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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유학생 님의 서재입니다.

흑백의 대종사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영국유학생
작품등록일 :
2022.10.31 17:11
최근연재일 :
2022.11.25 12:00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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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3,477

작성
22.11.20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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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기이한 인연

DUMMY

내가 주방 한구석에서 꽤 묵직해 보이는 궤짝을 들고나오자 노인, 그러니까 노사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어디에서 난 물건인가?”


“아, 예. 흑룡문주의 방을 털었더니 나왔습니다. 뭐가 들어있는지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는 궤짝을 열어 노사부에게 안을 보여줬다. 노사부는 내용물을 보더니 영약과 비급을 집어 들고는 뚜껑을 닫았다.


“이건 수강료로 받겠네.”


노사부는 내 앞에서 비급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아까운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괜찮은 척 대답했다.


“예, 물론이죠.”


어쨌든 저 비급과 영약을 받고 뭔가를 가르쳐 준다면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노사부를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그런데 은자는 안 챙기십니까?”


“밥을 하려면 자네가 식재료를 사야 할 텐데 내가 그걸 가져가서 뭘 하나.”


납득이 가는 대답이었으므로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철웅방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제가 가서 처리합니까?”


노사부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자네 실력으로는 무리야.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 마을이 멀쩡해야 산에서 내려와서 밥도 먹고 식재료도 사갈 것 아닌가.”


무슨 얘기가 말끝마다 밥 얘기로 끝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뢰가 가는 대답이었으므로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나는 노사부를 따라서 산 입구까지 도착했다.


“어? 여기는 제 집이 있는 산인데요?”


“우리 집도 여기에 있네.”


“아하.”


우리 집? 같이 사는 사람이 또 있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노사부를 따라서 산을 올랐다.


노사부의 말대로 그의 집은 내 집 위로 한참 올라가야 있는 산 중턱에 있었다. 허름한 집의 모양을 보아하니 이런 쪽으로는 손재주가 영 없는 편인 듯했다. 어쨌든 노사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어떤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소녀는 한쪽으로 질끈 묶은 검은 머리를 나부끼며 노사부에게 달려왔다. 이마에 땀이 맺혀있고 검을 쥐고 있는 것을 보니 한창 수련을 하던 중이었나 보다.


소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이 사람은 뭐예요? 그리고 밥은 가져왔어요?”


이 사람들은 밥을 못 먹어서 한이 맺혔나. 손녀가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밥을 찾는 모습을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밥은 아직. 대신 밥 해줄 사람을 데려왔다.”


그러니까 대충 여태 노인이 포장해갔던 음식은 이 소녀의 뱃속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소 소저. 진소운이라고 하오.”


진소운이라는 이름은 내가 혹시 모를 추격을 피하기 위해 지은 다른 이름이었다. 고려 성씨는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에 김(金)씨 성과 한어 발음이 비슷하면서 송나라에서 비교적 흔한 진씨를 사용했던 것이다.


“할아버지, 그러면 오늘 아침도 못 먹는 거예요?”


소녀는 내 인사를 가볍게 무시한 채 실망한 얼굴로 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어험험, 조금만 기다려라. 이놈과 비무 한 번만 해주면 식사를 준비하라고 시키겠다. 사람이 밥값은 해야지. 네놈도 얼른 따라와라.”


노사부는 손을 까닥거리며 집 뒤편으로 걸어갔다. 소녀는 집으로 들어가 목검 두 자루를 챙겨오더니 한 자루를 내게 던졌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소녀는 이미 방향을 돌려 노인을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따라갔다.





노사부는 우리를 너른 공터로 안내했다. 바닥에 여기저기 보법을 밟은 흔적이나, 나무에 새겨진 칼자국으로 보아 이곳이 수련 장소인 듯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도 내가 제대로 찾아오기는 했구나.


넋을 놓고 구경하고 있는 나를 노사부가 다그쳤다.


“뭣 하고 있나. 얼른 비무 준비를 하지 않고.”


“아, 예! 저, 근데... 제가 이 꼬맹이와 싸워야 합니까?”


나도 뒤끝이 있는 사내였기 때문에 일부러 좋은 말을 두고 꼬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자기 얘기를 하는 줄 알아챈 꼬맹이는 도끼눈을 치켜뜨며 내 쪽을 바라봤다.


‘왜, 뭐.’


나도 눈싸움에서는 지지 않기 때문에 꼬맹이와 시선을 마주치며 도발했다. 노사부는 코웃음을 치더니 내게 말했다.


“나이는 자네보다 어릴 것이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한참 선배이니 걱정할 것 없네. 잔말 말고 비무 준비나 하게.”


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목검을 들고 공터에 섰다. 나는 이런 정식 비무를 해본 적이 없기에 박투판에서처럼 괴상한 기수식을 취해야 하나 고민했다.


한참 동안 눈치를 보던 내가 어정쩡한 동작으로 괴이쩍은 기수식 동작을 펼치려고 할 때, 노사부가 꼬맹이에게 말했다.


“소연아. 내력의 오 할만 사용해라.”


“왜요?”


“그냥 하라면 해.”


꼬맹이, 그러니까 소연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자리를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니까 기수식은 할 필요가 없었나 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목검을 내밀어 꼬맹이의 검을 받았다.


“억!”


그런데 공격이 생각 이상으로 묵직했다. 나는 첫 공격을 만만하게 본 것을 후회하면서 손목에 저릿함을 느끼며 연신 뒤로 물러났다.


‘이게 오 할의 내공이라고?’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보법을 밟아 공격을 회피했다. 다행히도 속도에서 크게 밀리지는 않았지만 내력에서 현저히 밀리는 상황. 일단은 비무인데다가 노사부의 손녀이기 때문에 꼼수를 부려 크게 다치게 할 수도 없었다. 뭣보다 그런 식으로 이긴다면 이기더라도 발전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검술로 겨뤄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사용하는 검법은 태극검법의 유검(流劍), 그리고 화산의 육합 방위를 방어하는 보법과 함께 일격필살의 반격기로 이어지는 특징을 가졌다. 그러니까 재빠른 보법을 밟으면서 유검으로 육합 방위를 방어하고, 적의 빈틈이 보일 때 갑자기 쾌검으로 전환해 찌르는 식이다.


물론 그것은 빈틈이 보일 때의 얘기였고, 지금은 꼬맹이의 검을 받아내기도 급급했다. 유검이고 나발이고 이 정도 내력 차이에서는 쓸모가 없나 보다. 처음 부딪칠 때만큼 손목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충격이 없이 받아내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 하고 밀려나자 노사부가 잠시 비무를 중단하고는 나를 보고 얘기했다.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비무는 양측이 서로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하네. 정직하게 상대해야만 비무가 아니야. 굳이 싸우는 방식을 크게 바꿀 필요는 없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공터로 가서 자세를 잡았다. 소연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일단 노사부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거리를 계속 벌리며 탐색전에 들어갔다.


아까 검을 받아내면서 느꼈지만, 꼬맹이의 검은 쾌검(快劍)보다는 중검(重劍)에 더 가까웠다. 내가 검술을 아직 깊게 못 배워서 자세히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본격적인 중검이라기보다는 웅후한 내력을 바탕으로 중검의 장점을 일부 가져온 느낌? 때문에 검이 아주 느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반응을 못 할 정도로 빠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삼십여 초를 피하고 받아내며 검의 특징을 대충 깨닫자 나는 반격에 나섰다. 우선 내력에서는 내가 현저히 밀렸기 때문에 나는 녀석의 내력 흐름을 끊는 데에 집중했다. 쾌검을 익혔기 때문에 내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녀석은 피하기만 하던 내가 갑자기 반격하자 당황해서 보법을 밟지도 못하고 검을 막는 데 급급했다. 녀석이 내력을 실어서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마다 나는 먼저 검을 찔러넣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녀석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방어에만 집중하자 나는 이번에는 허초를 섞어 눈속임을 한 뒤에 시간을 벌어 중검을 찔러넣었다.


녀석은 갑자기 무거워진 검에 밀려 두세 걸음을 물러났다. 나는 꼬맹이의 순발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것까지 막을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반응속도라면 정상적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실력에서는 내가 훨씬 밀렸기 때문이다.


꼬맹이는 물러난 것이 분했는지 씩씩대면서 다시 달려들었다. 녀석은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지 같은 수법에 또 휘말려서는 중검에 검날을 얻어맞고 물러났다. 그렇게 세 합 정도를 같은 방식으로 당하자 꼬맹이는 노사부에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칠 할까지는 쓰게 해줘요!”


노사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래, 좋다.”


어차피 나는 팔 할 정도까지는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내력을 더 실을 수 있다고 해서 속도가 현저히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이기는 것은 무리지만 이 정도라면 지칠 때까지 꼴사납지 않게 싸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침착하게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꼬맹이는 나를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 미소가 불길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찰나,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 머리통을 노리고 검기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칠 할의 내공이라는 것이 저런 의미였나보다. 나는 맞상대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아예 경공으로 냅다 달리면서 노사부에게 외쳤다.


“아니, 사부! 검기! 검기!”


“그러니까 사부가 아니래도.”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나는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검기를 뛰어다니며 피하느라 끊기는 호흡으로 물었다.


“노야라고 부르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 밥, 해야 한다니까요!”


밥 지으라고 불러놓고는 몸을 조각내버리면 어떡하냐! 하는 호소를 짧은 말에 담으며 나는 계속 달렸다. 꼬맹이는 악독한 미소를 지으며 먼 거리에서 내게 계속 검기를 날려댔다.


“진정하게. 맞는다고 죽지는 않아.”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등의 수식어를 과감히 뺀 채로 질문했다.


“아직 소연이가 목검으로 검기의 날을 세울 실력은 안 되네. 맞아도 엄청 아프기만 할 뿐 어디가 잘려 나가지는 않을 게야.”


그것참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하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로 나는 헉헉대면서 계속 달려야만 했다. 소연은 휘두르던 검을 잠시 멈추더니 나한테 빈정대듯이 말했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거야?”


“헉헉, 안 그래도 지금 어떻게 상대할까 달리면서 고민하고 있었소.”


나는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녀석은 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기다려주지 않았다.


“고민 다 했지? 그럼 다시 간다?”


소연은 이제 보법까지 밟으며 나와의 거리를 좁히면서 다시 검기를 날렸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일단 검기의 강도를 알아보고자 검을 부딪치기로 했다. 나는 목검에 내력을 있는 대로 밀어 넣으며 날아오는 베기 형태의 검기를 내려치기로 막아섰다.


아무래도 실수였나 보다.


나는 검기와 부딪치자마자 눈앞에 불꽃이 튀는 것을 느끼며 뒤로 맹렬한 기세로 튕겨 나갔다. 이마가 시큰한 것이 반동에 밀려난 내 검에 머리를 맞은 모양이다. 나는 그대로 땅에 넘어져 몇 바퀴를 더 구르다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쯧쯧... 아무래도 오늘 아침밥도 먹기는 글렀구나.”


나는 꼬맹이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노사부가 안타까운 듯이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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