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소설이 유독 우리나라에선 문학으로 대접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여러분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엄연한 문학의 한 갈래인 소설의 형식을 갖추었음에도 작가의 산고(産苦)를 통해 나온 창작물임에도 순수문학과는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허심탄회하게 제 생각을 이야기하고 또 장르소설을 쓰는 다른 분은 이 부분을 어찌 생각하는가를 궁금하게 여겨 이 글을 씁니다.
일단 소설이란 이름이 붙은 이상 분명히 문학이어야 할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계열의 소설에 문학이란 시선으로 접근하는 독자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소설은 소설인데 문학은 아니란 생각들을 하지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문학의 한 장르인 소설의 형식인데 문학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소설의 삼 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두루 훌륭하게 갖추었음에도 왜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나요?
제가 보기엔 가장 큰 요인이 작품성(作品性)의 결여라고 봅니다.
작품성이란 작품이 가지는 그 자체의 예술적 가치를 말함입니다.
대다수의 일반 독자가 장르소설에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봅니까?
절대 아닙니다.
일반 장르소설의 독자는 예술적 가치를 절대 따지지 않습니다.
예술적 가치를 따진다면 공공장소에서 장르소설을 보면서 부끄러워하거나 창피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지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권장할 것입니다.
권장 도서목록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리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장르소설에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것은 작품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술적 가치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나요?
'예술의 목적 또는 효과는 카타르시스에 있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명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예술의 목적은 인간 정서를 정화(淨化) 또는 순화(純化)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소설의 목적도 이와 비슷합니다.
소설의 목적은 흥미를 주고 교훈을 얻는 데 있다고 합니다.
즐거움(쾌락성) 속에서 가르침(교훈성)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 두 가지의 목적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표리(表裏)의 관계이기에 이것을 소설 속에 녹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장르문학이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가 바로 교훈적인 기능이 아예 없거나 흥미만을 위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일반 독자에게 장르문학과 소설의 목적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 영원한 합일점 없이 나란히 달려가는 철로와 같은 셈이죠.
장르소설의 작품성 문제는 이런 모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소설의 목적인 쾌락성과 교훈성 중에서 쾌락성만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이 쾌락성(흥미 위주)만을 주는 것이라면 도박이나 경마, 스포츠와 같은 다른 오락들과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겠습니까?
장르소설의 심각한 작품성 훼손은 소설의 본질 중 하나인 흥미를 추구하지만, 그 흥미가 도박이나 오락으로 얻을 수 있는 자기 망각에서 오는 즐거움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르소설의 쾌락성은 순수소설의 본질적인 목적 중 하나인 쾌락성과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문학작품의 쾌락성(흥미)이란 자아발견에서 오는 정서적 즐거움입니다.
이것을 미적 쾌락이라고도 하지요.
아름다움을 매개로 정서를 자극함으로써 얻어지는 쾌락이기 때문입니다.
장르소설의 쾌락이란 일반 오락인 도박, 경마, 스포츠와 같아 현실에서 도피하고 잠시 자기를 망각할 수 있어 한때 가볍게 즐기는 것으로 끝납니다.
단지, 돈이 적게 든다는 큰 이점은 있지요.
책을 덮으면 아무것도 아닌 까맣게 잊히는 딴 세상의 이야기지요.
바로 그 점이 장르소설이 가지는 한계가 되고 장르소설이 시장에서 점점 밀리며 고전하는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장르시장을 활성화하려면 현실 도피성 흥미만을 위주로 쓰는 소설은 지양(止揚)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독자가 원하니까 쓸 수밖에 없다고 작가는 변명할 수 있습니다.
작품성을 고려해서 써봐야 팔리지 않는데 무슨 이야기냐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한다면 독자보다는 글을 쓰는 작가가 먼저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이 부분만큼은 닭이 먼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흥미만을 위주로 한 소설을 쓰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자살행위와 똑같습니다.
흥미있는 글을 쓰되 그 흥미는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여 자아발견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미적이고 정서적인 즐거움을 동반해야 합니다.
흥미가 수단이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소설의 목적 중 하나인 교훈적이라야 한다는 것은 여기서 더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기본적인 소양 없이 활자화된 장르소설은 우리의 장래를 막아버리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 두고두고 우리의 앞길을 막을 것입니다.
기본적인 소양이란 이야기는 소설의 기본도 갖추지 않은 소설을 말합니다.
맞춤법 오류는 차치하고라도 잘못된 조사나 적절하지 못한 단어의 조합, 문장의 오류가 한 페이지에 있는 문장 수에 반을 넘는 글들이 수두룩합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 글로 된 소설에선 과거완료형 시제라는 것이 없습니다.
소설 속에서 과거완료형 시제를 쓰는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곤 갓을 쓴 형상입니다.
영어문법을 우리 글에 끌어다 쓰는 대표적인 오류입니다.
그것을 가려볼 독자도 물론 있지만 구분하지 못하는 독자가 더 많습니다.
뜻만 전달되면 되지 무에 그리 따지느냐 하는 태클은 딴 데가서 걸어주십시오.
올바른 문장은 소설의 작품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제가 소설을 잘 쓰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장르 시장의 활성화를 바라고 앞으로 소설을 계속 쓰고 싶은 한 사람으로서 다 같이 보다 나은 미래의 발전을 위한 쓴소리로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작가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淸友島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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