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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님의 서재입니다.

침대는 기억한다.

웹소설 > 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중·단편

완결

미사71
작품등록일 :
2018.05.03 17:39
최근연재일 :
2018.05.03 17:50
연재수 :
1 회
조회수 :
141
추천수 :
3
글자수 :
7,999

작성
18.05.0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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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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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8쪽

침대는 기억한다

DUMMY

그날, 그러니까 대학동창 윤명숙이 결혼하던 날, K는 나타나지 않았다. K로부터 연락을 받고 하객으로 찾아온 나를 비롯한 동창들 몇몇은 좀 의아해졌다. 일부러 전화를 걸어 “명숙이 결혼식 핑계로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거지 뭐” 라면서 굳이 오라고 말했던 K가 정작 결혼식에서 쏙 빠져버렸다는 점은 아무래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명숙이도 우리와 대학동창이었다. 청첩장도 받았다. 하지만 청첩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굳이 결혼식에 참석해야 할 정도의 친분은 없었다. 그런다고 한들 그녀도 별로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식이 끝나고 피로연장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오히려 그녀가 “어머, 어떻게 찾아왔니?”하고 놀랄 정도였으니까. 결국 우리가 결혼식에 참석했던 것은 순전히 K때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K가 오지 않다니,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피로연장의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몇 마디 한담을 나누다가 쭈뼛쭈뼛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어정쩡한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가볍게 맥주라도 한 잔 걸치자고 제안했지만, 아직 초저녁이었으므로 우리는 당구장에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해거름 무렵에야 비로소 시내의 한 맥주집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서 누군가가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도대체 왜 안 나왔어? ··· 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었잖아··· 뭐? 그게 말이 되냐? ···그래, 여튼 빨리 나와 임마! 여기가 어디냐면···


전화를 끊은 친구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입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새끼, 자빠져 자느라고 못 왔대. 그게 말이 되냐?”


확실히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다. 결혼식은 오후 3시였다. 아무리 피곤하다고 오후 3시까지 줄창 잠을 잔단 말인가.


K는 술잔이 몇 순배 돌았을 무렵에야 비로소 나타났다.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세수도 제대로 못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우선 야유를 퍼부었다. K는 정중히 사과하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다시 술을 돌렸다. 여기저기에서 지난 추억들이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시즌이 끝나버린 황량한 야구장 같았던 우리의 일상들은 어느덧 지난 시즌의 격전기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독한 소주를 안주삼아 토해내던 주의와 논쟁들, 시절의 객기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난타와 감질 나는 연애의 기억들··· 지금에사 다만 부질없는 짓거리에 불과한 모든 것들이 화려한 전광판 아래에서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었다.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빗맞은 파울에도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고, 어이없는 병살타에도 박장대소했다. 그런 식의 이상한 응원은 추억을 공유한 자가 아니면 결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K가 문득 피곤에 절은 얼굴을 하구선 말문을 연 것은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명숙이, 결혼은 잘 했냐?”


한창 2루를 돌아 3루로 향하던 친구들의 뜀박질이 멈췄다.


“그럼, 잘 했지. 평생 결혼 못 하나 했더니, 그래도 짝은 있더라.”


“그래, 걔가 원래 선머슴아 같았잖아. 워낙 여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지.”


“하긴, 나도 오늘 신부화장 한 거 보고, 걔가 걘가 싶드만.”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우리들은 저마다 명숙에 대해 한마디씩 촌평을 붙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명숙에 대한 유별난 기억 따위는 없었다. 그저 강의실이나 과사무실에서 인사나 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아마 대개의 친구들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체로 학생회 차원의 행사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구호를 외치던 정도로, 혹은 과 차원의 술자리에서 빼는 기색없이 넙죽넙죽 막걸리를 받아먹던 털털한 모습 정도로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근데, 너는 정말 늦잠 자다가 못 온 거냐?”


K에게 내가 물었다. K의 피곤한 안색을 보아서는 아직 더 자야 할 것처럼 보였다.


“응. 간밤에 한숨도 못 잤거든.”


“왜?”


“얘기를 하자면 좀 길어. 어쨌든 간신히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초저녁이었어.”


친구들은 다시 3루로 뛰기 시작했다. 3루를 돌아 홈을 밟으면 으레 함성이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K는 잔을 받쳐 들기에도 피곤해 보였고, 나는 괜히 궁금해졌다. 어째서 밤에 잠을 못 잤을까? 결국 나는 슬몃 야구장을 빠져나와 K에게 물어보았다.


“왜 간밤에 한숨도 못 잤냐?”





우리와는 달리 K는 명숙과 제법 친밀한 사이였다. 아마도 학교 근처에서 같이 자취하는 처지였던 게 인연이었던 듯하다. 명숙도 지방에서 올라온 유학생이었고, K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병상련이랄까. 명숙은 K에게 은근히 잘 대해줬다고 한다. 예를 들면, 담근 김치를 나눠준다든가, 혹은 감기약을 사다주는 정도. 물론 둘 사이에는 무슨 연애감정 비슷한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K와 명숙은 서로의 관심사가 전혀 달랐다. 명숙은 대자보를 붙이고 집회에 참가하느라 바빴고, K는 미팅 건수를 찾아다니기에 바빴다. 하여 그 시절, 아무도 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명숙의 자취방과 K의 자취방은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고, 둘은 친한 동창사이였다는 것이 관계의 전부였다고 K는 술회했다.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둘은 종종 연락을 취해왔고, K는 결혼식 소식도 청첩장이 아닌 그녀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K가 우리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그런 연유였다. K는 기꺼이 축하해주었으며 명숙은 그에 감사했다.


그녀의 결혼식의 전야에, K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퇴근해서 TV를 좀 보다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야. 무슨 말소리가 같기도 하고, 또 문짝이 삐그덕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처음엔 아주 작은 소리였단다.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종종 오래된 냉장고에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기도 했고, 방음이 좋지 못한 오래된 아파트 벽면을 통해서 옆집 부부의 싸움 소리가 종종 들려오기도 했던 터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작은 소리는 그것들과는 구별되는 무엇이었다. K는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올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 K는 다시 눈을 떴다. 묘하게도 그 작은 소리는 K의 신경줄을 팽팽히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K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돌면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귀를 가져다 대보기도 하고, 방바닥과 벽에 차례로 귀를 기울여도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방안의 모든 사물들이 시치미를 떼는 것처럼 느껴졌다. K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불을 끄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자 다시 그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좀더 확성되어 있었다. 무슨 말소리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 사이의 대화였고, 그 중 하나는 남자, 또 하나는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잠이나 잘 것이지··· K는 투덜거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 두런거림은 끈질기게 잠으로부터 K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있었다. K는 결국 몸을 뒤채며 괴로워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두런거림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때쯤 그 목소리들은 어렴풋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확성되어 있었다.


- 아무 말도 하지마! 아무 말도 듣지 않겠어.


- 미안해···


침묵. 잠시 후에 다시 여자의 목소리


- 네 잘못이 아냐. 내 탓이었어.


또 침묵. 이윽고 여자의 가라앉은 목소리.


- 어차피 처음도 아냐. 난 상관없어.


또 침묵. 남자의 목소리.


- 나도 그래. 네가 처음은 아냐. 예전에···


- 내게 그런 말을 할 필요 없잖아?


또 침묵.


거기까지 듣고 있다가 K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 일인지 둘 사이의 대화가 낯익었다. 적이 묘한 기분이 되었다. K는 다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좁은 집안을 돌아다녔지만, 역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분명 옆집에 살고 있는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여편네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K는 다시 불을 끄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침대에서부터 새어나오는 소리였던 것이다. 베개를 치우고 귀를 매트에 밀착시키자, 이내 그 소리는 확연하게 들려왔다.


- 우리 아직도 친구지?


여자의 목소리.


- 응.


남자의 대답.


- 그럼 됐어. 어젯밤의 일은 서로가 실수를 한 거야.


- 그래, 실수···


- 설마 하룻밤 같이 잤다고 해서 날 책임지겠다고 당찮은 소리를 나불거리지는 않겠지?


다시 침묵. 그 끝에 여자의 목소리.


- 어젯밤에 너 너무 마셨더라. 그래서 그랬던 거야. 애초에 별다른 감정 따윈 서로간에 없었어. 안 그래?


- 그래, 어제 너무 마셨지. 모든 게 다 이 침대 때문이야.


- 그래, 침대 때문이야. 이 침대가 좀 묘했어.


순간, K는 섬뜩한 한기와 아찔한 현기증을 한꺼번에 느꼈다. 침대가 토해내는 K 자신조차 잊고 있던 기억, 어쩌면 의도적으로 지워버렸을 윤명숙과의 추억이었던 것이다.


- 없었던 걸로 해. 괜히 서로 어색해지는 거 싫어.


- 그래···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아주 오래 전 일이었어. 다 잊어버렸는데··· 정말로 새카맣게 잊고 있었는데···”





때는 바야흐로 봄, 그들은 대학교 2학년이었다.


K는 궁색한 자취방 살림에 호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 1인용 침대를 하나 사들였다. K는 아주 검소한 청년이었다. 학교 근처의 술집에 외상을 긋는 일도 없었고, 머리도 단지 싸다는 이유만으로 꼭 교내 이발소에서만 깎았다. 그런 그가 삼십 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새 침대를 구입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량한 아르바이트비로 받은 돈을 들고 티셔츠 몇 벌을 사러 시장엘 나갔다가 가구대리점 쇼 윈도우에 진열되어 있는 그 침대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세일가격과 주머니의 돈이 거의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대뜸 들어가서 침대를 사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비좁고 너저분한 자취방의 삼분의 이를 차지해버린 침대를 들여놓고 나서 K는 곧장 후회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비좁은 방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고, 용돈은 거의 바닥나 있었던 것이다. 무엇엔가 단단히 홀린 게지··· K는 호사스런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피휴, 내쉬고 있었다.


“문이 열렸네? 어 이게 뭐야?”


자취방에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윤명숙이었다. 그녀는 빌려간 책(책 제목은 기억에 없다)을 돌려주려고 K의 자취방에 들어섰다가 침대를 보고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으응, 침대야.”


K는 침대를 사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었고, 그녀는 쿠션을 시험하듯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침대 위에 앉아서 그 얘기를 들었다.


“잠시 내가 뭔가에 홀렸지. 한달 생활비를 다 털어 넣었으니, 이젠 거지로 한 달을 버텨야 할 신세야.”


K는 탄식했다. 그러나 그녀는 K의 투덜거림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침대에 드러누워도 보고, 팡팡 손바닥으로 튕겨도 보고, 또 매트리스 표면을 쓸어대기도 하면서 무척 흡족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난 이 침대가 무척 맘에 들어.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하는 건 어때?”


그녀의 제안인즉슨 K는 침대를 사느라 생활비가 떨어졌고, 그녀 자신은 이 침대가 무척 맘에 들었으니, 자신이 K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하는 대신 자신이 이 침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좀 이상한 거래였다.


“물론 네가 쓰고 싶을 때엔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어. 밤에도 내 방에서 잠을 잘 테고. 다만 주말이나 강의가 비는 시간에 잠깐씩 와서 쉴 수만 있으면 돼. 물론 아침식사나 점심은 네가 해결해야 되지만, 저녁식사는 내 방에 차려줄 수 있어. 이래 뵈도 내 음식솜씨는 좀 괜찮은 편이야. 어때?”


K는 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눈앞이 캄캄하던 참에 저녁끼니 걱정을 덜 수 있다는 점에 맘이 끌려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래가 성립된 셈이었다.


그 뒤 그녀는 정말로 K에게 맛있는 저녁식사를 제공했다. 게다가 덤으로 K가 방을 비운 사이에 방을 청소해주기도 했고, 침대 시트를 정돈해 주었다. 그야말로 우렁각시 같았다. 물론 약속대로 그녀는 K의 침대를 이용하긴 했다. 하지만 K가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K가 방을 비운 사이에 그녀는 K의 침대를 이용했던 것이다. K는 다만 시트에 남아 있는 미미한 화장수 냄새 따위로 그녀가 침대를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거래는 순조로웠다.





“그러다가 일이 벌어진 거야. 너무 방심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쨌든 모르겠어. 분명한 건···”





문제의 그날, K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밤늦게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모로 드러누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K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K는 하는 수 없이 침대와 책상 사이의 비좁은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과음을 한 탓에 무척이나 피곤했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K는 다시 일어났다. 비좁고 딱딱한 바닥에서는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K는 편안하게 침대 위에서 잠을 자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연히 침대의 주인은 K 자신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주인인 자신이 비좁고 딱딱한 방바닥에서 자야한단 말인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K는 다시 그녀를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깨어날 기세가 아니었다. 괜히 부아가 일었다. K는 그녀를 어깨로 밀쳐내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침대의 주인은 엄연히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침대는 비좁고 딱딱한 방바닥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1인용이었던 탓에, 그녀와 둘이서 잠을 자기에는 역시 불편했다. 몸의 일부분이 겹쳐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불편한지 몸을 틀어 K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K는 그녀의 숨결을 고스란히 얼굴로 받아내야 했다. 자꾸 간지러웠다. 하지만 피하려고 해도 피할 곳이 없었다. 적어도 침대에서 잠을 자기 위해서는.


기묘한 광경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녀의 몸은 K와 거의 맞붙어 있었다. 잠이 올 턱이 없었다. 숨결은 안면을 계속해서 자극했고, 이젠 익숙한 것이 되어버린 화장수 냄새가 그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K는 비좁은 침대의 모서리에 겨우 몸을 걸친 채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처럼 불편하다거나 울화가 치밀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그녀의 몸과 맞붙어 있다는 사실이, 문득 아주 오래 전에 그랬던 적이 있는 것처럼 낯익었다. 그리고 그녀의 향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K의 모든 감각은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냐?”


내가 묻자 K는 조금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네놈이 상상하는 거랑 똑같은 일이 벌어졌지. 다음날 아침에 서로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고. 아직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딱히 품을 마음도 없었는데 말야.”


“정말 그랬을까?”


내가 다시 물었다.


“그래. 하여간 그 뒤로 명숙이는 다시 침대를 이용하지 않았어. 뭐 처음엔 좀 서로 어색했지. 괜히 서로 피하기도 하고. 하지만 뭐,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됐어. 너도 알다시피 윤명숙은 나와 아직도 절친한 친구 사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K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까마득히 잊고 있었거든. 근데 침대에서 그 옛날에 우리가 했던 대화가 튀어나온 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질 않아. 그게 말이 되냐?”


“물론 말도 안되는 얘기야.”


나는 대답했다.


“아무래도 침대를 갈아치울 때가 된 것 같아. 요즘들어 잠자리가 좀 불편했거든. 스프링도 예전 같지 않고. 재활용 센터에다가 넘겨야겠어.”


K는 무슨 결심이라도 하듯 진지한 어조로 말하고는 맥주를 마셨다.





얼마 뒤에 나는 다시 K를 만날 수 있었다. K는 여전히 무척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통 잠이 오질 않아.”


K가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문득 그날의 일이 떠올라서 물었다.


“침대는 바꿨냐?”


“그래, 바꿨지.”


“근데 왜?”


“글쎄, 나도 모르겠어. 이젠 침대에서 이상한 소리도 나지 않는데 말야, 통 잠을 못 자. 그 침대를 바꾼 뒤로는.”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K는 아주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역시 침대가 문제야. 재활용 센터에 넘기고 나서도 영 개운치가 않아. 꼭 중요한 비밀 하나가 새어나간 기분이랄까··· 이상한 일이야.”


“추억 없이 잠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나는 그렇게 주절거리고는 맥주를 마셨다. K는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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