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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진사로의 단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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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
작품등록일 :
2016.02.19 02:12
최근연재일 :
2016.03.19 15:37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885
추천수 :
34
글자수 :
49,720

작성
16.02.23 01:49
조회
178
추천
3
글자
12쪽

고향 가는 길(4, 완결)

DUMMY

으뜸회 마을에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현포는 숙소 앞 연못가에 앉아 끊임없이 기침을 내뱉으며 눈처럼 흰 어머니의 얼굴과, 자신의 시신을 병원에 팔라던 그의 유언을 생각했다.


“본토인 시체는 100만 원, 식민지인 시체는 10만 원이래요.”

“하아아.”

“소희 씨는 어디서 천명 사람이라고 하지 마요.”


소희는 현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요새는 일 안 해?”

“쫓겨났어요.”


찬바람이 불자 현포는 자신의 외투를 소희의 어깨에 씌웠다.

소희는 문득 놀랐다. 천명 사람들은 연인끼리도 옷을 씌워주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제국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얘! 여기 있었어?”

“네.”

“빨리 와 봐. 큰일 났어.”


순주가 소희를 데려간 후 현포는 연못을 보며 한동안 기침하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사흘 후 소희는 현포를 끌고 인항동의 조용한 집에 왔다.


“전 소유주가 촌장이야. 촌장이 마을을 통째로 팔았어. 3천만 원에 마을 사람들을 내쫓은 거라고.”


소희가 말하는 촌장에는 ‘님’자가 빠져 있었다.


촌장 잔명두는 소희가 마을에 온 후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소유주라는 사람이 나타나 이 마을 주민들에게 퇴거를 명령했다.

새로운 소유주는 주민들에게 마을 매매 계약서를 보여 주었고, 제국의 법 집행관이 이 사실을 공증했다.


소희는 입회금을 내고 계약서 없이 집을 얻었지만, 몇몇 주민들은 이게 입회금인지 보증금인지를 따져 가며 명두에게 임대차 계약서를 받아냈다.

새로운 소유주는 계약서를 쓴 주민들에게는 보증금에 1할을 얹어 주어 내보내기로 했고, 계약서 없는 주민들에게는 올해가 가기 전에 집을 비우라고 통보했다.

집행관은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말하는 주민들에게 이게 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희가 화난 듯한 표정으로 이 말을 할 때도 현포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너는 씻고, 약 먹고 쉬어. 나는 6시에 올게. 점심 꼭 먹고.”

“······.”

“아무한테도 문 열어주지 마.”

“네.”


소희는 몸을 돌리려다 멈추고 현포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이제 존댓말 안 해도 돼. 모르는 사이일 필요 없잖아.”

“······.”

“소희 씨 말고 소희야, 라고 해.”


현포는 고개를 돌렸다.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떨리게 했던 미소가 감은 눈 속에 또 한 번 어른거렸다.


소희가 나간 후 인항동 셋집의 생경한 공간에는 현포만 외따로이 남겨졌다.

밝고 차가운 햇살이 거실 위로 내리쬐었다.


“이건 내가 옳아. 나랑 모르는 사이인 게······. 쿨럭쿨럭!”


현포는 몸을 둥그렇게 말고 한참 동안 버르적거렸다.




소희는 자신의 말대로 오후 6시에 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현포의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잘 쉬었어? 잠깐만 기다려. 저녁 할게.”

“쿨럭!”

“어? 와! 이거 네가 다 한 거야?”

“······.”


식탁에는 이미 저녁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소희는 저녁을 먹으며 하루 일과를 이야기했고, 현포는 숟가락조차 들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희는 이 집에 옮겨놓은 족자가 너무 반듯하게 걸렸다고 생각했다.


“맛있었어. 잘 먹었어.”

“······.”

“설거지는 내가 할게.”


현포는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하는 소희를 보며, 저 소담스러운 뒷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

“너는 내가 얘기할 때 왜 그렇게 나를 봐?”

“예뻐서요.”


족자를 보던 소희의 고개가 창밖으로 돌려졌다.

현포는 기침이 나오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저 작고 오뚝한 코가 여전히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눈, 내가 얘기할 때 네 눈, 가끔 생각났어.”

“소희 씨 웃는 모습은 잊으려고 했어요.”


약간 바뀐 소희의 표정은 분명한 미소였다.


“소희야, 라고 해.”

“나는 고향에 가야 돼요.”


소희의 시선이 현포에게 돌아왔다.


“이제 거기도 네가 있던 때랑 많이 달라. 너 아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거고.”

“그래도 가야 돼요.”

“당장 내일 가겠다, 그런 건 아니지?”

“······.”

“이제 날도 춥고, 당장 가기는 멀고 힘들어. 봄에 나랑 같이 가자.”

“쿨럭! 쉬어요. ······쿨럭쿨럭!”


소희는 기침하며 작은방으로 들어가는 현포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다음 날.

골목길에 고인 물이 단단히 얼었다.

식탁에 아침상이 차려졌지만 소희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현포는 준비했던 밥과 반찬으로 주먹밥을 만들었고, 종이에 한 덩이씩 따로 싸서 소희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이따 꼭 먹을게.”

“······.”

“6시에 올게. 쉬어.”

“소희야.”


소희가 몸을 돌렸다가 되돌아섰다.

눈이 마주쳤다.


“추워.”


현포는 소희의 외투 단추를 하나 더 잠갔고, 장갑 끈도 다시 묶어 주었다.


“저녁 준비해 놓을게. 다녀와. 조심해.”

“어? ······응.”


소희는 골목을 걷다 문득 뒤돌아보았다. 현포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현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웃집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와 골목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제까지 살았던 마을과 전혀 다른, 조용하면서도 생기 있는 모습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현포는 고개를 저으며 기침을 뱉었다.

보천동의 달동네 마을에서도, 어제까지 살았던 파령동 72번지의 으뜸회 마을에서도 그는 늘 이방인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를 물이 그의 발치에 한 방울 떨어졌다.




소희는 오늘도 변함없이 독서당 회원들의 질문에 답하며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남자 안내사 한 사람이 1시간이나 늦게 출근했다.


“정필 씨 이제 온 거야?”

“죄송합니다.”

“왜 늦었는데?”

“아내가 임신을······.”

“어, 그래? 축하하네. 몇 주나 됐대?”

“그게 아니라, 지금이 배란기여서 노력하고 왔습니다.”

“뭐? 이봐! 아침부터 그게 할 소리야?”


소희는 당주와 정필의 대화를 듣다가 주먹밥을 꺼냈다.

온기가 남은 듯했다.

밥을 씹는 그의 눈에 뜻 모를 감정이 담뿍 담겼다.


‘소희야, 하고 불렀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후 들어간 시댁에서 남편이었던 기훈은 소희를 “야”라고, 시부모님은 “이년아”라고 불렀다.

그런데 “소희야”라고 부르는 현포의 목소리가 지금도 다정하게 들리는 듯했다.


어렸을 때 현포는 똘똘하게 생긴 만큼 공부도 잘했고 야무졌다.

그리고 그는 소희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여기 온 후 나도 이름 불러준 적이 없었어.’


소희의 입술이 ‘현포야’라고 말했다.

비록 창밖 세상은 꽁꽁 얼었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이 많이 녹았다고, 그만큼 누군가의 언 마음을 녹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녁 6시.


“나 왔어! ······아!”


소희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삶은 닭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식탁에는 밥과 닭고기뿐 아니라 두부조림과 배춧국 등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혀, 현포야. 나 왔어.”


소희는 이름 부르는 일이 참 어렵다고 생각하다가 눈이 커졌다.

식탁에 놓인 수저가 한 벌뿐이었다.


“현포야? 어디 있어?”


작은방과 화장실에도, 뒤편 창고에도 현포는 없었다.

그 대신 안방 화장대 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소희야.

덕분에 행복했지만,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야.

늦었지만 고향에 갈게.

고마워. 은혜 잊지 않을게.

끼니 거르지 말고, 늘 몸조심해.



“현포야!”


소희는 외투도 입지 않고 집을 뛰어나갔다.

현포가 방금 전에 집을 나갔으리라는 생각에 소희는 한동안 주변을 뛰어다녔다.

그러나 현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아아.”


소희는 탁자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닭다리를 잡자 다리뼈만 얄궂게 뽑혀 나왔다.

그는 손이 데는 줄도 모르고 다리 살을 통째로 뜯어 물었다.


“소희야. 소희야.”

“그렇게 나만 부르면 돼. 이런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어.”

“쿨럭쿨럭!”

“그러니까 고향은 몸이나 낫고 가라고!”

“소희야. 소희야······.”


현포의 다정한 목소리와 기침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리는 듯했고, 벽에 걸린 족자 ‘만인은 조신 앞에 평등하다’는 뒤집힌 것만 같았다.

뜨거운 살덩이를 꾸역꾸역 씹는 소희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렀다.




“쿨럭쿨럭!”


현포는 소희의 집을 나온 후부터 기침이 심해졌다.

밤이 되면서 날은 더 추워졌다.


손을 넣은 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이 만져졌다. 소희를 위한 찬거리를 모두 산 후 남은 잔돈이었다.

찬거리를 사지 않았대도 고향 갈 기찻삯으로는 턱없는 금액이었기에 현포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시내를 걷던 중 제국 귀족의 행렬이 지나가자 현포는 길을 비켰다.

으뜸회 마을의 촌장이었던 잔명두가 귀족 옆에서 함께 지나가다 현포를 보았다.

현포는 명두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자정쯤. 태명 중앙역사 안에 몇몇 사람들이 꾀죄죄한 차림으로 종이를 덮고 누워 있었다.

현포는 그 꾀죄죄함이 자신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차디찬 바닥에 몸을 누였다.

중늙은이가 그를 툭툭 쳤다.


“이봐. 여기는 내 자리야. 딴 데로 가라고.”

“예.”

“······빌어먹을! 모닥불 때 준다더니 뭐야?”


현포는 구석진 곳으로 옮긴 후 방금 전 자리를 보았다.

중늙은이들이 한데 모여 모닥불이 어떠네, 치안관이 어떠네, 이제 밥은 주지도 않네 하며 불만을 토하고 있었다.


현포는 목구멍에서 나는 쌕쌕 소리가 듣기 싫어 일부러 기침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소리 없이 외쳤다.


이게 제국이라고.

저 양반들이야 갈 데가 없지만 나는 갈 데가 있다고.




현포는 며칠을 그저 걸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고향 가는 길.

걸음은 느려졌고 기침은 잦다.

하지만 잊으려면 눈에 들어온 행정구역 표지판에 그는 설렜다.


현포는 조그만 호숫가에 도착했다.

이 호수를 돌아가면 일미환시에 접어든다. 즉 태상 제국의 최서단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는 풀을 뿌리째 뽑아 씻어 먹은 후 물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붉게 비친 얼굴은 더없이 지저분했지만 그는 웃었다.


“고향에 가면 이 옷은 벗어버릴 거야. 벗어야지, 꼭.”


현포는 먼지 쌓인 겉옷 속에 새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찬바람에 대지 않도록 신경 쓰며 걸어왔다.


“소희야. 소희야.”


현포는 새 옷을 사 준 사람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몇 끼를 굶고 걸어 아득해지면 어김없이 나타났던 예쁜 옆얼굴.

다시는 그 얼굴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쿨럭쿨럭쿨럭!”


안타까움도, 기침도 오랜만이었다.

눈앞의 호수가 노랗게 바뀌며 새로운 세상에 온 것처럼 보였다.

아니, 다시 보니 그 세상은 그의 고향 길향시의 호수였다.


현포의 몸이 떨려 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여러 번 물을 움켜 가며 얼굴을 씻었다.

외투와 겉옷을 바닥에 깔았고, 신발과 양말마저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소희가 사 준 깨끗한 옷이 드러났다.


현포는 겉옷 위로 반듯이 누웠다.

차가움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침마저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수많은 별들이 현포가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한 명씩 그려 주었다.


“아버지. 아버지. 엄마. 엄마. 엄마. 현지.”


그리고


“소희. 소희. 소희야······.”


소희의 얼굴이 사라지자 현포는 눈을 감았다.

한 여인만을 마음에 담았기에 그는 더욱 뿌듯했다.


특별한 잠기운이 현포를 세차게 덮어 왔다.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말했다.


내가 그리워한 고향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고.

그리운 사람을 떠나고서야 그것을 깨달은 나는 바보지만,

그랬기에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다고.


천명이든 태상이든, 길향시든 태명시든,

아버지든 엄마든 현지든

그리고 소희든.


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이 나의 고향이며,

세상에 들어올 때의 장소가 고향이듯, 세상을 떠날 때의 장소도 나의 고향이라고.


그래서 괜찮다고.

이제 됐다고.



[완결]


작가의말

퓨전&로맨스 <고향 가는 길>의 완결을 알립니다!


산업혁명 직후의 극심한 빈부격차 시대의 이야기...

당시 최하층민들은 한 끼 밥값도 안 되는 일당을 받았고, 복지 혜택은 못 받았죠.

게다가 나라 잃은 사람이 주인공이니 심리적 박탈감은 또 어땠을까...

그것을 생각하며 썼지만, 제 역량이 부족함만 느꼈고, 쓰면서 많이 우울했어요.


참고로 <고향 가는 길>도 <전장의 철검>과 연결됩니다.



이 작품 페이지에 여러 개의 단편 연작이 올라올 것입니다.

다만 다음 단편은 언제인지 알 수 없네요.


대신, 3월부터는 <히든 메이지>와 <봄꽃마리>를 재오픈하려고 합니다.

관심 가져 주시길...


꾸준히 글 쓰는 작가 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진사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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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림자들의 반란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5) 16.03.17 155 3 14쪽
9 그림자들의 반란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4) 16.03.16 133 3 10쪽
8 그림자들의 반란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3) 16.03.15 145 3 12쪽
7 그림자들의 반란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2) 16.03.13 143 3 8쪽
6 그림자들의 반란 - 처음처럼, 마지막처럼(1) 16.03.12 187 3 8쪽
5 두 번째 단편 <그림자들의 반란> 예고입니다. 16.03.08 171 1 3쪽
» 고향 가는 길(4, 완결) 16.02.23 179 3 12쪽
3 고향 가는 길(3) 16.02.22 153 4 10쪽
2 고향 가는 길(2) 16.02.20 171 4 12쪽
1 고향 가는 길(1) 16.02.19 281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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