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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밟

데제네라툼 (타락)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BALB
작품등록일 :
2018.01.17 23:19
최근연재일 :
2018.01.30 08:00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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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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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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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ACT I. 천사와 악마 : 2장. 벤(6)

DUMMY

프레이드린과 벤을 등에 태운 거대한 은빛 매 「람」은 이름 모를 거대한 바위산의 능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활강했다. 하늘을 찌를 듯 위압적으로 솟구쳐 있는 울퉁불퉁한 바위산의 아래에는 횡으로 굽이쳐 흐르고 있는 넓은 강이 달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고, 강의 맞은편에는 통나무 울타리로 만들어 놓은 작은 마을이 보였다.

마을을 밝히고 있는 은은한 불빛들은 마치 땅에 박혀있는 작은 반딧불이 떼들처럼 보였다.


“다 왔구나.” 마을을 내려다보며 프레이드린이 말했다.

람은 마치 목적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마을과 강 사이에 놓인 석조 다리의 맞은편 길에 다다르자 정면을 향해 날개를 활짝 펴 속도를 줄인 뒤 부드럽고 정확하게 그곳에 내려앉았다.

강과 다리 근처에 깔려 있던 옅은 밤안개가 람의 묵직한 날갯짓에 어스름 속으로 조용히 흩어졌다.


“첫 비행은 어땠니?”

람의 등에서 먼저 내리던 프레이드린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척 근사했어요. 엄청나게 춥다는 것과 엉덩이가 깨질 것 같다는 것만 빼면요.”

그녀를 따라 람의 등에서 내려오려던 벤이 코를 찡긋하며 대답했다. 벤은 땅에 발이 닿지 앉자 람의 등에 난 깃털을 붙잡은 채 버둥거리다 땅에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키를 자라게 하는 옵스는 없나요?”

벤이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 프레이드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물론 할 수 있지. 하지만 무척 고통스러울 텐데 괜찮겠니? 먼저 네 뼈를 모조리 산산조각 내야 하거든.”

“아, 아니에요. 농담이었어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프레이드린을 향해 벤이 다급히 말했다.


다리너머 강의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의 입구에는 가죽 투구를 쓴 경비병들이 횃불아래에 선 채 웃으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저기가 네우드인가요?” 벤이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물었다.

“그렇단다.”

“저렇게 작은 마을에도 경비병이 있네요. 경비병은 엘름게이트처럼 큰 마을에만 있는 줄 알았어요.”

“저들은 경비병이라기 보단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며 입구를 지키는 자경단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게다. 저렇게 작은 마을들은 큰 도시에 비해 오히려 산적들의 습격이 더 잦거든.”

프레이드린이 람의 가슴에 난 깃털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람의 부리 위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 중얼댄 뒤, 가볍게 입을 맞추자 람은 날개를 활짝 피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작은 나무 조각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고, 허공에서 마치 활강을 하듯 천천히 그녀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두 번째로 보는 거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요.”

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하자 프레이드린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도 될 것 같구나.” 그녀가 말했다.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펜던트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인베지오 멘투라」

벤이 주문을 나지막이 외치자 처음 모습을 숨길 때와 같이 옅은 바람소리와 함께 얇은 천이 몸을 감싸고 있던 느낌이 곧장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프레이드린은 목에 두르고 있던 천을 올려 코와 입을 가렸다.


벤과 프레이드린이 다리 입구에 다다르자 「네우드」라 새겨진 낡은 이정표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마을 입구의 경비병 두 명이 다리를 건너는 프레이드린과 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디서 왔소?”

두 명의 경비병들 중 나이가 꽤 많아보이는 쪽이 프레이드린에게 물었다.

“데르가에서 왔어요. 저는 목동의 딸이고 여긴 제 조카에요. 조카와 벨로토르까지 가야 하는데 날이 어두워져 묵을 곳이 필요해서요.”

프레이드린이 능청스레 말했다.


“멀리서 왔군. 잘 왔소.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이런 때에 아가씨와 꼬마 단 둘이 마을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 말이오.”

“소문이라뇨?” 프레이드린이 물었다.

“엘름게이트를 통해서 오지 않았나 보군. 엘름게이트 외곽에 선술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 사람들이 죄다 끔찍하게 살해당했다지 뭐요. 게다가 선술집 주인장이 데려다 키우던 꼬마 하나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상하게도 그 녀석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더군.”

“맙소사.”

프레이드린이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꼬마가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겠지만, 그 곳에서는 말썽꾸러기로 꽤 소문난 녀석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들 그 꼬마를 찾는 중인 것 같습니다. 머리색이···특이하게도 회색빛이라고 하던데···.”

이번엔 나이가 젊어 보이는 경비병이 말했다. 벤은 그가 「머리색이···.」라는 부분에서 말끝을 흐리며 자신을 힐끔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언제 그런 끔찍한 일이 생겼다죠?” 프레이드린이 화제를 돌리려는 듯 물었다.

“모르겠수다. 당신네들이 여기 오기 전에도 엘름게이트에서 어떤 양반이 왔었는데, 우리도 그자에게서 전해들은 얘기라서 말이지.”

나이가 많아 보이는 쪽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프레이드린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어쨌거나 잘 왔소. 이렇게 작은 마을을 찾는 사람은 잘 없으니 여관방은 충분할 게요.”

“고맙습니다.”

벤은 프레이드린을 따라 인사한 후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에 들어서자 가족들의 선명한 대변냄새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코를 묵직하게 때려왔다. 추운 날씨 탓인지 마을 거리에서 서성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고, 마을 거리를 중심으로 양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목조 집들의 창문너머로 랜턴 불빛들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벤과 프레이드린은 마을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유난히 폭이 좁은 2층 목조 건물 앞에 섰다. 건물 앞의 간판에는 「꿈꾸는 나무 여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잎이 다 떨어진 여러 그루의 굵직한 나무들이 여관을 금방이라도 휘어감을 듯 자라 있어 여관 이름을 더욱 그럴 싸하게 보이게 했다.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지가 가득한 술병을 닦고 있던 뚱뚱한 여관주인이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쇼. 두 명입니까?”

“네. 여긴 제 조카인데, 같이 묵을 수 있는 방이 있을까요?”

프레이드린이 대답했다.


“물론입죠. 저녁식사는 하셨습니까?”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여관 주인은 누런 이를 내보이며 가식적인 웃음을 짓더니 선반 아래에 있던 열쇠를 하나 꺼내들며 물었다.

“식사는 괜찮아요. 많이 피곤해서요. 방이 어디죠?”

여관주인은 아쉽자는 듯 쓴 웃음을 짓더니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벤과 프레이드린이 묵을 방은 2층에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금 넓은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가 전부인 방의 내부가 보였다.

“두 명이서 쓰기엔 충분할겁니다. 20왈다만 주십쇼.”

여관주인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프레이드린이 품속에 있던 주머니에서 10왈다짜리 은화 두 개를 꺼내 여관주인에게 건네주자 그는 열쇠를 건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편안히 쉬십쇼. 그럼 이만.”

여관 주인이 방을 나가자 벤은 메고 있던 배낭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프레이드린 역시도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았다.


“휴, 조마조마 했어요. 엘름게이트 사람들이 절 찾고 있다는 건 아마도 절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벤이 가죽 신발의 끈을 풀며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네 말이 맞겠지만, 아직은 마을 경비병이 했던 말을 온전히 믿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왜죠?”

“경비병들에게 선술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말해 준 자는 엘름게이트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럼 설마···.”

“그래. 선술집에서부터 우리를 지켜보던 자가 분명해.”

프레이드린이 얼굴을 가리기위해 둘렀던 천을 풀며 말했다. 어두운 밖에서는 미처 자세히 보지 못했었지만 그녀는 백옥 같이 흰 피부에 타오르는 듯이 붉고 풍성한 머리카락과 어두운 붉은 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의 여성이었다.

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거니?”

“아, 아니에요.” 벤이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엘름게이트의 영주도 오늘 페어볼그 선술집에서 일어난 일은 아직 모르고 있을 거다. 우리보다 이곳에 먼저 도착한 그자들의 동료가 널 찾으려고 서둘러 경비병에게 소문을 퍼뜨린 것 같구나. 네 머리카락 색을 바꾸길 잘했어.”


벤은 프레이드린의 말을 듣고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벽에 붙어있는 작은 거울로 향했다. 벤은 까치발을 하고 거울을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벽에 걸린 거울을 보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프레이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벤에게 의자를 내 주었고, 거울 속 벤의 머리카락은 정말로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갈색 빛으로 감쪽같이 바뀌어있었다.


“정말 근사해요! 그런데 이 옵스는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예요?”

한참 동안이나 머리카락을 만지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벤이 물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그녀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정말요? 맙소사!”

벤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난 잠시 바깥엘 좀 다녀오마.”

프레이드린이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디 가시게요?”

“그자를 좀 만나봐야겠어.”

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걱정 말거라. 그래봤자 에스테의 광신도일 뿐이니까.”

“에스테라뇨?”

“오늘 선술집에서 그런 짓을 벌인 자들은 모두 에스테 정교회라는 종교의 사제들이란다.”


“사제들이 왜 그런 짓을···?”

벤이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는 다른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단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줄곧 그래왔어.” 프레이드린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에스테 사제들이 널 찾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다. 하지만 그 이유는 나조차도 잘 알지 못해. 지금 그 자를 만나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조심하세요.”

“괜찮아. 그리고 많이 피곤할 텐데 먼저 자거라. 조금 늦을지도 모른단다.”

말이 끝난 프레이드린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


여관의 객실 중 하나에서는 한 남자가 침대에 기대어 앉아 에키라를 읽고 있었다. 그가 읽고 있는 에키라의 한쪽 표지에는 일곱 개의 손가락을 가진 은빛 손바닥 자국이 찍혀있었다.

「로고스시여. 형제들의 주검도 찾지 못하게 한 불경한 아르케인 이교도와 그들의 저주받은 아이를 찾도록 저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남자가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로 무언가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흰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뻘겋게 충혈 되어있었고, 에키라를 잡고 있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똑 똑 똑」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자 남자는 황급히 에키라를 덮고 빠른 동작으로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단검을 들고 있는 손을 허리 뒤로 숨긴 채 조심스레 문을 열자, 문 앞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남자가 미처 다 열지 않은 문틈 사이로 그녀를 훑어보며 경계하듯 물었다.

「늦은 밤에 실례지만, 혹시 에스테 신부님이신지요?」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에레임-알-오라스토, 신부님.」

「라-에레임-파판토스, 에스테 자매님이십니까?」

남자는 그녀가 가이델어로 에스티 식 인사를 건네자 경계를 늦춘 듯 단검을 다시 허리춤에 숨기며 같은 에스테 식 인사로 대답했다.


「···저는 레아라고 합니다. 레가텀 남부 트레스테그에서 태어나 사냥꾼인 에윌리스 남자를 만났고, 이곳 네우드로 시집을 왔죠. 에스테 신부님께서 저희 마을에 들리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꼭 드릴 말씀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신부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일단 들어와서 말씀하시는 게 좋겠군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심상치 않은 이야기인 것을 느낀 남자는 주위를 살피더니 일단 그녀를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편히 말씀하십시오.」

「음···의외네요. 에스테의 율법이 이렇게 개방적인 줄은 몰랐거든요. 사제가 한밤중에 여자를 침실로 들이다니···.」

방에 들어온 여자가 미소를 짓더니 로브에 달린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그녀의 후드 아래에 감춰진 풍성하고 긴 붉은 머리가 찰랑거리며 어깨위로 흘러내렸다.


「그게 무슨 말―」

남자가 당황한 듯 말을 꺼내려던 찰나, 여자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며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았던 그녀 뒤의 문이 소리를 내며 저절로 잠겼다. 남자는 무언가 짐작한 듯 다시 황급히 단검을 꺼내들며 소리쳤다.


「네. 네년이 우리 형제들을 죽이고 꼬마를 빼돌린 그 미개한 아르케인 이교도년이로구나! 뱀 같은 그 혀로 잘도 날 속이다니―」

「미개한 아르케인?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네놈들의 말버릇은 여전하군.」

프레이드린이 불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년을 죽이고 형제들의 원수를 갚겠다!」

남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레이드린을 향해 단검을 내질렀지만 그녀는 재빨리 손바닥으로 그의 단검을 막아냈다.

프레이드린의 손바닥에 닿은 단검의 날은 마치 달구어진 철판에 떨어진 얼음덩어리처럼 연기를 내뿜으며 그대로 뭉그러졌다. 남자의 표정이 놀라움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많이 놀란 표정이군.」 프레이드린이 손바닥을 가볍게 털어내며 말했다.

「네 녀석들이 아르케인들에 대해 얼마나 깊은 공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죄다 헛수고였어. 은으로 된 무기가 아르케인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네놈들이 지금껏 살해해 왔던 수많은 아르케인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내겐 아니거든.」

프레이드린의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에 두려움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내 차례인가?」

그녀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빛이 감도는 눈동자로 남자를 노려보자 남자는 품속에서 검은빛을 띤 알약 하나를 꺼내더니 그것을 재빨리 입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프레이드린의 손가락이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자 뼈가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알약을 쥐고 있던 남자의 팔이 원을 그리며 부자연스럽게 꺾였다. 알약이 그의 손아귀에서 튀어나감과 동시에 남자의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쯧쯧, 독약이라니. 자살을 죄악으로 여기는 에스테의 사제가 그렇게 쉽게 목숨을 버리려고 하면 안 되지. 이제 슬슬 교양 있는 대화를 시작해 볼 참이었는데 말이야.」

「흐흐흐, 운명을 거스르려 하다니 오만하기 짝에 없구나. 네년이 날 지금 죽인다고 해도 그 저주받은 꼬마는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남자가 뒤로 꺾인 팔을 힘껏 붙잡은 채 핏발이 가득한 광기어린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고, 프레이드린은 냉소를 지었다.

「흥미롭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 내 몸에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한 주제에 말이야. 입만 살았군.」


「네까짓 게 무슨 짓을 한들 연옥의 씨앗이 싹트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것이 로고스의 뜻이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죄인들의 숙명이니까.」

남자가 피와 침이 섞인 분비물을 질질 흘리며 대답했다.


「숙명?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어.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거지 네놈들의 신 따위가 정하는 게 아니거든.」

「하하하! 자신감이 과하군. 하지만 네가 숙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심판의 때가 오면 넌 반드시 내 말을 떠올리며 피눈물을 쏟게 될 것이다!」

「그래. 그런 때가 찾아오면 반드시 널 기억해주지. 하지만 그 전에 너희의 신이 네놈들에게 시켰다는 그 잘난 계획이 무척 궁금하군. 내게도 좀 말해줘야겠어.」


프레이드린이 로브의 양쪽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낮게 말했다. 남자는 그녀의 행동에서 위압을 감지한 듯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반짝이자 남자는 온 몽이 굳어버린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만히 있어. 이제 넌 내가 묻는 말에만 충실히 대답하면 돼. 물론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하게 될 테지만.」

남자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프레이드린이 눈을 감고 혼잣말을 하듯 무언가를 중얼대자 핏발이 가득했던 남자의 눈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한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자, 이제 너희들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아이가 너희의 계획에 있어 어떤 존재이기에 그렇게도 난리인건지 말해 주실까?」

프레이드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그의 메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슨 말을 뱉어낼 듯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더 정확하게는 남자의 입이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남자의 입에서는 갑작스레 시뻘건 혀가 튀어나왔다.

이에 놀란 프레이드린이 멈칫하는 순간 그의 혀는 불에 타버린 장작처럼 온통 시커멓게 변하더니 그 한가운데에 선명한 붉은색의 글자 하나가 나타났다. 마치 고대의 문자처럼 보이는 글자였다.

내내 의연한 표정이었던 프레이드린의 표정은 남자의 혀에 나타난 문자와 함께 삽시간에 굳어졌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건···.」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남자의 혀에 나타난 글자가 선명하게 빛나자 남자의 몸이 천천히 떨려오기 시작하더니 곧 붉은빛이었던 그의 눈이 온통 검은빛으로 바뀌었고, 이내 그의 얼굴을 시작으로 목과 손의 피부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남자의 미세한 떨림이 큰 경련으로 바뀔 때 쯤, 그의 입에서 시커먼 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프레이드린은 다급한 손짓으로 남자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힘을 풀고는 그의 멱살을 낚아챘다. 하지만 이미 숨을 거둔 남자의 몸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축 늘어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목은 하늘을 향해 꺾인 채 커다란 머리를 힘겨운 듯 지탱하고 있었다.


「에스테 사제와 아게론의 문장이라니···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

프레이드린이 혐오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궁지에 몰리자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하는 에스테 사제의 단호한 태도와 옵스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제들의 혀에 중대한 비밀에 대한 영원한 침묵을 약속받는 「침묵의 서약」을 새기게 하면서까지 진실을 감추려 하는 배후의 인물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진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프레이드린이 떠난 방에는 남자가 흘린 핏자국도, 그의 시체도, 아무것도 남자있지 않았다.



(벤, 끝)



작가의말

2장이 끝났습니다.

프롤로그와 1장의 메인 에피소드와는 다른 에피소드였습니다.

3장부터는 다시 메인 에피소드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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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ACT I. 천사와 악마 : 3장. 진실 앞에서(1) 18.01.28 84 1 15쪽
» ACT I. 천사와 악마 : 2장. 벤(6) 18.01.27 60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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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ACT I. 천사와 악마 : 2장. 벤(4) 18.01.25 92 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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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CT I. 천사와 악마 : 1장. 소녀와 신부(4) +1 18.01.21 81 3 18쪽
4 ACT I. 천사와 악마 : 1장. 소녀와 신부(3) 18.01.20 93 2 18쪽
3 ACT I. 천사와 악마 : 1장. 소녀와 신부(2) 18.01.19 82 0 19쪽
2 ACT I. 천사와 악마 : 1장. 소녀와 신부(1) 18.01.18 116 1 8쪽
1 프롤로그 18.01.17 167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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