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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어느 노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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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작품등록일 :
2018.05.29 09:14
최근연재일 :
2018.06.04 16:37
연재수 :
7 회
조회수 :
345
추천수 :
1
글자수 :
18,941

작성
18.05.31 15:51
조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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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7쪽

어느 노인의 죽음3

DUMMY

그리하여 조택구의 제안에 의해 호젓한 숲길을 따라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 자리를 옮겨 술잔을 나누게 되었을 때, 그는 조택구의 다소 뻔뻔스러운 주청을 타박하기는커녕 내심 반기고 있었다. 그다지 오래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그는 이미 서순임에게 어지간히 홀려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크다싶은 가방의 용도를 비로소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거기에는 둘둘 말린 은빛 방습돗자리와 알루미늄 재질의 일회용 접시, 마른오징어, 땅콩 등의 안주류와 소주 따위가 두서없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순임은 그런 그를 향해 한 번 셀쭉 웃어보이고는 서둘러 술자리를 마련했다.


“뭘 그리 정승마냥 서 있남. 어서 앉아 술이나 한 잔 받게나.”


재빨리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조택구가 그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제서야 그는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그게 도무지 무슨 일인지를 깨닫기도 전에 서순임이 냉큼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선뜻 그 잔을 비웠을 때에는 잠시 떠올랐던 그나마의 미심은 유흥의 무게에 눌러 이내 심연으로 가라앉아버리고 말았다.


아아, 지난 밤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이미 저물녘에 시작된 술판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조택구와 서순임, 그리고 서순임이 어느 와중엔가 데려온 비슷한 연배의 여인. 그는 주량을 넘어서는 술을 마구 들이켰고, 여인들이 집어주는 안주를 날름날름 받아먹으면서 낄낄거렸고, 흐드러진 노랫가락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나이를 잊었고, 체면도 잊었으며 나중에는 제 자신마저도 잊어버렸다. 그들은 모두가 너나할 것 없이 한데 뭉뚱그러진 채 향락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향락의 끄트머리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만취 중 문득 그는 서순임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그를 향해 돌아섰고 이내 그대로 불덩이가 되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흐느적거리는 밤하늘, 풀벌레 소리, 후각을 휘감듯 진동하는 분내음··· 마침내 샅을 파고드는 뜨거운 기운에 압도되어 그는 희미한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간밤의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기억들은 이미 화인(火印)처럼 그의 뇌리에 명백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게야.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계집질이라니. 어쩌자고 그리 해댄 걸까.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구.”


아침부터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허겁지겁 찾아온 그를 향해 조택구는 심상하게 말했다. 그러나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는가. 불혹에 반려자를 잃고 단호하게 절연해버렸던 저열한 욕정에 새삼 사로잡힌 바 되어 벌인 낯모르는 여인과의 정사··· 그리하여 맹렬히 샅을 타고 피어오르던 고통스러운 쾌감···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것은 지난 반생을 지켜온 그의 도덕성과 자긍심을 일순 무너뜨릴 만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어쨌든 없었던 일로 해주게. 내 차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으이.”


“알았네. 자네도 참, 내가 그걸 무슨 자랑거리라고 떠들고 다니겠는가. 쓸데없는 걱정일랑은 하지 말게나.”


조택구는 그렇게 그를 안심시켰지만, 그는 여전히 못미더운 듯 거듭 입단속을 당부하고는 곧장 집으로 되돌아와서는 그대로 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버렸다. 어째서 그때 품을 파고드는 그 여우같은 것을 떨쳐내지 못했을꼬. 딱히 품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하염없는 자책 속에서 그는 혼절하듯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버님, 식사 들일까요?”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느새 사위는 어슴푸레한 빛의 잔해들만 부유하고 있었다. 그는 기척을 하지 않은 채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살풋 문이 열렸고, 문틈으로 빛줄기와 함께 며느리의 얼굴이 새초롬히 내비쳤다.


“아버님, 주무세요?”


대답이 없자, 며느리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다시 내민 고개를 수습하고 문을 닫았다. 아침부터 내내 빈속이었던 터라 시장기가 동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대로 견뎌보기로 했다. 차마 아무렇지도 않게 며느리를 대할 면목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잠이 든 사이 그의 심경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의 황망함과 흥분은 어느 결에 사라져버렸고, 좀더 현실적으로 지난 과오를 돌이킬 수 있을 정도의 냉정을 되찾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인 바에야 곤혹스러운 광경을 굳이 떠올리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은 무의미했다. 만만치 않은 세월의 풍진을 겪어온 그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래, 꿈을 꾼 게야, 아주 흉측한 꿈을··· 비로소 그는 수치심과 자책으로 범벅이 된 기억의 환부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남의 과실을 탓하던 자라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게 마련이다. 비록 그것이 명백한 악행일지라도 제 자신에게 해당될 때에는 반성보다는 외려 발명의 빌미를 찾아대는 것이다.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간밤의 만행에 대해 내내 곰곰이 생각해낸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불가항력’이었다. 결과적으로 일이 그리 되고 말았지만, 애초부터 무슨 흑심 따위를 품고 내달은 길은 아니었다. 그의 남산 행은 그저 가벼운 산책이었을 뿐이다. 또한 거기에서 만난 서순임에 대한 남다른 감정 역시도 그에게는 연민 내지는 동정 따위의 인간적인 정리였을 뿐이지, 결코 속된 애욕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와 술자리까지 같이 하게 된 것은 분명 그의 실책이었다. 그러나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취 중에 벌인 불미스러운 사건의 전말이란, 과부 서순임이 돌연 멋대로 달아올라 달려든 탓이며, 그 자신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간밤의 기억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토를 달고 보니, 그는 차츰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명백한 왜곡이었다. 서슴없이 향락에 투신하여 거푸 술을 들이켜고 여인의 아양에 연신 헤픈 웃음을 흘리면서 노랫가락에 제 계집 대하듯 그러안고 덩실덩실 춤을 춘 망동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종국엔 아찔한 열락에 몸을 떨면서 격렬히 호응하던 자신에 대해서는 어찌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 역시도 그는 대수롭지 않은 술 탓으로 가볍게 외면했다. 그러기에 ‘술 취한 개’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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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느 노인의 죽음7(끝) 18.06.04 31 0 6쪽
6 어느 노인의 죽음6 18.06.02 49 0 6쪽
5 어느 노인의 죽음5 18.06.01 48 1 6쪽
4 어느노인의 죽음4 18.06.01 36 0 7쪽
» 어느 노인의 죽음3 18.05.31 45 0 7쪽
2 어느 노인의 죽음2 18.05.30 51 0 7쪽
1 어느 노인의 죽음1 18.05.29 86 0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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