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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의 모두가 원하는 세상

효자무신록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다원.
작품등록일 :
2024.06.02 22:08
최근연재일 :
2024.06.25 19:00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31,526
추천수 :
1,105
글자수 :
164,546

작성
24.06.02 22:14
조회
1,648
추천
41
글자
13쪽

효자무신록-살자

DUMMY

살자




선우상은 고개를 돌려 도하예의 시신이 남아있는 곳을 보았다.

젊었을 적에 아기가 병에 걸려 죽은 뒤로 아직 걷지 못하는 아기를 훔쳐 제 아기처럼 돌보다가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때려죽인 탓에 그 악명이 자자했다.

이 아기도 아마 도하예가 훔친 아기가 분명했다.

선우상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에 소리를 내서 자신의 품에 안긴 아기. 자신이 생을 마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곳에서 자신이 죽으면 이 아기도 죽는다.

채 걷지도 못하고 죽었던 아들 휘가 떠오른 순간에 만난 또래의 아기.


선우상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떠올릴 때 들린 울음소리. 선우상은 고개를 숙여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아직도 선우상의 손가락을 잡은 채 베시시 웃고 있었다.


“그래. 살자.”


선우상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기를 따라 웃어 주었다. 삼십 년간 웃어보지 않아서 어색했지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같이 살자.”


죽지 않고 살기로 했으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단전을 폐하고 광혈마공을 버려야 했다. 아직 의식이 남아있을 때 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을 알았다.


선우상이 오른손으로 품에서 비수를 꺼내 단전을 향해 찔렀다. 비수가 기해혈에 닿아 파고 들어가는 찰나에 손이 우뚝 멈췄다.


선우상의 손등 위로 붉은 핏줄이 잔뜩 일어나 있었고, 비수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선우상의 오른쪽 눈이 붉게 물들었고, 비수가 천천히 뽑혀 나왔다. 비수를 오른쪽 눈앞으로 가져와 이리저리 돌려본 선우상의 입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력을 움직이지 않으면 날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선우상은 왼손으로 안고 있던 아기를 내려놓고는 그 아기를 등졌다.


광혈마공의 성취가 깊어지면서 깨어난 광마혼(狂魔魂)을 죽이기 위해 내력도 움직이지 않고 단전을 폐하려던 계획이 실패했다.

무공을 펼치지 않으면 깨어나지 않던 광마혼이 스스로 깨어났다.


“이제 네 몸은 나의 것이다.”


광마혼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의식을 빼앗기고 자신은 광마혼에게 몸을 빼앗긴 채 끝없는 혈겁을 일으키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안 돼!”


선우상의 외침에 뒤를 이어 광마혼이 그의 입을 빌려 답했다.


“너도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그러면서도 넌 나를 깨우는데 주저하지 않았지.”


광마혼이 낮게 웃었다.


“모두 잊어라. 광기와 하나가 되어라. 너의 복수는 내가 이뤄주겠다.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면 모두 죽이면 그만이니.”


천하의 모든 이들을 죽이겠다는 광마혼의 말에 선우상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광마혼은 이미 선우상의 의식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대로 의식을 잃고 광마혼의 광기에 몸을 맡기면 정말 복수가 이뤄지지 않을까? 라는 마음이 떠오를 때 뒤에서 아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가장 먼저 목숨을 잃는 것은 저 아기였다.


자신이 복수를 포기하고 살고자 했던, 살리고 싶었던 아기를 제 손으로 죽일 판이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손 뿐. 이미 다른 곳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자진이라도 해야 할 판이라 왼손을 들어 올렸지만, 내력이라고는 한점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광마혼이 모든 내력을 통제하고 있었다.


“크흐흐. 뭐하는 거냐?”


광마혼이 선우상의 행동을 비웃었다. 그러나 지금 선우상은 왼손의 소맷자락이 흘러내리며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두 눈에 담고 있었다.


그걸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강북칠흉의 삼흉과 오흉이 사파의 고수 삼백을 끌어모아 함정을 팠었다.

선우상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고, 처음으로 광마혼이 깨어났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삼흉과 오흉은 물론이고 그곳에 모인 사파의 고수 삼백 명 모두가 죽어 있었다.


시체는 산처럼 쌓였고, 흘러내린 피는 바다를 이루었다(屍山血海).


지독하리만치 끔찍한 참상은 그를 무림공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광혈마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강호에 단 아홉 명뿐이던 구존(九尊)이 십존(十尊)이 되었던 혈사였다.


정신을 차린 선우상은 피투성이 몸으로 하염없이 걷다가 강을 만났다.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터로 향하던 중 만난 노승이 있었다. 새하얗게 기른 백미와 백염이 인상적이었던 노승은 피투성이인 그를 보고는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나룻배가 나룻터에 도착했을 때 사공은 선우상을 보고 겁에 질렸다. 선우상은 그 모습에 노승에게 먼저 강을 건너라 하고는 나룻터에 대자로 누웠다.

석양이 지며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노승이 그의 시야에 불쑥 끼어들었다.

빛이 바랜 법복을 걸치고 있던 노승은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빼서 그의 가슴에 올려줬다.


‘언젠가 시주에게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작은 도움이 되길. 아미타불.’


조용히 불호를 외우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노승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우상은 염주를 왼쪽 손목에 끼웠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죽은 아내 한설화가 항상 손목에 염주를 차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빼서 차고 다니던 것이 이번 전투에서 사라졌다.

광마혼이 깨어나며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였고, 시산혈해의 현장에서 염주를 찾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손목에 찼던 염주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그 염주가 왜 이리 눈에 들어오는 걸까?


노승이 말한 선택의 순간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 몸은 광마혼에게 빼앗길 것이고, 그 뒤에 자신에게는 선택이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 염주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미타불.”


불호를 외웠지만,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광마혼이 그의 입을 빌어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 크하하하하. 아하하하하. 염주를 보고 불호를 외면 내가 사라지기라도 할 줄 알았더냐?”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자신의 입으로 시원하게 웃어 젖히는 광마혼이었지만, 선우상은 답답한 마음만 가득했다. 왼쪽 팔뚝까지 붉은 핏줄이 일어나는 것을 본 선우상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염주를 물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잡아 뜯었다.


염주를 이어주던 줄이 끊어지고 주자(珠子)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다.


열여덟 개의 주자가 바닥을 구를 때 광마혼이 이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너의 마지막은 내가 기억해주마.”


광마혼이 비웃을 때 선우상은 바닥을 구르는 주자가 특정한 자리에 잡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홉 개의 주자가 밖을, 그리고 나머지 주자가 안쪽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는 폭발적인 기운이 솟구쳤다.


장엄하고도 무량해 보이는 기운이었다. 보는 순간 그것이 법력(法力)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무림에서 보아온 것들과는 그 결이 다른 힘이라 직접 마주한 적은 한 번도 없던 힘이었다.


“응?”


갑자기 주위에서 솟구친 법력을 보고 광마혼이 의아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주위를 휘감은 법력이 서로 얽히더니 곧 그를 온전히 휘감았다.

그걸 본 광마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냄새. 너 금강혼(金剛魂)을 만났구나!”


금강혼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주위를 휘감은 법력이 몸을 고정했다. 그리고 열여덟 개의 주자가 허공에 떠오르는가 싶더니 선우상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처음에 날아든 여섯 개의 주자가 그의 백회혈에 꽂히더니 원을 그리며 백회혈을 열어젖혔다. 백회혈이 열리자 그 뒤로 열두 개의 주자가 차례로 날아들었다.

보기에는 그저 단단한 목재 염주인 것 같았으나 경맥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니 이것은 단순한 염주가 아니었다. 마치 내력을 단단하게 굳힌 것만 같은 물건이었다.

그것들이 열린 백회혈을 타고 들어와 선우상의 경맥을 치달렸다.

그렇게 뻗어온 기운에 광마혼이 적극적으로 맞섰다. 당연히 경맥이 찢기고 갈려나갔다.


“쿨럭!”


끔찍한 고통과 함께 핏물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붙들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못 한 채 실시간으로 경맥이 찢겨 나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몸을 차지하던 광마혼은 염주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밀리고, 또 밀렸다.

그렇게 기해혈까지 밀린 광마혼에게 여섯 개의 주자가 날아들었다.


기해혈 안에서 광마혼이 미친 듯 발악했다. 기해혈이 찢기고 터져 나가며 지금까지 쌓았던 내력이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지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자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광마혼은 끝없이 발악했지만, 끝내 제압당했다.


여섯 개의 주자가 목과 양쪽 팔과 다리 그리고 그의 가슴에 꽂혔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우상은 그렇게 느꼈다.


내력이 모두 흩어졌고, 광마혼까지 제압당한 이후에야 몸을 감싸고 있던 경력이 흩어졌다. 그제야 선우상은 바닥에 엎어질 수 있었다.


무인에게 있어 단전의 내력이 흩어지는 고통은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죽는 것보다 더한 상실감을 느낀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느껴지는 고통은 더욱 끔찍했다.


염주에 깃든 법력과 광마혼이 싸우면서 경맥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흩어진 내력은 그의 내부를 망가트렸다.

살아남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이 살아남은 것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망가졌다.


“아바! 아바!”


바닥에 엎어져 있던 선우상은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자신이 이런 결심을 하게 했던 아기가 바닥에서 손을 들고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우상은 몸을 돌려 천천히 바닥을 기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라 끝없는 고통이 전해졌지만, 그 고통 덕분에 의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기어간 선우상이 얼굴을 보여주자 아기가 손을 움직여 그의 양뺨을 살짝 쥐었다.

그 손길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고통 속에 일그러지던 미간을 펴게 했다. 잠시 고통도 잊게 해주는 손길이었다.


선우상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지금 죽게 생겼지만, 이대로 두면 아기는 하루가 가기도 전에 아사(餓死)할 판이었다. 다만 경맥이 다 찢어지고, 단전을 폐한 지금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용케도 아기를 안고 일어날 수 있었다.


선우상은 흘끔 바닥에 떨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함께했던 애검이지만, 이제는 놓아줄 때였다.


복수를 내려놓고, 이 아기와 함께 살기로 했을 때 이미 손에서 놓았던 검.

바닥에 떨어진 검에서 시선을 거둔 선우상은 힘겹게 폐사찰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곧 한 방울 두 방울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우상은 피풍의 안으로 아기를 안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폐사찰에 도착하기 전 보았던 촌락을 떠올린 그의 걸음이 힘겹게 이어졌다.





하룻밤이 지나도록 장대비가 훑고 지나간 폐사찰의 불당 지붕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존재가 있었다.

검은 장포를 펄럭이며 내려선 사내의 눈은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외견상으로는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정도로 보였지만, 그 눈빛은 얼마나 긴 시간을 살아온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사내는 불당 지붕에 난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돌아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보고는 손을 뻗었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든 검을 받아든 사내가 검신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대충 바닥에 던지고는 주위를 살폈다.


“이상하군.”


반파된 불상과 이리저리 조각난 것을 보면 이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검을 휘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아래 흩어져 있는 도하예의 시신의 흔적을 보아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광마혼이 깨어났다면 이리 멀쩡할 리가 없을 텐데?”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선우상이 염주를 뜯어냈던 자리. 그곳에 선 사내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중얼거렸다.


“금강혼?”


사내는 나직하게 웃었고, 그 웃음소리에 불당의 벽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흐흐하하하하.”


나직한 웃음은 광소가 되었고, 벽에 금이 갔던 불당이 산산이 조각났다. 사방으로 터져 나간 불당이 있던 자리에 우뚝 선 사내가 한참을 웃다가 뚝 멈추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강혼.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목소리가 흩어지는 것과 함께 사내의 모습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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