적인 단어들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열을 좀 받은 모양이다. 입술 한쪽이 미묘하게 흔들린다. 이 표정을 봤으니 오늘 밤 나는 숙면할 것이다.


“입은 쳐 먹을 때만 쓰는 게 아니랍니다. 지도자가 대화 없이 힘으로만 누르려 한다면 폭군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대화? 대화라고? 하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십만을 죽여온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게 우스울 따름이다. 우리 둘은 아직도 역할극에 심취해있다. 항상 말썽만 만들어내던 적국 수장을 그 대화라는 걸로 압도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라도 상상하고 있을까? 아직도 그녀는 꿈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복종한다면 오늘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그것도 더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그동안 내게 주어진 역할은 언제나 하나였어. 배신자, 혹은 선량하더라도 가문에 해가 되는 자들을 죽이는 거지. 주인이 자주 바뀌었을 뿐 근본적인 일은 변하지 않았어.”

“...알고 있습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아니.”


나는 즉답했다.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후 블랑이 들고 있는 포도주병을 빼앗아 병 채로 마셨다. 그 후 남은 포도주를 잔에 기울였다. 그녀가 한숨을 짧게 내쉬었고, 유리잔에 담긴 포도주가 흘러내리며 카펫을 적시고 있다.


“넌 하나도 이해하지 못 했어.”


병을 계속 기울인다. 블랑... 그가 대화 중간중간 꼬리를 흔들며 관심을 끌어내려는 게 거슬린다.


“공작님?”


붉은 액체는 멈추는 일 없이 계속 흐른다. 작은 유리잔으로부터 술이 쏟아져 나오며 바닥을 적신다. 병 하나를 다 비우고, 포도주병을 젖은 바닥에 대충 던졌다. 병은 가로로 누운 채 붉은 바다를 유랑하는 배처럼 떠다녔다.


“잔을 받아가도 되겠습니까?”


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붉게 물든 카펫과 의자는 버려야 할 것이다. 이미 넘쳐버리고, 스며들어버린 포도주를 말끔하게 돌려 담을 수는 없다. 한 손으로 잔을 들어 건네주고, 다른 손은 안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항상 생존에 불리했었다. 나는 누구를 죽이고 살릴지 결심했다.


“받게나.”


내가 주는 잔은 금방이라도 다시 넘칠 것처럼 출렁거린다. 그가 잔을 받으러 다가온다. 그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낚아챘다. 안 주머니에서 꺼낸 칼이 블랑의 손을 통과하여 나무로 된 테이블에 구멍을 뚫는다.


“으아악!”


테이블과 손이 고정되었고, 그 충격으로 유리잔을 놓친 탓에 잔은 바닥에 떨어져서 깨져버렸다. 그는 신음하고, 포도주는 그의 뚫린 손으로부터도 나오고 있다. 그녀는 무언의 질문을 했고, 이것은 질문에 대한 내 답이었다. 그녀의 목을 뚫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내게 없었다.


“누군가가 죽어야만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해?”


블랑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가 나를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을 뿐. 나는 적당한 충성과 그가 주는 정보들을 원했을 뿐, 그가 만든 종교의 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시아는 다시 벙어리가 되었고, 오른쪽 눈썹만 아까보다 더 올라갔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고민을 한다. 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그녀만 죽이면 문제의 절반이 해결된다. 그녀는 언젠가 나를 포함한 주변인들 모두와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다. 그 전에 내가 다른 해결법을 생각해낼 수 있을까?


라바티아는 북진을 준비 중이고, 영주들은 키예트라는 작은 땅덩이를 잘라 먹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래도 내 마음속 대답은 변치 않았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비효율적인 선택을 할 생각이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쉰다.


“델림 가문이 분열되는 일은 없을 거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블랑에게 꽂은 칼 손잡이에는 세계수와 갑옷을 입은 숫사슴이 그려져 있었다. 과거 키예트는 라바티아의 일부였기에, 세계수는 라바티아, 사슴은 델림 가문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델림의 문양은 언약을 어긴 배신자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기도 했다.


여왕의 방에서 큰 소리가 나자 밖에서부터 친위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절반은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내가 신호만 보내면 키예트의 주인이 바뀐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병사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은 칼을 뽑았다. 시아가 손을 올려 싸움을 제지하였기에 별일은 없었다. 나는 병사들을 거칠게 헤집으며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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