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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강아지 님의 서재입니다.

언젠가 본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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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강아지
작품등록일 :
2016.02.15 19:24
최근연재일 :
2016.02.1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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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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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1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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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밭에 부는 바람

DUMMY

규동은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오늘은 중요한 고지가 있다 하여 일찍 등청해야 하는데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던 것이다. 수반(秀盤, 뛰어난 받침; 스마트폰)을 슬쩍 보니 거의 진시 일각(7시 15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규동은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본디 한규동은 도사(의금부 5~6품)로서 첫 녹을 받을 때부터 무사안일만을 신조로 삼아왔더랬다. 윗사람 말 잘 따르고, 동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며, 맡은 책무에만 충실하면서 5품, 4품 차례차례 올라가는 무탈하고 무난한 입신양명을 꿈꿔온 것이다. 그러나 상관에게 찍히게 생겼으니 야망에 큰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뛰다시피 발을 놀리던 규동의 눈에 또래의 남자가 보였다. 아무리 급한들 어찌 이 인물을 지나칠쏘냐. 규동은 만면에 희색을 띄고 체면 없이 소리쳐 남자를 불렀다.


“설직 정언(사간원 정6품)! 좋은 아침이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시오?”


그러나 남자, 강설직은 분명 한규동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흘긋 쳐다봤을 뿐 묵묵부답으로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본디 규동에겐 재수 없게 구는 이이긴 했으나, 오늘따라 표정에 적의와 불쾌감이 유달리 뚜렷한 것이 규동을 의아하게 했다. 그러나 규동은 화는커녕 씩 웃기까지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밤 애민 소저가 내 칭찬이라도 하셨는가. 왜 잘나신 얼굴이 오늘따라 죽상이람”


설직의 누이동생 애민은 현 승정원 수장이신 강 대감 댁 고명딸로, 현명하고 아름답기론 한양 내에 따라올 이가 없다고 소문난 규수이다. 제 아비와 오라비가 몹시 아끼는 것 또한 유명해 도성의 총각들은 그저 말 걸어볼 엄두조차 못 내었다. 그러나 친우들이 붙여준 소가죽 낯짝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규동은 뻔뻔스럽게 애민의 낯첩(낯帖; Facebook)에 붕우(朋友)요청(친구 요청)을 한 것이다. 애민이 직접 놓은 자수를 찍어 올리면 꼬박꼬박 ‘좋아요’도 눌러주고, 때로는 적당한 칭찬을 댓글하였다. 처음 애민을 거리에서 마주쳤을 땐 우연인 양 놀란 낯을 지었으나, 사실 여종 아이와 산보를 하다 올린 자촬(自己撮影, 자기촬영; 셀카)을 보고 헐레벌떡 뛰어갔던 것이었다. 규동은 제 도성 시찰 일정을 애민의 산보 일정에 맞추었으며, 애민과 종종 마주치며 낯을 익혀갔다. 애민도 나름의 선은 지키면서 유쾌하게 구는 규동을 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꺼리지 않는다 뿐, 특별한 호의를 표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규동은 언젠가 애민과 혼례를 올리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누이를 뺏어갈 도둑놈에게 미래 처형이 좋은 낯은 못하리란 생각에 설직의 태도에도 전혀 기분이 나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의금부 밀의청 주위는 유달리 고요했다. 문틈을 엿보니 관원들이 줄을 맞춰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것으로 보아 지사(의금부 정2품) 어른은 아직인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규동이 얼어붙었다.


“들어가지 않고 게서 뭐하는가?”


놀라 돌아보니 과연 지사 어른이었다. 규동은 황급히 문안 인사를 드렸다. 옆으로 비켜서자 지사는 혀를 차며 성큼 청으로 들어섰다. 규동은 조용히 따라 들어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규동이 소속된 밀의청(密意廳)은 본디 당직청이라는 이름으로, 신문고를 담당해왔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수반을 쥐고 다니는 지금은 낮첩과 조잘터(조잘대다+터; 트위터) 같은 사교막(社交㠳, 사사로이 어울리려 모이는 곳; SNS)에서 공식 신문고 계정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백성의 목소리를 듣고 또 나라의 목소리를 전파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초들에게 이렇게 알려졌다 뿐, 사실 밀의청의 주된 업무는 따로 있었다. 밀의청은 크게 두 부서로 나뉜다. 一부(部)는 사교막과 각종 상망(上网; 온라인) 게시판 등을 살핀다. 주 감시 대상은 나랏일에 불만을 품는 자, 양반에 대한 적개심을 갖는 자, 음탕한 자, 요설(妖說)을 퍼뜨리는 자, 종묘사직에 반하는 서학(西學)의 무리 등이다. 역적도당임에 틀림없다 판단되면 신원을 밝혀내 본부(本部; 의금부)가 추포에 나설 수 있도록 한다. 二부(部)의 일은 상망의 민심이 평안하고 중앙의 뜻에 잘 따르도록 여론을 보살피는 것이다. 二부의 관원들은 일반 민초인 척 상망에 댓글을 달며 인의예지를 장려하고 부덕한 자들은 호되게 꾸짖는다.

二부에 속한 규동은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一부의 일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 누구를 감시하고 뒤를 캐는 일 같은 건 아무래도 찝찝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캐낸 정보로 추포당해 무서운 문초를 겪을 이를 생각하면 밤에 발 뻗고 자기 힘들 것이다. 그에 비해 二부에선 사교막이나 농거리 판(;유머 사이트)등을 들락거리며 내키는 대로 마구 댓글하는 일 뿐이니 속이 편하다 못해 후련한 것이다. 규동은 앞의 단상으로 올라서는 지사 어른을 보며 인사이동만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어제 일 부가 정말 큰일을 해내었어. 본부에서 특별히 포상을 내리라 하여 이렇게 모이라 하였네.”


규동은 바로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一부가 드디어 거물 조잘꾼(; 파워 트위터리안) “대밭에 부는 바람”의 정체를 밝혀낸 것이다. “대밭에 부는 바람”은 민초의 신문고를 자청하며 큰 인기를 얻은 조잘꾼이었다. 익명의 투고를 받아 올리는 글들은 대부분 탐관오리를 규탄하거나 양반가의 치부를 고발하는 내용이어서, 지체 있는 가문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때로는 중앙의 정책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하기도 하여 “대밭에 부는 바람”은 고위 관직자나 그의 측근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었다. 그 동안 一부는 “대밭에 부는 바람”이 누군지 빨리 알아내라는 압박에 안팎으로 시달려와, 누가 대나무의 대 자만 꺼내도 이를 갈 지경이었다.


“예측했던 대로 ‘대밭에 부는 바람’은 양반가의 인물이었네. 하여 정보가 새어 도주할 것을 우려하여, 어젯밤 급히 추포를 해왔다네.”


규동은 “대밭에 부는 바람”을 가엽게 여겼다. 높은 분들의 성화가 대단하고 상감 전하도 화가 많이 나셨으니 아마 곱게 끝나지는 못할 것이다. 아쉬울 것도 없는 양반가 인물이 왜 그런 짓을 하여 생목숨을 버리는지, 규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내일 공식 보도가 나갈 거야. 자네들이 할 일은 보도 후에 ‘대밭’이 얼마나 음탕하고 사특한 계집인지 퍼트리는 것일세. 알고들 있겠지만, 없는 말 다 동원해서 최대한 악독하게 포장해내야 해. 그 집안 위세에 겁먹지는 말아. 밀의청 명부는 절대 비공개이고, 가짜 부서도 준비해놓았으니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자, 이게 ‘대밭’의 정체라네.”


어차피 알고 있는 말 또 반복한다고 투덜대던 규동은 흰 벽 위로 영사되는 여인의 사진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피가 서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규동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고, 한시도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아마 낯첩에서 가져온 자촬로 보이는 사진 속에서, 애민은 이쪽을 보며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규동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어째서 애민 소저가 저기에’에서 생각이 나아가질 못했다. 문득 아침에 마주친 설직의 굳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제야 몰아닥친 현실감이 규동을 소스라치게 했다. 누군가 등줄기에 얼음물을 붓는 것 같았다. 아니, 등 한가운데를 차가운 쇠침으로 쑤시는 것 같았다. 규동은 자신이 어찌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작가의말

-조선시대의 스마트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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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통화 16.02.15 149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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