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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님의 서재입니다.

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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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연재수 :
287 회
조회수 :
295,329
추천수 :
14,095
글자수 :
1,877,846

작성
20.11.26 21:02
조회
822
추천
46
글자
11쪽

외전-Boy Meets Girl(5)

DUMMY

‘어설픈 도발이다.’


라이벌 관계라 알려져 있는 파빌리안과 그의 실력을 비교하는 투의 말로 평정을 흔들려는 허튼수작에 불과했다.

그가 검술의 기초조차 제대로 모르는, 부모 잘 골라잡아 태어났을 뿐인 황실 직계 소녀의 뭣도 모르는 소리 따위에 흔들릴 리 없었다. 저 말에 동요할 이유가 단 하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유논은 스스로에게 그리 말했다. 자명한 사실이었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그런데도 이유 모를 불쾌감에 말이 정제되지 않은 채 튀어나왔다.


“어디서 무엇을 듣고 제게 무엇을 이야기하시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비꼬는 억양이 담긴 말이었다. 황실 직계의 존귀하신 공주님 앞에서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유논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자마자 흥분한 기색을 감추고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예, 맞습니다. 파빌리안은 우수한 기사이자 검사가 맞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지요. 그 녀석이라면 저와 제일의 검사이자 스승의 자리를 놓고 다툴 법도 할 겁니다. 자격이 있죠.”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소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공주는 그가 파빌리안의 실력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모습이라도 기대했던 것일까. 스스로가 파빌리안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주장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직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파빌리안에게는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더군요. 안타깝게도 최고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기회는 저에게만 주어진 셈이지요. 말이 나와서 그런데, 그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녀석을 호위기사로 두셨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떼어놓고 홀로 움직이시는 건지 궁금하군요. 호위 대상이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녀석이 아닌데 말입니다.”

“······!”


이번에는 7공주가 반대로 움찔할 차례였다.

분명 비밀리에 차출한 호위기사이고, 지금까지 임무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의문일 것이다.


“그 녀석이 세상 경험이 부족한 편이기는 해도 호위 대상이 자기 몰래 인근을 돌아다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특이하군요.”


유논은 입술을 매만졌다.


“전통적인 은신 기술을 사용하셨다면 파빌리안이 몰랐을 리가 없을 테고, 마법이라기에는 마력 기감만큼은 제가 스트라우스보다도 뛰어난 편이라 자신하는데, 그런 저로서도 아무런 마력의 잔재도 느낄 수도 없군요. 도대체 무슨 수를 쓰신 겁니까? 아···.”


유논의 몸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마력의 갈래들이 허공에 번개처럼 가지를 뻗었다.

소드마스터의 그것보다도 조밀하고 예민한 기감의 망이 공주를 에워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칫하면 황실 직계에게 위협을 가하는 대역죄라 여겨질 수 있는 무례임에도 불구하고, 공주 또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여기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애초부터 없었던 것 마냥.


유논은 어딘가 먼 곳에 초점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애초에 이곳에 온 적조차 없으셨군요? 7공주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았군요.”


흠칫 놀라는 공주의 표정과 눈빛을 읽고 말을 고친다.


“아니, 그보다는 이곳과 다른 어딘가에 동시에 계신다고 보는 게 맞겠군요. 서로 다른 공간에 공존한다니, 일종의 분신과 비슷한 이치인가···이쪽의 공주 전하께 아무런 마나 반응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저쪽의 공주 전하께서 조금이나마 더 본래에 가까운 몸이시겠습니다.”


소녀의 눈이 별똥별처럼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추측에 불과할 뿐입니다.”


유논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공주님께서 보여주신 현상의 겉모습만을 대략 알아차렸을 뿐,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의 인과관계는 전혀 모르겠군요. 하나의 사람이 서로 다른 공간에 동시에 존재한다니, 마치 사고 실험 같군요. 공주님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명제 또한 성립하고, 저곳에 계신다는 명제 또한 성립하는 것을 보아···.”


소녀, 밤하늘과 같은 검은 머리에 별빛 눈을 지닌 7공주는 미간을 좁혔다.

눈앞의 사내가 하는 말의 절반가량은 다 못 알아들을 말들투성이였다. 아마 동방 대륙에서 왔다는 자답게 제 고향의 특이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볼 뿐이다.


“···이러니 파빌리안 녀석이 손도 못 쓰고 계속 당할 수밖에 없었겠군요. 어쩐지 항상 피곤해 보이더라니. 그게 여러 공간에 동시에 계시는 공주님을 쫓아다니느라 그런 것이었겠습니다. 참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그가 사용하는 언어문화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 중요한 것은, 그가 소녀의 능력을 꿰뚫어보았다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멈춰있던 가슴이 뛰었다.


‘인세의 태양이라는 황제 폐하조차 내 속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저 기사가···?’


하필이면 여기에서 저런 기사를 마주치다니. 그것도 알렌의 스승이라니. 이런 걸 두고 세간에서는 운명이라 부르던가.

공주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무엇을 인정하신다는 겁니까?”

“그대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최고의 검사가 맞았어. 스트라우스 경과 비교하는 것이 오히려 실례였겠구나.”


유논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은 아니다. 파빌리안 스트라우스와 그의 전력은 사실상 비등하다.


유논은 전술적인 지능과 마력을 다루는 능력에 있어서는 파빌리안보다 월등하지만, 파빌리안은 그 이상으로 천재적인 검의 감각을 지녔다.

파빌리안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7공주의 특이사항을 유논이 알아차린 것은 그저 그가 파빌리안보다 창의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검의 경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람 베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세상 만물에 대한 통찰력까지 함께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유논과 파빌리안 스트라우스의 검의 경지는 동일했다. 미세한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다양성의 문제이지 우열이라 불릴 만한 것은 아니다.


아마 둘이 진심으로 승부를 내고자 한다면 그 승부는 각자의 실력 그 자체보다는 그날 날씨가 어떠한가, 혹은 그날 컨디션이 어떠한가 따위의 외부적인 요인으로 갈리게 될 확률이 높았다.


‘폭우라도 내린다면 타고난 균형 감각이 우위에 있어 빗물 위에서도 곡예 하듯이 움직일 수 있는 파빌리안이 승기를 잡을 테고, 햇빛이 쨍쨍 내리비치면 태양광 아래에서의 체력 안배에 있어 더욱 경험이 많고 지능적인 내가 이길지도. 딱 그 정도 차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유논은 제 자신이 파빌리안 스트라우스에게 패하는 모습이 상상가지 않았다.

파빌리안은 분명 그의 라이벌이었지만, 일생을 바쳐 경쟁할 상대라는 느낌보다는 그나마 인정해 줄 만한 녀석이라는 느낌이었다.


대련에서 검을 겨루었을 시의 전적은 서로 비등했지만, 실전이라고 가정한다면 유논은 파빌리안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유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언뜻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소녀의 과감한 발언에도 굳이 부정하려 들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그저 아까까지만 해도 파빌리안과 그의 검술 실력을 비교하며 도발하던 공주가 갑자기 저런 칭찬을 하니 미심쩍게 느껴졌을 뿐이다.


“경계하지 마라. 순전히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으니. 그리고 내가 지닌 것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창한 능력 따위가 아니다. 그저···.”


말하는 소녀의 몸이 흐릿하게 보였다. 신체의 윤곽에 빛이 스며들어 반짝였다.

소녀가 반쯤은 허공에 걸친 듯한 몸으로 다가왔다. 금빛 눈의 잔상이 물기처럼 남았다.


“타고난 핏줄에서부터 이어진 족쇄. 그쯤이 정확할 것이다.”


공주가 산화하듯 흩어지며 빛나는 손으로 유논의 어깨를 짚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생생한 피부의 감촉에 유논은 문득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소녀가 공주 본신의 몇 퍼센트쯤 되는 존재일지 궁금증이 생겼다. 저 손은 본래의 손과 외형, 질감, 온도 그 모든 것이 동일할까.


“그러나 이제껏 바깥에 밝힌 적 없는 족쇄이기도 했지. 황실 밖에 알려지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족쇄이니까.”


과연. 유논은 7공주가 이제껏 황실 안에서만 생활하고 바깥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돈 적조차 없는 이유를 짐작했다.

공주가 지닌 것은 필시 황실 직계라면 누구나 지닌다는, 카라얀 황가에만 유전되는 특수능력이 분명했다.

그 중에서도 저만큼 가치가 높으면서도 위험한 특이한 능력을 지녔으니, 외부세계와 차단시키려 들었던 것이겠지.

현 황제는 의심이 많은 만큼 황실 직계 혈족들이 지닌 능력을 강박적으로 통제하는 인물이었다.

강력한 능력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소녀가 지닌 공간과 존재를 다루는 능력의 특성상, 그녀는 어쩌면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았을지도 모른다.

왜 이제 와서야 그 통제가 풀리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시에 비밀스러운 족쇄이기도 하지. 인세의 태양이라는 황제 폐하께서도 내 자질을 한 번 보자 알아차리지는 못하셨다. 아니, 내가 말씀드리지 않았다면 아예 눈치 채지 못하셨겠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태양의 현신이라 알려진 현 황제다.

제국 전역에 그에 대한 수많은 소문들이 퍼져있다. 한 걸음 만에 산과 강을 뛰어넘을 수 있고,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온갖 종류의 믿지 못할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그런 황제조차 몰랐던 것을 일개 기사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니 네가 최고의 검사이자 기사가 아닐 리 있겠더냐.”


소녀는 조금만 더 다가오면 맞닿을 법한 거리까지 얼굴을 내밀었다.

가까운 곳에서 마주친 눈에 호기심이 짙었다.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최고의 기사가 눈앞의 상대라면, 조금은 흥미를 가져도 될 법 하겠구나.”


차가운 무언가가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쪽.


유논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얼떨결에 고개를 들어 소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공주가 입술을 매만지며 웃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느낌이 나쁘지 않구나.”

“······.”

“그대는 어떠한가? 이 몸에게 흥미가 생기던가?”


유논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내일 이 시간에 또···.”


별빛 소녀는 그리 속삭이며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유논이 황급하게 그녀의 몸을 안아들었지만, 이미 허공의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신기루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유논은 잠시 넋을 놓고 허공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스승이 제국의 공주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본 제자 녀석이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스승님. 하하···.”

“웃지 마라.”

“넵.”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유논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헛웃음을 흘렸다.


작가의말

외전에서 로맨스를 쓰니 기분이 묘하네요.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제 몸의 연애세포를 깨우는 듯한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이 감각..!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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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흑색마나(5) +5 20.12.23 840 46 14쪽
101 흑색마나(4) +17 20.12.22 846 52 18쪽
100 흑색마나(3) +23 20.12.21 834 52 15쪽
99 흑색마나(2) +21 20.12.20 869 46 15쪽
98 흑색마나(1) +15 20.12.19 871 45 16쪽
97 불쾌한 골짜기(3) +15 20.12.18 834 45 17쪽
96 불쾌한 골짜기(2) +5 20.12.18 806 37 16쪽
95 불쾌한 골짜기(1) +22 20.12.13 846 4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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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4) +11 20.12.11 806 41 15쪽
92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3) +11 20.12.10 828 39 14쪽
91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2) +18 20.12.09 871 45 13쪽
90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1) +26 20.12.08 898 52 13쪽
89 외전-제국의 적(3) +23 20.12.05 847 51 16쪽
88 외전-제국의 적(2) +16 20.12.04 847 46 12쪽
87 외전-제국의 적(1) +19 20.12.03 848 48 13쪽
86 외전-Boy Meets Girl(7) +12 20.12.02 817 42 13쪽
85 외전-Boy Meets Girl(6) +8 20.11.28 811 46 13쪽
» 외전-Boy Meets Girl(5) +11 20.11.26 823 46 11쪽
83 외전-Boy Meets Girl(4) +9 20.11.25 803 44 13쪽
82 외전-Boy Meets Girl(3) +13 20.11.21 824 42 14쪽
81 외전-Boy Meets Girl(2) +8 20.11.18 840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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