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타각 님의 서재입니다.

또 다른 나를 찾아서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커빙
작품등록일 :
2019.02.26 17:01
최근연재일 :
2020.07.12 23:45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1,431
추천수 :
4
글자수 :
249,534

작성
20.07.07 22:50
조회
38
추천
1
글자
13쪽

슬픈 이야기 - 3

DUMMY

이거기도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하는 눈치였다. 밤새 시끄러운 소음 때문인지 이거기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새우처럼 등을 휘어 감고 잔뜩 몸을 웅크리기만 했다.

"나는 여기가 싫어. 나는 산 속으로 갈 거야.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제발.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으로 나를 보내 줘."

늦가을에는 거리의 풍경이 조금은 쓸쓸해진다. 길거리의 주인 없는 개들의 걸어 다니는 모습 속에도, 조심스럽게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가는 들고양이의 모습 속에도, 떨어지는 가로수의 낙엽처럼 가을의 초라함과 황량함이 배어 있는 듯했다.

늦가을이 오면 다른 집에서는 겨울을 준비하느라 연료도 채우고 김장도 하고 하였지만 우리 움막집에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우리 식구들은 그저 이번 겨울에는 날씨가 춥지 말아야 하는데 하는 걱정만 하였고 혹시 나? 아니면 누군가를 이번 겨울에 잃어버리지 않나 하는 근심만 은근히 하였다.

그런데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면 나는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왜냐하면 더운 여름 내내 힘들게 입고 다녔던 두툼한 옷가지들이 조금씩 효능을 발휘하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여름 내내 입고 다니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한 겨울도 버티지 못하고 일찍 밥숟가락을 놓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바람이 제법 차갑게 부는 어느 캄캄한 밤이었다.

나는 선잠이 들어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의 가슴을 구둣발로 억누르는 듯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움막집이 커다란 소동에 휩싸이고 있다는 불안한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왕초 어디 있어?" 누군가 왕초를 찾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몇 사람인지 좁은 움막집 안을 이리저리 구둣발로 밟고 오가며 누워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웠다. 내 옆 건너편에서 자고 있던 왕초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후닥닥 일어나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저 놈 잡아라." 누군가 소리치며 왕초의 뒤를 쫓아갔다.

"아저씨 안돼요." 조판자가 한 사람의 다리를 붙잡으며 꼭 매달렸다.

"놔. 우리는 파출소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거 안 놓으면 너도 잡아간다!" 한 사람이 이렇게 소리치며 발을 휘둘러 조판자의 손을 떼어놓으려 했다.

조판자는 파출소에서 온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리를 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을 서서히 뺏다.

"왕초는 도둑질을 많이 해서 잡아가는 거야. 이 번에 왕초 같이 나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일제히 순화 교육을 시킨다."

왕초는 움막집을 벗어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붙잡혔다. 다리도 성하지 않은데 얼마를 도망갈 수 있었겠는가. 우리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잡혀 끌려가는 왕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왕초도 뒤를 돌아보며 무엇인가 소리를 질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우리들은 왕초가 승천교육대라나 뭐라나 하는 데로 끌려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뿐 그 후 왕초의 모습을 이 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왕초가 간 곳이 승천교육대라니까 좋은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교육시켜 주는 곳이라는 이름의 느낌이 참 좋았다.

날씨는 점점 차가워지고 거리의 가로수도 한 둘 옷을 벗는데 왕초가 떠난 우리 움막집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만 갔다.

날이 추워지니 거리의 행인이 별로 없었고, 행인이 없으니 깡통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동전이 없으니 내가 아무리 활개짓하여 걸어도 찰랑찰랑 동전 부딪치는 신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조판자의 벌이가 제일 좋았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많이 벌어 와도 많은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힘든 판국에 허달구는 요즈음 행동이 수상했다. 여느 보통 사람들에 제일 가까운 허달구는 우리 식구의 끼니를 자신이 걱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기가 벌어 온 것을 모두 다 내놓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무슨 짱구냐? 너희 같은 걸인들을 위해 혼자 희생을 할 것 같애?"

왕초가 없으니 끼니를 제대로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들이 다른 식구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침은 모두 굶었고 저녁은 겨우 얻어 온 찬밥으로 입에 풀칠을 했다. 나는 늙은이의 처량한 모습으로 구걸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동네 아줌마들의 동정을 살 수 있었다. 찬밥은 거의 내가 얻어 오는 편이었다. 그리고 다른 먹거리는 조판자가 벌어 온 돈으로 조금 구해 먹었다. 추운 날씨에 연탄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영감, 젊어서는 무엇을 했어?" 조판자가 말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어떤 전쟁터에 있었던 기억이 가물가물 나는데 그게 무슨 기억인지 모르겠어. 다른 기억은 없고."

"나도 별다른 기억은 없어. 어려서부터 이렇게 되었으니 이런 생활을 살아온 기억이 내게도 전부야."

"자네 부모님은?" 내가 불쑥 말했다.

"아무도 기억에 없어 내가 이 지경이 되어 아마 길에 버린 모양이야." 조판자는 점점 더 부패가 심해지는 다리 부위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떨구고 땅을 긁어 댔다.

며칠 후 허달구는 움막집을 아주 떠난 모양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바람에 펄럭이는 그의 소맷자락을 볼 수 없었다. 그는 다리가 성하니 어디든 가서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남은 식구들은 그의 장래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눈이 내렸다. 하얀 눈이 솜사탕처럼 소복소복 내렸다.

하얀 눈이 내리는 거리에서는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강아지가 되었다. 아이들은 눈을 뭉쳐 서로 던지며 깔깔댔으며, 젊은 연인들은 상대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고,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을 쳐다보고 빙긋이 웃어 주며 서로의 마음을 희롱하였다.

마을의 지붕들은 하얀 모자를 새로 쓰고 자태를 뽐내느라 얌전빼었고, 거리의 가로수들은 새로 산 하얀 털옷을 갈아입고 명동 거리라도 나온 양 으쓱으쓱 어깨를 흔들어 댔다.

눈이 오는 날에는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하얀 눈에만 모든 신경을 쓰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의 깡통이나 호주머니는 텅 비어 있기 일쑤였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나도 어린아이가 되어 깡충깡충 뛰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모든 게 좋다고 생기 있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고 싱글싱글 함께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세상이 온통 기쁨으로 넘쳐 어디를 봐도 티 하나 없이 하얀 세상이었다.

왕초도 가고 허달구도 떠났다. 이제 조판자와 나, 이거기 그리고 한소희가 우리 식구의 전부였다.

오늘은 내가 얻어 온 찬밥에다 횡재로 어느 마음씨 좋은 할머니가 준 김장 김치를 손으로 찢어서 먹었다. 가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움막집을 찾아와 먹을 것을 주고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횡재라고 불렀다. 저녁 식사는 그래도 거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들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찬밥을 열심히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치를 들고 먹으려던 한소희가 꾹꾹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헛구역질을 하다가 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헛구역질을 이기지 못하여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야! 임신한 것 아냐?" 조판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임신은, 누구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임신이야?"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 조판자에게 되물었다.

"내 아이야. 내가 임신시킨 것이라고."

조판자는 마치 돌고래가 수면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것처럼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임신이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조판자의 얘기를 믿기로 했다. 한소희가 임신을 하다니.

찬바람이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무척 부는 날 나는 어느 집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먹다 남은 식은 밥이라도 얻어 갈 생각이었다. 나는 초인종 같은 것은 누르지 않았다. 사람이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얼마를 기다리다 보면,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오다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늙은이의 얼빠진 모습을 보고는 이내 뒤돌아 들어가 아무 말 없이 먹거리를 내어 주었다. 나에겐 무슨 말이 필요 없었다. 그냥 문 밖에서 기다리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그 날도 나는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더욱 얼빠진 사람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나오다가 나를 보고 돌아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한 꾸러미의 사과와 배 그리고 약간의 밥을 들고 나왔다. 그 아주머니는 밥이 조금밖에 없어 과일을 대신 많이 가져온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가로 저었다.

"그으 애들, 애들." 나는 과일을 가리키며 그것들은 아직 좋은 것이니 집에 아이들이나 주라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이럴 때가 제일 속상했다. 우리 같은 걸인에게 어울리는 먹거리를 내어놓아야지 누구 약 올리려고 그런 것인가?

나는 먹거리를 훔치려고 하는 도둑놈도 아니고 귀중한 물건들을 빼앗으려고 하는 강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뿐이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이웃일 뿐이었다.

움막집에서 허기져 누워 있을 식구들도 생각났지만 나는 찬밥만 받아들고 돌아섰다. 그 아주머니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철문을 세차게 닫았다. 발길을 돌리는 내 앞에서 한겨울 찬바람이 모질게도 불었다. 입술이 부르트고 코가 맹맹할 정도였다.

하루 종일 차아한 거리를 헤매다 해가 지고 나서야 움막집엘 돌아왔다. 움막 문을 열자 얼음장처럼 찬 기운이 어두운 움막 안을 휘돌고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서 넋을 놓고 있는 이거기와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한소희 그리고 문 옆에 쓰러져 있는 조판자 모두를 휘둘러보고 나는 얻어 온 밥과 먹거리를 내놓았다.

"자, 어여 먹자."

나는 쓰러져 있는 조판자를 흔들었다. 그러나 조판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며칠 전부터 다리의 절단 부위가 더욱 부패하여 그 고통으로 밤새 앓는 소리를 하더니 오늘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한 것일까?

"조판자! 조판자!"

"끄응." 조판자는 겨우 신음 소리를 내고 나를 돌아봤다.

"조판자, 왜 그래?" 나는 황급히 말했다.

"정신이 없어. 자꾸 졸음이 오고 무슨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고 다리에는 감각이 전혀 없어. 이대로 가야 하나 봐. 우돌이."

조판자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한소희, 이리 와."

한소희는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다가 앉았다. 조판자는 한소희의 불룩한 배를 만지며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맑은 종소리처럼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아이야. 내 아이."하며 조판자는 흰 석고상에서 검은 물감이 흘러내리는 듯 검은 눈에서 하얀 눈물을 흘렸다.

"어머님이 보고 싶다. 내 아이를 어머님께 보여 드리고 싶다."

그리고 조판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고개를 떨구고 팔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리고 무슨 깊은 사색에 빠진 사람처럼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푸른 언덕 위에 뜬 무지개처럼 그의 하얀 영혼이 어두운 허공 속을 뚫고 하늘로, 하늘로 멀리 사라지려는 듯 움막집의 문이 바람에 세게 흔들렸다.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내일은 오는 것일까?"

다음 날 하얀 눈이 내리고 있는 이른 새벽에 나는 조판자의 시신을 그가 평소 타고 다녔던 밀차에 싣고 산으로 갔다.

하얀 눈을 헤치고 딱딱한 땅을 파 그를 조용히 뉘었다. 나는 흰 눈과 검은흙이 뒤범벅된 흙덩어리로 조판자의 시신을 조용히 덮었고 시커먼 그의 밀차를 붉은 화톳불에 집어넣어 태웠다. 하얀 눈이 내리는 날 나는 가족처럼 십여년을 같이 살아온 조판자를 어두운 산 속에 두고 왔다.

움막집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거기는 자기를 혼자 내버려두라고 흰소리를 하고 있었고 한소희는 작게 불러온 배를 만지며 무슨 자장가라도 부르는 양 낮은 목소리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읊조렸다.

"아이야 어으흐 다라로다 흐 다라주라 아이야."

움막 밖에서는 버려진 깡통이 구르는 소리가 교회의 종소리처럼, 절간의 풍경 소리처럼 무심히 들려 왔다.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또 다른 나를 찾아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5 가을 은행나무에 부는 바람 - 2 20.07.12 44 0 17쪽
44 가을 은행나무에 부는 바람 - 1 20.07.11 20 0 13쪽
43 다이아나를 위한 제례 - 3 +2 20.07.10 64 1 17쪽
42 다이아나를 위한 제례 - 2 20.07.09 39 0 12쪽
41 다이아나를 위한 제례 - 1 20.07.08 46 0 12쪽
» 슬픈 이야기 - 3 +2 20.07.07 39 1 13쪽
39 슬픈 이야기 - 2 20.07.06 35 0 11쪽
38 슬픈 이야기 - 1 20.07.05 29 0 12쪽
37 빛과 소리의 차이 - 3 20.07.04 19 0 14쪽
36 빛과 소리의 차이 - 2 20.07.03 23 0 12쪽
35 빛과 소리의 차이 - 1 20.07.02 33 0 13쪽
34 인간 소리 - 3 20.07.01 36 0 19쪽
33 인간 소리 - 2 20.06.30 13 0 12쪽
32 인간 소리 - 1 20.06.29 16 0 11쪽
31 제 5국가 - 3 20.06.28 32 0 14쪽
30 제 5국가 - 2 20.06.27 41 0 15쪽
29 제 5국가 - 1 20.06.26 13 0 14쪽
28 새 슬기사람 - 2 20.06.25 24 0 14쪽
27 새 슬기사람 - 1 20.06.24 62 0 11쪽
26 끝 없는 부유 - 8 20.06.23 44 0 13쪽
25 끝 없는 부유 - 7 20.06.22 17 0 12쪽
24 끝 없는 부유 - 6 20.06.21 20 0 12쪽
23 끝 없는 부유 - 5 20.06.20 17 0 11쪽
22 끝 없는 부유 - 4 +2 20.06.19 16 1 12쪽
21 끝 없는 부유 - 3 20.06.19 18 0 11쪽
20 끝 없는 부유 - 2 20.06.18 11 0 12쪽
19 끝 없는 부유 - 1 20.06.18 11 0 11쪽
18 모란봉 5호 - 3 20.06.18 7 0 14쪽
17 모란봉 5호 - 2 20.06.18 9 0 13쪽
16 모란봉 5호 - 1 20.06.18 16 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