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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5 님의 서재입니다.

비밀요원의 학교생활기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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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5
작품등록일 :
2020.09.15 03:59
최근연재일 :
2021.05.14 11:00
연재수 :
1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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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88
추천수 :
470
글자수 :
1,040,715

작성
21.01.2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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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109화] 비밀 (10)

DUMMY

******



“······.”


“······.”

「······.」


어제처럼 에릭은 침대에, 세라는 바닥에 깔린 이불에 누운 채,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방금 전의 포옹의 여파이리라.


둘 사이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색하면서도 미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애초에 세라는 말 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평소와 달리 눈에 띄게 이상한 것은 에릭 쪽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아마, 두 사람 다 비슷한 기분이라는 것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고요한 공기 속에 두 사람의 미약한 숨소리만이 불규칙적으로 교차했다.


에릭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속에 후회가 맴돌았다.


세라에게 의지하지 않기로 결심한 바로 다음날인데, 저런 추태를 보여 버리다니.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을 텐데.


어째서 오늘··· 무너져버린 걸까.


뺨에 닿던 세라의 손에서 느껴지는 상냥함.


포옹했을 때 전해지던 따스한 체온.


그 온기가 잊히지 않아서.


그때의 자신의 빨리진 심박수가 한편으로는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서.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섞여,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에릭.」


그때, 머릿속에 울린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되돌렸다.


괜한 잡음이 먼저 나가지 않도록 조용히 숨을 한 번 가다듬고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

「아까··· 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에릭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러나 시간을 너무 끌어도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에릭은 무심코 전부터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을 꺼냈다.


“그, 우리 관계에 대해서 말인데.”


내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지금으로써는 가장 건드리면 위험한 주제였는데.


“······.”

「저희의 관계··· 말입니까?」


에라, 모르겠다.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릭은 필사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응. 우리 관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

「···달리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세라의 어조는 평소와 변함이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그늘이 드리운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에릭은 그렇게 느꼈다.


뒤늦게 그 말뜻을 이해한 에릭은 당황해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며 내뱉었다.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그, 뭐냐···.”


“······.”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세라는 이미 반쯤 체념한 태도였다.


그런 세라의 저자세에, 에릭의 마음 한편이 괜스레 욱신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내 말은, 언제까지나 이렇게 애매한 관계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는 말이었어.”


“······.”

「앞에 한 말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됩니다만.」


“뭐··· 굳이 따지자면 같은 의미이긴 한데···. 우리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아직까지는 별로 상관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예를 들어 파견 임무로 사회에 나와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든지, 혹은 각자의 가정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어디까지나 예를 드는 거지만···.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도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런 애매한 관계로 남아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너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에릭은 말을 맺고 나서 세라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유감이게도 어두워서 세라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세라는 미동 없이 누운 채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

「···저는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릴 생각은 없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 마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에릭에게 가정이 생겼을 때 에릭이 원한다면 저는 에릭의 눈에 띄지 않게 사라져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까?」


세라는 진심으로 물어오는 것 같았다.


에릭은 곤란한 듯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작아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행동하려면 우리가 그에 걸맞은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뜻이야. 누가 우리보고 무슨 사이냐고 물어봤을 때 언제까지고 ‘동료’ 라고 대답하는 것도 뭔가 이상하잖아.”


“······.”

「···그 말은···.」


“네가 네 의지로 나를 떠나지 않겠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나도 널 떠나보낼 생각은 없고.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도 같이 있으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잖아.”


“······.”

「결혼··· 말입니까?」


그 말이 세라의 입으로부터 먼저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에릭은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 간신히 대답했다.


“······응.”


대답을 내뱉고 나서, 세라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괜한 말을 꺼내버린 걸까.


혼자서 너무 앞서나간 건 아닐까.


하지만, 지금 에릭과 세라의 상황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그것 하나밖에···.


“······.”

「···그건, 안 됩니다.」


“어?”


예상치 못한 단호한 거절에, 에릭의 움직임이 굳어졌다.


방금까지 천장을 본 채로 누워있던 세라가 어느새 에릭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누워 있었다.


“······.”

「고작 그런 이유로, 에릭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거운 짐이 아냐. 난 정말 진지하게···.”


“······.”

「에릭은.」


에릭이 말하는 도중, 세라가 억지로 말을 끊었다.


드문 일이었다.


지금까지 세라가 에릭의 말을 도중에 끊은 것은 그녀가 에릭에게 화가 단단히 났을 때 뿐이었다.


에릭이 말을 멈추고 있는 동안, 세라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절대 착각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차갑게.


내뱉었다.


“······.”

「에릭은, 저를 사랑하십니까?」


“뭐······?”


“······.”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저를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그것은, 설렘이 가득한ㅡ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는 고백 같은 것은 아니고.


마치 이미 밝혀진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취조를 하는 것 같은 딱딱한 물음이었다.


그 차가운 말투의 이면에 깔린 전제는 부정이었다.


“······그건.”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에릭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질문이 비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에릭이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빈말을 내뱉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다 그녀를 생각해서 말해오는 것이라는 사실도.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런 비겁한 수단까지 사용하지 않으면 그는 절대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에릭의 말대로, 앞으로의 그들의 관계에 있어 앙금이 남지 않도록.


그녀는 마음과 정반대되는 모진 말들을 내뱉었다.


“······.”

「그렇게 어중간한 태도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상당히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미안. 내가 경솔했어. 사과할게.”


“······.”

「······.」


“미안해. 정말로. 네 기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이렇게 분위기도 없이 가볍게 막 던지다니,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에릭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라는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사실은 거짓말이라고.


너무도 기쁘다고.


에릭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응석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전부 허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설령 이 관계가 부서져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더는 에릭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에릭에게, 그런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어줄 수는 없다.


그것이, 그녀가 지켜야 할 최후의 선.


절대 넘지 말아야 할···.


보이지 않는 벽.


그리고··· 그녀가 처음부터 정해두었던, 이 관계의 끝.


멈춰있던 공기는 에릭이 목소리를 냄으로써 다시 움직인다.


“피곤할 텐데 괜한 이야기를 꺼냈네···. 미안해, 진짜로. 네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

「······.」


“···잘 자, 세라.”


에릭이 애써 태연한 척 건네는 인사를 침묵으로 받으며, 그녀는 에릭으로부터 등을 보이고 돌아 누운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에릭에게 보이지 않게, 찢어질 듯 아파오는 자신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꼭 억누른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 없이 감정을 삭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감정을 억지로 끄집어내져,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 본인의 손으로 직접 확인사살을 해야만 했다.


언질을 내뱉어버린 이상, 이제 꼼짝없이 그 말대로 되는 미래밖에 남지 않았다.


만에 하나, 라는 일말의 희망조차 이제는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괜한 화풀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런 말을 꺼낸 에릭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더욱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대답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그 날은 결국 잠이 들 수 없었다.


에릭도.


세라도.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스러져가는 달빛만이, 밤이 깊어가는 것을 알렸다.



****** (8/5, WED)



“······.”


다음날.


아무도 없는 임시 동물보호소에 나온 에릭은, 영혼 없는 동작으로 고양이들에게 밥을 따라주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세라는 이미 방에 없었다.


먼저 일어나 자기 방으로 돌아간 것이리라.


세라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후회됐다.


어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대로의 애매한 관계라도, 계속 지속되었더라면.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상실감은···. 이제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후우······.”


마지막 고양이의 사료를 따라주고 난 뒤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을 때였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뒤편에 서 있던 한 남자를 보고 에릭은 움직임을 멈췄다.


“실례합니다. 혹시 에릭 군인가요?”


정중한 말투, 부드러운 목소리.


정갈한 검은색 정장과 잘 정돈된 헤어스타일.


품위가 느껴지는 40대 정도의 중년 남성이, 에릭에게 말을 걸었다.


“···네. 맞는데요.”


에릭이 경계를 풀지 않고 대답하자, 상대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유리 아가씨의 아버지인 한태성 회장님의 비서 겸 운전기사를 맡고 있는 이종혁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이 비서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에릭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제 유리의 아버지가 탄 검은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던 그 남자였다.


“여긴 무슨 일로?”


에릭의 물음에 이 비서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곧 정장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들어 내밀었다.


곱게 접힌 흰색 종이였다.


“유리 아가씨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아가씨의 핸드폰은 어제 회장님께 압수를 당하셔서요. 오늘 아침에 이 편지를 에릭 군에게 전해달라고 몰래 부탁하셨습니다.”


“······.”


에릭은 말없이 이 비서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두 번 접혀있는 종이를 펼쳐보니, 유리의 반듯한 글씨가 한 면 빼곡히 적혀있었다.



----------------------------------



에릭에게.


안녕하세요, 에릭.


집에 가자마자 곧바로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께 핸드폰이 압수당하는 바람에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어제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요.


사실 고양이들을 돌보는 것은 아버지께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식으로 들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저희 아버지께서 조금 고지식한 분이셔서요.


아버지께서는 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칠성그룹의 회장이 되길 원하세요.


물론 저도 그럴 생각이고요.


아무래도 제가 잠시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역시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답니다.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마지막으로 에릭에게 하나만 부탁드릴게요.


지금 우리에 들어있는 고양이들을 모두 주위 풀숲에 풀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임시 보호소 뒷정리는 이 비서님이 도와주실 거예요.


제가 시간이 된다면 직접 가서 마무리 하고 싶지만, 유감이게도 내일 모레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거든요.


출국 준비 때문에 여러 가지로 바빠서 여유가 나지를 않네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는 것 같아 미안해요.


그동안 즐거웠어요, 에릭.


그리고 고마웠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요.


안녕.



----------------------------------




유리다운 정중한 문장이었다.


말투는, 그랬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기적이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불친절하고, 불쾌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가.


에릭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도로 접고는, 이 비서라고 자칭한 남성을 보며 물었다.


“유리는 지금 어딨습니까?”


“자택에 계십니다.”


“자택 주소가 어떻게 되죠?”


“···일단 진정하세요, 에릭 군. 어차피 지금 가도 유리 아가씨는 만나주지 않으실 겁니다.”


“······.”


“그리고 저도 에릭 군과 잠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조금만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요?”


에릭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러죠.”


“고마워요.”


이 비서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에릭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확히는 고양이들이 있는 우리 쪽으로.


이 비서가 다가오자 고양이들이 반기듯이 그르렁댔다.


그는 익숙한 움직임으로 철창 너머 고양이들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지켜보던 에릭은 툭 내뱉었다.


“고양이를 좋아하시나보군요.”


“네, 뭐···. 보통 사람 정도로는요.”


“······.”


아니.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더, 고양이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


에릭은 한 눈에 보고 알 수 있었다.


그윽이 고양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유리의 눈과 닮아있었으니까.


얼마 전까지도 늘 보던 유리의 모습이 이 비서에게 겹쳐보였다.


“에릭 군.”


부드러운 목소리에 에릭은 이 비서를 쳐다보았다.


“유리 아가씨는 아마 말하지 않았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리 아가씨의 고양이 포획을 돕고 있던 건 저였습니다.”


“아저씨가···?”


조금 의외였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하긴, 그 무거운 철제 케이지를 유리 혼자서 매일 들고 다닌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어쩌면 조력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 아저씨였던 모양이다.


“네. 2년 전쯤에, 유리 아가씨가 부탁을 해오셨거든요. 길고양이 잡는 것을 도와달라고. 물론 회장님께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죠. 그때 당시에는 업무 관련으로 한창 정신이 없던 시기인 데다가 괜히 회장님께 발각되면 상당히 곤란해질 테니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속으로 불평하던 저였지만··· 진심으로 고양이들을 돌보는 유리 아가씨의 모습을 계속 보다 보니 어느 샌가 저도 이 고양이들에게 애정을 품게 되더라고요. 참 신기한 일이죠? 그때까지만 해도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저였는데···.”


“······.”


“어제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역시 회장님께서도 최근 계속 늦게 귀가하는 유리 아가씨의 행동을 보시고는 뭔가 수상하다고 눈치를 채신 것 같아요.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뭐, 비서라면 윗사람이 까라면 까야 하니까요.”


“하하,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상당히 가시가 있는 말이군요.”


이 비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유리 아가씨는 정말이지 상냥한 분입니다. 늘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항상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죠. 너무도 어른스러워서 주위 사람들은 다들 감탄하곤 해요.”


“그건··· 뭐.”


“저도 처음에는 아가씨가 욕심도 없고 마냥 어른스러운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당시 8살이었던 유리 아가씨를 보며, 어떻게 이렇게 빈틈없고 착실한 아이가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처음 몇 개월 동안은, 말이죠. 라고 이 비서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거의 10년을 넘게 쭉 지켜보다 보니 왠지 모르게 알게 되었어요. 아가씨는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참고 있었던 겁니다.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한 채, 주위 사람들에게도 진짜 속마음을 절대 드러내지 않고 필사적으로 꾹 억누르고 있어요. 그렇게 행동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쭉, 주위로부터 강요받았으니까. 어쩔 수 없이 아직까지도 착한 아이를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에릭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건··· 저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유리가 늘 본심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유리의 표정이나 눈빛을 보고 있으면 안다.


에릭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늘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차마 다 감출 수 없이 새어나오는 감정을.


한없이 공허하고도 쓸쓸한, 에릭 자신이 과거에 품었던 것과 너무도 비슷한 그 감정을.


“하하··· 역시 그랬나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마음 한편으로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 분이 아니거든요. 아무리 사소한 부탁이라 할지라도. 아마 아가씨는 에릭 군을 진심으로 신용하고 있었던 거겠죠.”


···그건 조금 다른 종류라고 생각하는데.


에릭은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저는 유리 아가씨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걸 바란다는 게 주제넘은 행동이란 걸 알지만, 저 또한 유리 아가씨 또래 딸내미의 아빠 되는 입장으로서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한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으로서 유리 아가씨가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바라지 않아요.”


“그럼 이 비서님이 유리에게 그렇게 전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이 비서는 곤란한 웃음을 보였다.


“전에 유리 아가씨께 넌지시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장래 희망이 회장님의 뒤를 잇는 것이냐고. 하지만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역시 아빠뻘의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유리 아가씨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더군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어른스러운 태도로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셨죠.”


“제가 말해도 똑같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 비서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사실 이것까지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제가 회장님의 비서가 된 이래로 유리 아가씨가 지금까지 누군가와 사적으로 이렇게 교류를 나누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유리 아가씨는 겉으로는 사교성이 좋고 팔방미인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학교에 갈 때나 회장님의 업무 차원으로 어딘가에 인사를 드리러 갈 때 빼고는 늘 혼자 계세요. 그때 아주 잠깐씩 드러나는 유리 아가씨의 표정은 아마 직접 본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믿을 수 없을 거예요. 한없이 고독하고, 한없이 외로운. 너무나도 쓸쓸한 얼굴이었습니다.”


“······.”


“그래서 에릭 군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거예요. 아마 이대로 유리 아가씨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 유리 아가씨는 끝까지 달라지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에릭은 생각했다.


자신이 유리의 인생에 개입할 필요가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그럴 동기가 있는가.


사실은, 없다.


그 무엇도.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에릭이 유리의 인생에 관여할 여지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무시해버리면 된다.


그래도 에릭이 살아가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을 테니까.


···만약, 에릭이 그녀를 몰랐더라면.


알아버렸다.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유리가 사실은 다른 평범한 여자애들처럼 애교가 많은 소녀라는 것을.


마냥 어른스러워 보이는 그녀가 사실은 아직도 애들처럼 고양이를 좋아하는 순수한 여자애라는 것을.


돌보는 고양이들을 쳐다볼 때 그녀가 짓던 진심어린 미소를.


늘 가식적인 미소만 지을 것 같았던 그녀가 그녀의 비밀이 아버지에게 들켰을 때 짓던 그 절망적인 표정을.


에릭은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다.


그녀가 절망에 빠져있는 모습을, 못 본 체 할 수 없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힘이 되어주고 싶다.


복잡한 이유는 필요 없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할 뿐.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역시, 자택 주소를 좀 알아야겠는데요.”


세라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유감이게도 지금은 세라에게 그런 부탁을 할 처지가 아니다.


어떻게든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유리 아가씨의 자택은 2중 경비 시스템으로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밖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건 곤란하네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누가 열어주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에릭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 비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 비서는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며 뺨을 긁적이다가,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은 회장님께서 저녁까지 회사에 남아계시는 날이라 지금 자택에는 유리 아가씨와 가정부 아주머니밖에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문만 열어주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에릭 군을 믿겠습니다. 부디 유리 아가씨를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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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124화] 진실 (12) +2 21.03.23 32 2 26쪽
123 [123화] 진실 (11) +2 21.03.19 42 2 16쪽
122 [122화] 진실 (10) +2 21.03.16 63 2 21쪽
121 [121화] 진실 (9) +2 21.03.12 32 2 15쪽
120 [120화] 진실 (8) +2 21.03.09 40 2 18쪽
119 [119화] 진실 (7) +1 21.03.05 34 1 17쪽
118 [118화] 진실 (6) +2 21.03.02 33 1 19쪽
117 [117화] 진실 (5) +2 21.02.26 36 2 18쪽
116 [116화] 진실 (4) +1 21.02.23 59 1 15쪽
115 [115화] 진실 (3) +2 21.02.19 30 3 20쪽
114 [114화] 진실 (2) +2 21.02.16 41 3 19쪽
113 [113화] 진실 (1) +2 21.02.12 44 2 18쪽
112 [112화] 등하불명(燈下不明) +2 21.01.27 66 2 10쪽
111 [111화] 비밀 (12完) +4 21.01.26 85 3 24쪽
110 [110화] 비밀 (11) +2 21.01.25 84 1 19쪽
» [109화] 비밀 (10) +2 21.01.24 62 2 23쪽
108 [108화] 비밀 (9) +2 21.01.23 49 3 17쪽
107 [107화] 비밀 (8) +2 21.01.22 57 2 16쪽
106 [106화] 비밀 (7) +1 21.01.21 47 1 18쪽
105 [105화] 비밀 (6) +2 21.01.20 44 2 19쪽
104 [104화] 비밀 (5) +2 21.01.19 43 1 18쪽
103 [103화] 비밀 (4) +2 21.01.18 42 3 19쪽
102 [102화] 비밀 (3) +1 21.01.17 41 3 15쪽
101 [101화] 비밀 (2) +2 21.01.16 42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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