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킹 - [ 03 ] - 현 재
* * *
*** 현재 ***
“진아!”
“……레베카.”
“뭐야,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정말이야?”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레베카로 인해 유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사 간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과 행동으로 짐작이 가능했기에 레베카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정확히는 이민이지.”
유진의 내키지 않는다는 말투에 다소 위안이 됐는지 레베카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서 튀어나온 목소리엔 체념과 불만이 섞여 있었다.
“나한텐 언제 얘기하려고 했었니? 설마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는가.
이별은 짧을수록 좋다고 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사실 너희 집으로 가던 중이었어.”
거짓말이다. 에일린의 애인이 집에 와 있었기에 일부러 자리를 피해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결국 거짓말을 한 탓에 유진은 레베카의 집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는 이곳 캘리포니아의 고교 스쿨에서 사귀게 된 여자 친구로 말 그대로 친구사이일 뿐이다.
풋사랑을 겪으면서 갑자기 나이를 먹기 시작한 유진은 적게는 십대중반, 많게는 이십대 초반까지 볼 수 있는 애매한 시점에서 또다시 성장이 멈추었다.
개인적으론 최소 이십대 중후반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 상태에서도 전에는 어린 아이의 몸이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경험할 수조차 없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고교생활은 그가 겪고 싶었던 일들 중 하나였다.
물론, 이제는 수도 없이 경험해 본 것 중 하나로 전락한지 오래였지만 크게 지겹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언제부턴가 학교는 유진의 전형적인 유희중 하나로 자리매김 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거나 정들었던 도시를 떠나야 할 때가 오면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라 해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동안은 성장이 멈춘 유진과 이십대 초반의 젊음 그대로를 간직한 에일린으로 인해 어쩔 수없이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에일린이 드디어 또 다른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수많은 애인과 수많은 남편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에일린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유진은 에일린이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희생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랬기에 이번 경우는 유진 자신에게 있어서도 매우 특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에일린과 사랑을 시작한 사람이 인간의 삶을 버리고 뱀파이어의 길로 들어서서 영원히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에일린이 원하지도 않겠지만 절대로 다른 뱀파이어를 만들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절대 규칙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간다며?”
“응, 에일린의 애인이 한국인이야.”
한국은 월드컵으로 꽤나 알려진 나라였기에 레베카는 어렵지 않게 한국을 떠올리며 아는 체를 했다.
유진이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존재인 만큼 가보지 않은 나라가 없었기에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곳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메일 보낼 거지?”
“당연하지.”
“진아, 정말 보고 싶을 거야.”
“알아.”
그렇게 한동안 레베카에게 붙잡혀 있던 유진은 에일린의 전화를 받고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에일린과 유진은 특유의 동양적 외모로 인해 먼 과거에는 주로 동양에서 활동했었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곳은 일본과 중국이었는데 사실 모자가 가장 좋아하던 곳은 고구려였다. 반면에 남아사상이 철저했던 조선시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쟁이 터지고 두 모자가 살아가기에 너무도 열악한 환경에 이르렀을 땐 가차 없이 한국을 떠났다.
시끄러운 것은 피해가자는 주의로 살아왔기에 두 모자는 되도록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곳을 찾아 옮겨 다녔다.
보통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슈퍼파워를 지닌 존재들이였기에 모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 * *
“…….”
유진은 다물어 지지 않는 입을 그대로 놔둔 채, 한동안 황당한 눈빛으로 에일린을 쳐다보았다.
“호호, 집이 참……, 아담하지?”
말과는 달리 에일린의 눈가는 파르르 경련이 일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유진의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에, 유진은 팔짱을 끼고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 아담한 수준을 넘어서 굉장히 귀엽네요.”
“오호호… 그, 그렇지?”
현재 유진과 에일린은 에일린의 애인, 김 희준의 한국 집 앞에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헌데 그 집이란 것이 그들이 판단하기에 참으로 어이없는 규모다.
모자는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만큼 쌓은 부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쌓아 놓은 부들은 세계 각국에 다양한 방법으로 고루고루 안치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그랬기에 인간사회에서 여러 유희를 하면서도 모자는 큰 어려움 없이 사치를 누리며 주로 상류층을 만끽하며 살아왔다.
그랬던 그들이었는데 희준이 앞으로 함께 살 집이라며 안내한 곳은 모자의 관점에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작았던 것이다.
주로 싱글들이 모여 사는 원룸과 투 룸 오피스텔이었으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땅덩어리가 좁다고 알려진 한국에서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원룸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할까?
희준의 안내로 앞으로 머물러야할 자신의 방문 앞에 선 유진은 작은 농 하나와 침대, 그리고 책상 하나가 달랑 놓였을 뿐인데도 꽉 찬 방 안의 모습에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큰 집 하나 새로 사자.”
예의에 어긋날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워낙 좁은 공간이라 희준의 귀에 들린 모양이다.
“이봐들, 진지하게 말하는데 애인 덕 본다는 말은 결코 들을 생각 없으니까 행여, 집을 사주겠다느니 다른 곳으로 이사하자느니 하는 말은 삼가도록.”
유진의 미간에 깊은 골짜기가 서너 개 생겼다.
다 좋았지만 희준의 유일한 단점은 의외로 보수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자존심도 굉장했다.
잠시 후, 희준이 두 모자에게 한국음식을 맛볼 수 있게 해주겠다며 마트로 장을 보러 나간 사이, 입이 닷 발은 튀어나온 유진이 퉁명한 어조로 말했다.
“학교생활을 마칠 때까지 이집에서 쭉 지내야한다면 졸업하자마자 혼자 독립할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당장이라도 큰 집을 사서 홀로 독립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에일린이 슬퍼할 것이 분명했기에 유진은 이 정도에서 양보했다.
“……고맙다.”
너무도 화사한 미소를 짓는 에일린의 모습에 유진은 새삼 사랑의 위력을 통감했다.
그동안 이런 생활을 하면서 지금처럼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유진은 살짝 서운함이 들긴 했지만 진심으로 희준에게 감사했다.
- 작가의말
좀 짧죠?
그래도 하루하루 올리고 있으니 봐주세요. ^^*
보시고 재미 있으시면 댓글 달아주시는 센스~ 발휘주시고요.
그냥 가시면 섭섭하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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