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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단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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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
작품등록일 :
2016.02.19 02:12
최근연재일 :
2016.03.19 15:37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886
추천수 :
34
글자수 :
49,720

작성
16.03.13 19:00
조회
143
추천
3
글자
8쪽

그림자들의 반란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2)

DUMMY

3대학병원 장례식장 3호실은 불 꺼진 방처럼 고즈넉했다.

발 한 번 뻗을라치면 들어오던 조문객들도 어느새 끊어져 있었다.


현은 텅 빈 눈빛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 주리의 영정사진을 응시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풀린 넥타이, 급히 입은 상복 속으로 맥없이 늘어진 사지는 미대생이 빚다 만 조소 작품 같기도 했다.


부의함을 지키던 민겸이 큼직한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현아.”

“……응.”

“이거, 어떡할까?”

“네가 잘 갖고 있어.”

“한두 푼도 아니고 어떻게.”

“…….”

“확실히 의사들이라 그런가, 통이 크더라.”

“후우우.”


가방 안에는 부의함에서 꺼낸 조의금이 있었는데, 민겸이 대강 헤아린 액수만도 그의 열 달치 월급 정도였다.


“민겸아.”

“응.”

“아버님 모시고 들어가.”

“됐어.”

“어제도 집에 안 갔잖아.”

“됐다고.”

“너도 내 말 안 듣냐?”

“…….”


그때 조문객실에서 “여기 술 안 줘? 맛없는 음식 먹어주니까 내가 호구로 보여?”라는 외침이 들렸다.

민겸은 한숨을 쉬며 조문객실로 갔다.


“아버지.”

“인마! 네가 여긴 왜 와? 부의함 털리면 어쩌려고?”

“함은 다 정리했어요. 술 갖다드릴 테니까 이러지 마세요.”

“조문객들이 재고 처리장이야? 음식이 뭐 이래?”

“아버지…….”

“떡은 사나흘 묵혔냐? 뭐 이렇게 딱딱해? 갈비탕은 싱겁고, 밥은 설익고, 이걸 지금 서비스라고…….”

“아버지. 상갓집입니다. 호상(好喪)도 아니잖아요.”

“에이! ……빌어먹지도 못할 년. 밥이 아깝다!”

“이보게! 자네도 그 여자들이랑 똑같구먼. 그게 망자한테 할 소린가.”

“나는 원래 막돼먹은 놈이라고!”


청식은 친구인 전호가 붙잡는 손길을 뿌리쳤다.


어젯밤 8시 30분경.

주리가 탄 차가 광한진 외곽의 도로에서 추락했고, 차를 운전했던 사람은 주리와 같은 병원의 신경외과 교수인 지호였다.

주리와 지호는 발견 당시 살아 있었으나 긴급 후송 중 사망했다.


수술실 간호사들은 조문객실에서 술을 마시며 입방아를 찧었다.

며칠 전 퇴근길에 병원 근처 아파트에서 지호와 주리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몸 딱 붙이고 들어가는 모습이 신혼부부라고 해도 믿겠더라. 원무과 직원도 지호가 은근슬쩍 주리의 어딘가를 만지며 아파트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더라. 방금 옆자리에서 다른 병원 의사들이 얘기하는데, 8년쯤 되었다더라.

양쪽 다 결혼한 지 2년 좀 넘었다던데, 여기 남편이랑 저기 아내가 설마 몰랐겠나. 결국 직업과 돈만 보고 결혼한 거 아닌가. 알았으면 속물이고 몰랐으면 덜 떨어진 위인 아닌가.

대강 이런 이야기였다.


“이런 막돼먹은 것들을 봤나! 이 자리에서 그게 할 소리야!”


청식은 간호사들의 머리에 떡을 집어던지며 일갈했다.

그네들은 쫓겨나다시피 하여 나갔고, 현은 송구하다며 청식에게 무릎을 꿇었다.


민겸은 청식에게 술과 안주를 주고 현에게 돌아왔다.


“현아.”

“응.”

“아버지 술 한 잔 드려라.”

“그래…….”


현은 말을 길게 흐리며 몸을 일으킨 후 넥타이를 고쳐 맸다.


조문객실에 사람이라고는 청식과 전호뿐이었다.

청식은 현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자신의 옆에 앉혔다.


“불쌍한 놈.”

“…….”

“괜찮냐?”

“예, 아버님. 걱정 마세요.”

“내가 안 괜찮다.”


청식은 현의 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뭘.”

“제가 그 여자들한테 막돼먹었다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다 들었냐?”

“알고 있었습니다.”


현은 소주를 털어 넣은 후 청식과 전호에게 한 잔씩 따랐다.


“이놈아. 그걸 알았으면 차라리 이혼을 하지.”

“…….”

“후우우.”


두 노인은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현은 청식과 전호, 민겸을 전송하고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2호실 앞 복도 의자에 앉은 상복 입은 여자에게 다가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진현이라고 합니다. 성(姓)이 진이고, 주리 남편이에요.”

“채미혜예요.”

“예.”


미혜는 지호의 아내였다.

티 없이 뽀얀 얼굴은 화장기 없고 푸석푸석했지만 담담했고, 비뚤이게 묶인 머리카락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현은 미혜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고 언뜻 생각했다.


두 상주가 딱딱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현이씨.”

“예.”

“이거.”


미혜가 현의 귀에 이어폰 한쪽을 꽂고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지호의 차량 블랙박스 화면이 재생되었다.

차량이 찍은 남강의 도로가 보였고, 지호와 주리의 목소리가 교대로 들렸다.

현이 못 알아듣는 전문 용어가 오가며, 최근 두 사람이 진료했던 환자나 수술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나 졸린데, 노래 좀 불러줘.”

“나도 졸려요. 수술실에만 7시간 있었어.”

“이래가지고 우리, 이따가 잘 할 수 있을까?”

“그거 졸린 거랑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우리 내일 쉬는데.”

“너 어디 돌아다니는 거 싫지?”

“네.”

“바비큐 해 먹을까? 아님 술 한 잔 할래?”

“됐어요. 나는 그냥 빨리 자고 싶어. 오빠는 배부르면 잘 못하잖아.”

“후후후. 그래. 나도 그냥 빨리 자고 싶다.”

“거기, 저녁에 체크아웃해도 돼요?”

“내일 8시로 예약했어.”

“설마 저번처럼 침대에서 소리 나는 거 아니죠? 그거 되게 거슬린다고요.”

“그래서 거기서는 욕실이랑 소파랑 바닥에서, 다 좋았잖아. 잔디밭도 새로웠고.”

“내 속옷 다 버렸잖아요!”

“안 입으니까 좋기만 하더라. 그리고 내가 더 예쁜 걸로 사 줬잖아.”

“아웅! 나 잠깐 잘게요.”

“그래.”

“오빠도 졸리면 휴게소 들어가요.”

“천천히 갈게.”


대화가 끊겼고, 소리 없이 나타난 화면의 도로는 이따금씩 차선을 빗겨가다 “아!” 소리와 함께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급커브 길을 직진하며 화면이 흔들렸고, 지호의 “앗!”이라는 외마디를 끝으로 영상이 멈추었다.


“후우우.”


현이 한숨을 쉬었고, 미혜는 이어폰을 뺐다.

눈이 마주쳤다.


“미혜 씨.”

“네.”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한참 말이 끊겼다가 현이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

“이거 저한테 복사해 주실 수 있어요?”


미혜가 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또 마주쳤다.


“왜요?”

“이렇게 밝은 목소리는 처음이네요.”


현은 이따금 주리를 상상하며 몸을 뒤틀었다.

결혼식 날 오후의 경험은 현의 상상 속에서 남녀 주인공만 그대로일 뿐, 시간과 장소와 숨소리와 체위가 수없이 변주되며 그를 숨 가쁘게 했다. 주리는 “빨리 해!”라는 뾰족한 외침과 함께 사라졌고, 견디지 못해 터진 뜨거움이 주리가 아닌 휴지에 젖어들 때마다 현은 아내를 느끼지 못하고 상상해야 하는 현실에 마음이 없어진 듯 공허했다.

그런데 밝은 목소리는 현의 상상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이기도 하죠.”

“그러네요.”


말이 잠시 끊겼다.


“현이씨.”

“예.”

“주리 씨, 사랑해요?”


현은 고개를 저었다.


“주리한테는 늘 미안했어요.”

“왜요?”

“마음이든 몸이든, 사랑할 시간도 기회도 없었으니까요.”

“……그렇죠.”

“미혜 씨도 그랬어요?”

“네.”


미혜가 손을 비비자 현은 따뜻한 녹차를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혜 씨.”

“네.”

“주리는 딱 하루 외도했네요.”

“하아아.”


미혜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사흘이었어요.”

“지호 씨랑 주리랑, 저승에서도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네.”


언젠가부터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미혜 씨 피곤하죠?”

“…….”

“이불은 있어요?”


현은 민겸이 갖다 준 이불을 미혜에게 주고 3호실 벽에 기대어 잠들었다.


작가의말

내일 건너뛰고, 모레(3월 15일)에 다음 편 올릴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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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들의 반란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2) 16.03.13 144 3 8쪽
6 그림자들의 반란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1) 16.03.12 187 3 8쪽
5 두 번째 단편 <그림자들의 반란> 예고입니다. 16.03.08 171 1 3쪽
4 고향 가는 길(4, 완결) 16.02.23 179 3 12쪽
3 고향 가는 길(3) 16.02.22 153 4 10쪽
2 고향 가는 길(2) 16.02.20 171 4 12쪽
1 고향 가는 길(1) 16.02.19 281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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