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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리 님의 서재입니다.

알고 보니 검술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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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리
작품등록일 :
2022.04.06 16:15
최근연재일 :
2022.05.29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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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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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9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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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데뷔전 (6)

DUMMY

37.


수천 개의 가시를 씹어 삼킨 듯한 통증 속에서 차유라의 의지는 부표처럼 떠돌았다.


‘으읏······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대체 무슨······!’


통증이 심해질수록 생각이 이어지는 시간은 짧았다.

문장은 단어가 됐고 단어는 글자가 됐다.

이윽고 자음과 모음도 조합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


[‘혈족’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루드헬’의 권속입니다. 루드헬의 의지가 당신의 몸을 제어합니다.]


두 가지 메시지와 함께 의식이 완전히 침잠했다.

공연이 끝나버린 무대처럼 공허하고 어둠만이 가득한 세계.

그렇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얼마나 방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초인지, 1분인지 혹은 10년인지.

시간의 흐름 따위는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차유라는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잊었다.

아니, 잊을 뻔했다.


‘······냄새.’


코끝을 감도는 끔찍하게 역겨운 향기가 온몸을 송두리째 뒤흔든 건 그때였다.

터무니없게도 모든 감각이 차단되고 생각마저 멈췄던 자리로 오직 후각만은 선명했다.

차유라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생각이 활로를 찾고 있었다.


‘으음······.’


[‘페로몬’에 중독되었습니다.]

[사용자 ‘한지혁’과 의식을 동조합니다.]


어둡던 시야가 환하게 밀려나가고 차유라는 변화하는 풍경 너머를 바라봤다.

우선, 그곳은 지옥이었다.


쿠우우우웅!


폭음과 함께 가까운 건물 한 채가 폭삭 내려앉았다.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쌓아버린 도심.

비탄에 빠진 표정의 헌터들과 그 대척점에 선 거대한 괴물이 보였다.


-크아아악!


쏟아지는 핏방울이 곧 인간의 살을 파먹는 끔찍한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차유라는 최선두에 선 한 여자를 발견했다.


“넌, 날······ 막을 수 없어.”


정면에서 밀려오는 피의 해일도, 사방에서 아귀처럼 달려드는 피의 병사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로 이루어진 창조차 그녀의 행보를 막을 수 없었다.

스스로를 불태워가며 억압하는 모든 걸 저항하는 유일무이하고 독보적인 존재.


“넌 오늘 여기서 죽을 테니까.”


천천히 고개를 든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차유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분명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찌 모르겠는가.

그녀는, 아니 저 사람은······.


‘이 얼굴은······.’


그렇게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는 차유라의 시야엔 익숙한 낯짝이 드리워졌다.


“······아저씨?”


동시에 종전까지 그녀가 저도 모르게 움직였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물 밀 듯이 떠올랐다.

루드헬의 권속이 되어 한지혁을 매몰차게 공격했던 장면들, 한지혁이 그녀에게 언급했던 말들.


-그런다고 내 피를 거역할 수 있을 줄 아느냐!


또한 루드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차유라의 온몸으로 무언가가 대쪽같이 일어났다.

그대로 차유라는 다시금 그녀를 제압하려는 끔찍한 통증에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생각을 이어주던 페로몬의 더러운 향기는 피로 하여금 하나씩 지워졌다.

겨우 고개를 치켜들었던 그녀의 자아가 얼핏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대로는 어찌될 지는 빤했다.


‘막아야 해.’


하지만 생각을 지워버리는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무얼 더 어찌할 수 있을까.

오답뿐인 시험지를 마주한 것처럼 차유라는 도통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아니······ 정답은 있다.’


눈을 빛낸 그녀는 새삼스레 한지혁의 한마디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야왕의 설산에서 보낸 한 달.

그로부터 배운 수많은 것 중에서도 특히 한지혁이 몇 번이나 강조한 게 있었다.


‘내 몸은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 관절, 근육, 신경······ 세포 하나까지 전부 느끼도록 노력했다.

어떤 순간이 들이닥치더라도 자기자신의 제어를 완벽히 해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방법은······.’


스치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종전에 보았던 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 그 장면, 그러니까 그 상황이 어떻게 되었던 건지.


‘왜 내가 거기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곳에서 펼쳤던 그 기술이라면 이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할 수 있어.’


짤막하게 잘려나가던 생각을 몇 번이나 잇고 의지를 더 크게 가공해냈다.

신념은 온몸을 뒤덮었고.


[스킬, ‘발화’의 특이점을 발견했습니다.]

[특성, ‘스스로를 불태우는 자’를 각성합니다.]

[스스로를 불태울수록 능력을 강화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불꽃이 되었다.


*


쿠콰카카카캉!


그를 향해 여지없이 쏘아지는 수많은 핏방울을 피해가며 한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계획이 실패한 게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루드헬의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크아아악!


상체가 전보다 크게 부풀었고 근육질로 이루어진 몸통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은 찢어지고 바지만이 어설프게 남은 형상.

녀석의 등에서 자라난 박쥐의 날개가 폭풍을 일으켰다.

루드헬의 히든 페이즈.


‘하여간 누가 누드헬 아니랄까봐······.’


원래 혈귀(血鬼)에 불과한 박쥐 괴물이 간만에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생김새는 늑대 인간에 박쥐 날개를 달아놓은 것처럼 참으로 기묘했다.

미간을 구긴 한지혁이 외쳤다.


“아직 멀었어?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아뇨! 이제 됐어요!”


이윽고 차유라가 정면으로 나서자 허공의 핏방울은 더는 장애가 되질 못했다.

다가서기도 전에 모조리 증발!

루드헬이 제아무리 피를 쏟아내도 전부 무용지물로 만들만큼 강렬한 열기였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했다.


“······저 마력이!”


안 그래도 쥐뿔같은 마력을 보유했던 그녀에겐 너무나도 과한 기술이란 것이다.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특성, ‘스스로를 불타우는 자’는 꽤나 위험한 기술이다.

당장은 마력이 몸을 보호한다지만 그 마력이 전부 닳아 없어진다면 어떨까.


‘불에 타죽는 건 차유라가 될 거다.’


실제로 미래의 차유라조차 이 기술을 다루느라 온몸에 크고 작은 화상이 가득했다.


“괜찮아. 한 방이면 되니까.”


한지혁은 주변의 피를 모조리 빨아들여 스스로의 신체를 강화하는 루드헬을 노려봤다.

녀석이 히든 페이즈를 왜 꺼냈겠는가.

그만큼 녀석도 차유라의 불꽃을 위험하다고 느낀다는 방증이었다.

애초에 오로라도 없이 튀어나온 대가인지, 녀석은 이전의 강함을 가지질 못했으니까.

놈도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그럼 시작해보자고.”


차유라와 시선을 맞춘 한지혁은 포효하는 루드헬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여유를 줘선 안 돼.’


루드헬의 간격으로 파고들며 검은 사선으로 그었다.

핏발이 우뚝 선 녀석의 팔이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한지혁은 멈추지 않았다.

튕겨져 나간 것과 동시에 몸을 회전시켜 녀석의 하단을 노렸다.


스거어억!


용케 베어낸 살갗에서 진득하게 피가 튀었다.


-나는 루드헬이다!


상처에서 튀어나온 피가 송곳처럼 자라나 한지혁의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다.

그럼에도 한지혁은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오른팔이 망가졌으면 왼팔을 사용하면 된다.

아일로이가 말했다.


-설령 팔이 잘려나가더라도 무릇 검사는 검을 놓아선 안 되는 일이니라!

‘······넌 이 상황에서도 잔소리를.’

-집중하거라!


까드드득!


한지혁은 쏟아지는 피의 세례를 안간힘을 다해서 베어냈다.

제아무리 본연의 힘을 다루지 못하는 루드헬이라고는 하나······.

녀석은 명백한 세 번째 재앙!

확실히 도끼조차 다루지 못하던 파울로나 페로몬이 막힌 로툰 따위와는 비교조차 안 된다.

루드헬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강자였다.

눈동자까지 새빨갛게 물든 녀석이 한지혁을 향해 말했다.


-놀이는 끝이다!


하지만.


‘나 또한 예전의 무지렁이가 아니다.’


오늘을 만들기 위해서 단련해온 1년 남짓의 시간.

아니, 오늘을 위해서 숨죽여 버텨온 10년의 세월.


‘이 자리가 내 삶의 끝이라 해도.’


최선을 다해서 싸우리라.


“스으으으읍.”


길게 숨을 들이마신 한지혁은 창졸간에 루드헬의 정면에 다다를 수 있었다.


[특성, ‘숨을 죽이는 자’를 발동합니다.]

[숨을 죽이는 동안 시간을 느리게 인식합니다.]


그가 천천히 숨을 죽이자 세상은 늘 그렇듯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심장의 박동소리, 허공을 선회하는 피의 흐름, 불꽃을 고조시키는 차유라의 움직임······.

순간을 눈에 담은 한지혁은 전신의 마력을 오로지 한 점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한 번의 휘두름은 만 번의 휘두름과 같으니.’


거짓말 같이 한지혁의 검에 은은하게 피어오르던 마력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범인(凡人)이 보기엔 전혀 위협적이지도 않아 너무나도 무뎌 보이는 칼날이었다.


‘만 개의 갈래는 한 개의 길로 이어진다.’


단순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떨려왔다.

온몸의 근육을 쥐어짠 움직임에 신경이 하나하나 비명을 질렀다.

이는, 인간의 육체로는 섣불리 내딛어선 안 될 경지로 발을 디뎌버린 자의 무게.


‘내가 검이요.’


순간이지만 이쪽을 노려보는 루드헬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주제에 그곳에선 잔 떨림이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짐승의 본능적인 반응 속도였다.


‘······곧 길이니.’


그렇게 휘두른 칼날 끝으로 서서히 무언가가 갈려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공기, 열기, 피······.

아니 그 어떤 것도 당장 한지혁의 칼날에 닿으면 속수무책으로 베일 것이다.

이는 정해져 있는 일이다.


‘이 세상에 베지 못할 건 없다.’


읊조린 한마디 뒤로 한지혁의 검은 섬전 같이 휘둘러졌다.

루드헬의 가슴에 대고 그은 단 한 줄의 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어진 선 위로 벌름벌름 피가 새어나왔다.


칠성검(七星劍).

일 초식─수평 가르기.


푸슈우우욱!


갈라진 루드헬의 상체가 허공을 날았고 세상은 원래의 흐름을 되찾았다.

루드헬이 비명을 터트렸다.


-크아아아악!


널브러진 루드헬의 상체는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지는 몸.


-이, 인간······ 대체 무슨 짓을!


이내 분노를 토해내며 다시금 의지를 세우니 피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하체에서 분수처럼 솟구친 피가 다시 상체를 엮어갔다.

피의 군주 루드헬은, 피가 존재하는 한 결코 죽지 않는 불사(不死)였다.

서서히 완성되어가는 신체는 앞으로 몇 초 후면 원상복구 될 것이다.


-감히, 내 몸을······ 이 나를!


한지혁이 최선을 다해 휘두른 일격은 놈을 잠깐 무너트리는 게 전부였다.


“······그거면 충분하지.”


호흡을 길게 내뱉은 한지혁은 부지불식간에 전장에 난입한 그녀를 보았다.

차유라는 활활 타오르기보다는 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불꽃을 움켜쥐고 있었다.

단순한 불꽃이 아니다.


‘홍염(紅焰)······.’


프로미넌스. 이른바 태양의 가장자리에 보이는 불꽃 모양의 가스를 칭하는 말.

태양의 흑점에서 집중적으로 솟구치는 거대한 불기둥을 뜻하는 말이었다.


‘진짜 태양열은 아니겠지만······.’


특성을 발현한 그녀의 불꽃은 이전에 쓸 때보다도 훨씬 더 태양열에 가까운 열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힘이라면······.


-그, 그만······ 그마아아아안!


비명을 내지르며 벌벌 떨고 있는 루드헬 따위는 쉽게 불태울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형태조차 남지 않겠지.


-그래. 화가 났더냐? 내가 다 사과하마. 아니, 너에겐 최고의 권위를 선물하겠다!


루드헬은 발악했다.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영원히 늙지 않으리라! 영원히 너는 아름다울······!

“영원히 네 종이 되겠지.”


루드헬의 말을 잘라먹은 차유라는 움켜쥔 홍염을 거두절미하고 바닥에 내려 꽂았다.


-후회할······!


투콰아아아앙!


그날 인천국제공항에서 구름까지 솟구치는 거대한 불기둥이 생겨났고.


[세 번째 재앙, ‘피의 군주 루드헬’을 처치했습니다.]


모든 헌터의 앞으로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작가의말

오늘도 감사합니다. 내일도 21시 25분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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