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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밟

데제네라툼 (타락)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BALB
작품등록일 :
2018.01.17 23:19
최근연재일 :
2018.01.30 08:00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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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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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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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ACT I. 천사와 악마 : 3장. 진실 앞에서(2)

DUMMY

길고 끔찍했던 콘 토라오가 끝나자 어느새 서쪽 숙소의 첨탑들과 종탑 사이로 붉은 해가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여전히 에르베의 전서구는 소식이 없었다. 에르미오는 찝찝한 마음에 저녁식사를 마치는 대로 곧장 수도원장실이 있는 남쪽 건물로 향했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복도에 듬성듬성 놓여있는 화로의 불꽃이 좌우로 요동쳤다.


「똑 똑 똑」

수도원장실 앞에 도착한 에르미오는 망설임 없이 문을 노크했다. 하지만 문 너머에서는 어떠한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똑 똑 똑」

“아베오 형제님, 에르미오입니다.”

문을 다시 두드려 보았지만 여전히 문 너머로는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누구십니까?”

그가 다시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복도 끝에 수도복을 입은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에레임-알-오라스토 형제님, 에르미오입니다.”

에르미오가 먼저 인사를 건네며 자신을 밝혔다. 괜한 의심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베오 형제께서는 안 계시니 다음에 오십시오.”

수도복의 남자가 에르미오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큰 덩치, 그는 일반적인 사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다부진 체구의 사내였다. 냉정한 말투와 표정, 회색 수도복과 허리춤에 차고 있는 쇠몽둥이를 보아 그가 수호사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따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호사제는 종종 발생할 수 있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지하고 사제를 포함한 수도원 내의 사람들을 각종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사제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정식적으로 수도사제 임명을 받은 신교 사제들 중 신체적 조건이 뛰어난 자들은 수호사제로 선별되었는데, 이들은 성기사들을 양성하는 교황청 직속의 기사학교로부터 교육을 받은 뒤 각지의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사실 수도원을 지키는 원래의 임무보다는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큰 죄를 저지른 사제들을 적발하여 「정화의식」이라는 이름의 끔찍한 고문을 행하거나 필요시 사제들에게 「벌」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비밀스럽고 구린내 나는 일들을 행할 때가 더 많았고, 따라서 교단이나 수도원의 명성에 해가 되지 않도록 부재가 되는 순간 교황청으로부터 이름을 수여받는 다른 사제들과는 다르게 개인적인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또한 어찌된 일인지 수도사제들은 교황청의 기사학교에 다녀온 뒤로 하나같이 감정이 메말라버린 표정과 말투를 가지게 되었기에 수도사제들은 수호사제들을 수도원을 지켜주는 「수호자」와 같은 존재보다는 자신들을 감제하고 통제하는 「감시자」와 같은 존재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아, 그렇군요. 혹시 어디에 계신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조금 급한 용무가 있어서 말이죠.”

에르미오가 물었다.

“황제폐하와 교황님을 뵈러 레간티노플로 떠나셨습니다.”

수호사제가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언제쯤 떠나신 겁니까?”

“오늘 늦은 오후쯤 출발하셨습니다.”


주교가 레간티노플로 떠난 것이 오후쯤이라는 수호사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베오 주교는 분명 에르베의 편지를 읽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전서구가 수도원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막 지났을 때쯤이니까. 하지만 왜 아직도 전서구는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일까?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에레임-알-오라스토.”

에르미오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수호사제의 말에 대답했다.

“라-에레임-파판토스.”


수호사제에게 인사를 건넨 에르미오는 곧장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철저한 성격의 아베오 주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예정되어있지 않은 외출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미사나 콘 테르베를 인도하는 사제들에게 항상 자신의 외출을 사전에 통보해 왔다. 그런 주교가 아무런 말도 없이 급히 레간티노플로 떠났다는 사실은 의구심을 품기에 충분했다. 에르베의 전서구가 수도원에 도착했지만, 지금껏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것은 그의 편지에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될 내용이 적혀있기 때문이며, 주교가 급히 수도로 떠난 것도 에르베가 보낸 편지와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에르미오의 머릿속을 스쳤다.

서둘러 에르베의 편지를 찾아야만 했다.


목적지를 찾은 듯 에르미오의 발걸음이 갑작스레 빨라졌고, 그는 잠시 후 수도원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별관 앞에 섰다.

그가 별관 문을 벌컥 열자 방 안에 있던 하녀들이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별관은 하녀들의 숙소로, 사제들이 출입할 수 없는 수도원의 금지구역 중 하나였다.

사제의 금지구역 출입은 그 사실 만으로도 지금까지의 모든 엑사돌라르가 무효가 되며, 독방에 갇혀 「정화의식」을 받을 수도 있을만큼 굉장히 무거운 죄에 속했기에 하녀들이 놀리는 것은 당연했다.


“사제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죠?”

큰 솥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던 짧은 머리의 중년여자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일이라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혹시 모네아 자매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에르미오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옆방의 벽난로 앞에서 무언가를 닦고 있는 짙은 갈색머리의 여자에게 소리쳤다.

“모네아! 수사님께서 널 찾으시는구나.”


“에르미오 수사님? 여긴 어떻게···?”

목소리를 듣고 방에서 뛰어나온 모네아는 에르미오를 보자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매님.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르미오가 대뜸 묻자 그녀는 밖으로 나가자는 그의 눈짓을 알아챈 듯 말을 멈추고 에르미오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얼마나 급한 일이시기에 여길 오신 거예요? 수호사제들께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모네아가 주위를 살피더니 다그치듯 물었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자매님, 수도원으로 오는 전서구들이 어디로 모이는지 알고 계십니까?”

에르미오는 그녀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었다.

“글쎄요. 수사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저희도 「검열」을 받는 입장이라···.”


에르미오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자매님, 긴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떤···?”

“급하게 찾아야 할 중요한 편지가 있습니다. 전서구가 도착하는 것을 오늘 보았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요. 아마도 아베오 형제께서 제 편지를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는 제가 아니라 원장님께 직접 말씀 해보시는 게···.”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아베오 형제님을 찾아뵈러 수도원장실에 갔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레간티노플로 떠나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요?”

“분명 수도원장실에 그 편지가 있을 겁니다. 자매님들께서는 수도원 열쇠를 모두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맙소사! 설마 지금 저더러 주교님 방에서 편지를 훔쳐달라는 말씀이세요? 금지구역인 이곳에 오신 것도 모자라 그런 위험한 말씀을 하시다니···.”

“하지만―”

“그만하세요! 누군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한다면 저희 둘 다 목숨이 달아날 수 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 자매님들께서는 제가 잘 설명 할 테니 그만 돌아가 주세요.”


모네아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망설임 없이 별관을 향해 돌아섰다.

“잠깐만요 자매님!” 에르미오가 소리쳤다.

“그 편지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원장님이 돌아오실 때 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건 정말로 아닌 것 같아요.”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 형제님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요. 테실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습니다.”


“테실리아요?”

에르미오의 입에서 테실리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모네아는 에르미오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베오 주교는 수도원의 아이가 끔찍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수도원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제들 이외에는 알 수 없도록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지만, 매일 수도원 곳곳에서 일을 하는 하녀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오래 전부터 에르미오의 방청소를 담당하고 있던 모네아는 누구보다 테실리아에 관한 일을 잘 알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2주마다 오던 에르베 형제님의 전서구가 지난달을 끝으로 오지 않아 몹시 편지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회색 강당으로 가던 중 그의 전서구가 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편지를 못 받으셨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직 못 받으셨다면 검열에 걸린 게 분명하네요. 하지만 테실리아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 생각하시는 거죠?”

모네아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물었다.

“그 아이를 수도로 보낸 이후 받은 편지들이 검열에 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 하필 아베오 형제께선 에르베 형제님의 전서구가 도착한 날, 콘 테르베를 인도하고 있는 제게 아무런 말씀도 없이 급히 수도로 가신 걸까요? 분명 제게 온 편지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르미오의 말에 침묵하던 모네아는 몹시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기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충분히 이해했어요. 하지만 수사님은 이 일이 제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을지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은 있으신가요? 하네스테드 밖에 있는 제 가족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는 일이에요.”


모네아의 말에 에르미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짧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에르미오는 다급한 나머지 모네아가 자신의 부탁을 실행하다 발각되었을 때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일을 부탁한 에르미오 역시도 수호사제들에 의해 처벌을 받겠지만, 사제 신분이 아닌 모네아는 이야기가 달랐다.

만약 신도 신분인 그녀가 수도원장실에서 무언가를 훔친 것이 밝혀진다면 그녀의 목숨은 당연하고 하네스테드에 살고 있는 그녀의 가족들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사제와 신도는 확실히 다르니까.

그러나 비록 이기적일지라도 에르베가 보낸 전서구의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지금, 그녀는 수도원장실을 마음껏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녀 신분인 그녀는 사제들에 비해 수도원 내에서의 움직임에 크게 제약을 받지 않았고, 설령 그녀가 청소도구들을 가지고 수도원장실을 드나드는 것이 수호사제들의 눈에 띈다 한들 대수롭지 않게 여길 가능성이 높았다.


“무척 이기적인 부탁이라는 것도, 사제가 신도에게 할 만한 부탁이 아닌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제겐 중요한 일입니다. 자매님,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모네아는 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는 에르미오를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도와드릴게요.”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르미오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낮게 소리쳤다.


“그 아이가 참 가엾다고 생각했었어요.”

“네?”

“테실리아 말이에요.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있다지만, 그 아이는 스스로 선택할 기회조차 없이 꼼짝없이 이곳에서 살게 된 거잖아요. 게다가 그런 끔찍한 병까지 앓게 되다니···.”

모네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말에 에르미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생각했다. 에르미오는 그저 버려진 갓난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테실리아를 수도원으로 거두었던 것이지만, 어쩌면 오히려 평범한 가정에 맡겨졌다면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던 아이에게 성직자라는 운명을 멋대로 정해버린 무책임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에르미오의 가슴 한 쪽이 무거워지는 듯 했다.


“테실리아의 일이니 특별히 도와드리는 거예요. 발각되어서 저희 둘 다 곤란해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어려운 선택이셨을 텐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에르미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전 수사님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대가로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니까요.”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제게 면죄부를 주세요.”

그녀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에르미오의 눈동자가 놀란 듯 흔들렸다.

“요즘 콘 테르베를 인도하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면죄부 하나 쯤 제게 주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죠.”

“하지만 면죄부는―”

“네네, 사제가 멋대로 신도에게 면죄부를 주는 게 커다란 죄라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제 목숨을 걸고 있는걸요.”

그녀가 에르미오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에르미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만약 그가 그녀의 조건을 거절한다면 그녀 역시도 에르미오의 부탁을 틀림없이 거절할 것이다.


에르미오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좋습니다. 면죄부를 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금방 허락하시니 좀 놀랍네요. 좋아요. 전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곧장 원장님 방으로 갈 테니 수사님께서는 방에서 제게 줄 면죄부를 준비하고 계세요. 만약 주교님 방에 편지가 없다면 수사님 방문을 세 번, 편지를 발견했다면 두 번 두드린 뒤, 문 아래의 틈 사이로 편지를 넣을 테니까요. 그 때 수사님께서도 제게 면죄부를 주시면 되는 거예요. 어때요?”

“···네, 좋습니다.”

에르미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곧장 뒤돌아 별관을 향해 걸어갔다.


“자매님, 혹시 면죄부가 필요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에르미오가 뒤돌아선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전까지 저희가 콘 테르베를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꼭 제가 수사님께 제 죄를 고백해야하나요?”

모네아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처럼 일반적인 사람들은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죄를 종종 저지르곤 한답니다. 저희는 사제님들과는 다르게 나약하거든요. 하지만 턱없이 비싼 면죄부의 가격 때문에 그 죄를 씻을 기회조차 없어요. 돈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도 못하는 세상이거든요.”


“그건···죄의 경중에 부합하는 노력을 통해 죄를 씻으라는 에키라의 율법에 따라―”

“그래서 그의 목숨을 스스로 끊게 만드신 건가요?”

그녀가 다시 에르미오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돈지 부족하단 이유로 면죄부를 받지 못했던 가엾은 피에르 씨 말이에요. 듣자하니 이웃과 다투고 그 집의 가축들을 다 죽여 버렸다던데···.”


에르미오의 눈이 순간 커다랗게 변했다. 두 달 전, 자신에게 이웃의 텃밭을 파헤치고 가축들을 죽였다 고백했던 콘 테르베 때의 남자가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고작 50에피도 안 되는 돈을 들고 와서 면죄부를 받길 원했던 그 남자가 분명했다.


“설마―”

“한동안 시끄러웠던 이야기인데 아직 모르고 계셨다보네요. 지난 달 수도원 정문 앞의 나무에서 그가 스스로 목을 맸어요. 그의 목에는 「5레기온과 면죄부가 날 살해했다.」라는 팻말이 걸려있었고요.

“맙소사···.”

“5레기온이라니···저희 같은 하층민들은 상상도 못할 금액이에요.”

모네아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에르미오는 머리를 커다란 몽둥이로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하니 선 채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대체 왜 면죄부를 돈으로 사야만 죄를 씻을 수 있는 겁니까?」라고 외치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하신 대로 이따 뵐게요.”

모네아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에르미오에게 말을 남기고는 별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세게 닫혔지만, 그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다시 느껴지는 수도원의 고요함과 함께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5레기온과 면죄부가 날 살해했다.」라는 문장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니다. 어쩌면 그를 살해한 건 에르미오 자신일지도 몰랐다. 에르베의 편지를 얻기 위해 모네아에게 면죄부를 팔아넘기는 것은 곧잘 결정하였으면서도, 진심어린 속죄를 위해 콘 테르베를 신청한 남자에게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해 버렸던 자신의 이중성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이미 사제로서의 자격을 상실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르미오는 몸이 무언가에 의해 더럽혀진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처음 에르베의 전서구를 보았던 동쪽 숙소 쪽으로 향했다.


밤이 깊어 수도원은 이따금씩 북쪽의 숲 속에서 들려오는 부엉이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 때문인지 에르미오는 수호사제들의 순찰을 피해 건물 밖의 정원으로 걷고 있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뾰족한 첨탑 두 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동쪽숙소 근처에 도착한 에르미오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랜턴이나 화롯불이 없는 정원은 무척 어두웠다. 건물 안의 불빛에 비친 어렴풋한 형상만이 보일 뿐이었다. 한참 동안 신중하게 바닥을 두루 살피던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에르미오는 무언가 홀린 듯 건물 복도를 따라 늘어서있는 기둥들 중 하나에 다가갔다. 한 쌍으로 아치를 이루고 있는 기둥의 아래쪽에 짙은 얼룩이 흩뿌려진 듯 묻어있었다.

그는 얼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후 무의식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였다.


에르미오는 무언가에 홀린 듯 기둥 주위의 수풀 근처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불길한 추측대로 수풀 속에는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이 섞인 비둘기 깃털들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맙소사, 베네누아 브-헬로스···.” 그가 중얼거렸다.


에르베의 편지는 「검열」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검열을 위해 전서구를 죽이지는 않으니 말이다. 분명 누군가가 애초부터 에르미오에게 편지가 배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서구를 죽이고 편지를 가로챈 것이 분명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에르베의 편지에 담긴 내용은 무척 중요한 것이며, 수도원에는 에르미오가 그 편지를 읽기 원하지 않는 누군가가 존재하고, 만약 모네아가 수도원장실에서 에르베의 편지를 발견한다면, 그 누군가는 바로 아베오 주교일 것이라는 에르미오의 추측이 더욱 확실해졌을 뿐이었다.


반드시 편지를 찾아야만 했다.

어떤 내용이기에 이런 짓을 하면서 까지 편지의 배달을 막으려 한 것일까? 지금 당장은 모네아가 수도원장실에서 편지를 찾는 데 성공할 수 있기를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원 쪽에서 어렴풋이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그는 서둘러 자리를 피해 자신의 침실로 조심스레 향했다.


(계속)


작가의말

연재가 조금 늦었군요.

이번 화는 ‘죄가 죄를 낳는다.’ 라는 말이 어울리는 화였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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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CT I. 천사와 악마 : 1장. 소녀와 신부(4) +1 18.01.21 81 3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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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CT I. 천사와 악마 : 1장. 소녀와 신부(1) 18.01.18 116 1 8쪽
1 프롤로그 18.01.17 167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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