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붉은머리 에아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4.05.08 15:28
최근연재일 :
2024.06.20 22:40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783
추천수 :
134
글자수 :
251,832

작성
24.05.11 20:30
조회
35
추천
5
글자
18쪽

떨림 (1)

DUMMY

초목이 무성히 자라나는 계절이 찾아왔다.

눅진한 바람은 아니고 그렇다고 열사의 숨결이 섞인 바람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생을 움트게 할 정도의 바람은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그리카 밑에 자리한 드넖게 펼쳐진 대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들판의 추억을 담은 듯한 그 바람은 아직 뜻을 펼치지 못한 새싹과 꽃봉오리에게 용기를 불어주었다.

덕분에 최북단과 산꼭대기를 제외한 그리카 대부분의 땅은 새하얀 눈 대신 푸른 초목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에아론은 쪼그리고 앉아 발치에 자라나 있는 풀과 꽃을 바라보았다.

겨우내 잠자던 것들이 봄이 다가오면 약속이라도 한 듯 너도 나도 피어오른다는 게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것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인 걸까.'


언제나 성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리카도 방긋 웃게 하는 걸 보면, 오직 신 말고는 감히 할 이가 없을 듯도 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손수 거두어가는 일도 하시는데 생명을 피어오르게 하는 것 정도야. 눈 감고도 간단히 하실 수 있는 일이겠지.

맑고 깊은 눈동자로 꽃을 어루만지던 에아론. 얼마 안 가 소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글라가 죽고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성에는 이제 우글라가 남겼던 흔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청소와 정리라는 명목하에 힘없이 쓸려나갔던 것이다.

한때 우글라가 머물렀던 방은 이제 고모할머니의 것으로 바뀌었다.

제 방에 쓸데없는 장식과 가구를 들이는 걸 싫어했던 우글라와 달리 고모할머니는 방을 꾸미는 걸 좋아했다.

언제 한번 방에 들어가 봤던 에아론은 깜짝 놀랐다. 여기가 진정 할아버지가 지냈던 방과 같은 곳이란 말인가. 아예 탈바꿈을 해버린 탓에 한동안 넋을 잃었었다.

슬픔과 서러움에 매몰된 에아론은 가급적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과, 그리고 가족들과 같이 있으면 그들처럼 매정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은 할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방에 계속 있으니 입맛도 떨어졌다. 입맛이 떨어지니 음식도 들어가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니 절로 몸이 안 좋아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 병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끙끙거리며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에아론을 이끌고 나온 사람은 아스테리아였다.

아스테리아는 에아론을 업고 2층에 있는 홀로 들어갔다.

업은 이유는 에아론이 한사코 걸어 다니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홀로 들어가니 이전의 족장들을 그린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십여 명의 붉은머리 족장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구석에 박혀 있는 초상화 하나가 보였다. 벽과 벽이 맞닿은 곳에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하지만 에아론은 홀에 들어서자마자 그 초상화를 바로 발견했다. 그건 할아버지, 우글라의 초상화였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매섭고 강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조들과 달리 우글라는 상냥한 얼굴로 에아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아론의 눈가가 붉어졌다. 아스테리아는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어. 이제 저곳에서 우리를, 그리고 이 성을 지켜봐 주실 테지. 그런데 네가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 할아버지 마음이 어떻겠니?"

"그래도.. 난 가족들이 좀 더 슬퍼하길 바랐어, 누나. 할아버지와 있었던 추억을 나누길 원했단 말야. 근데 다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잖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들 혼란스러운 것뿐이야.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달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슬픔을 감추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굴기도 해. 하지만 방식만 다를 뿐 결국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한다는 마음은 똑같아."


에아론은 누나가 한 말을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모든 말이 이해가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이 다르다는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할아버지 보고 싶다."


에아론이 누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아스테리아는 우글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답했다.


"나도."


그 이후 에아론은 다시 방에서 나오게 되었다.

여전히 복도를 거닐 때마다, 할아버지가 썼던 방에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그때뿐이었다.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움과 슬픔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에아론은, 조금씩이지만, 죽은 이를 잊어가는 연습을 본인도 모르게 배워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에아론이 가족들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빵을 찢어 먹고 있을 때였다.


"수프에 찍어줄까?"


옆으로 고개를 돌린 에아론은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가 온정이 깃든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아론 곁에는 항상 두 사람이 고정으로 앉게 된다. 왼쪽에는 보모, 오른쪽에는 아스테리아였다.

어머니인 프라는 가족 식사에 같이 참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다 온다 하더라도 구석진 자리에 앉아 누구와 말도 나누지 않고 홀로 먹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보모의 자리에 앉아 있던 것이다. 에아론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모를 찾았다. 보모는 하인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아론의 시선을 느낀 보모는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는 시늉을 보인 뒤 식사를 재개했다.


"자."


프라가 수프에 적신 빵을 에아론 앞에 있는 그릇에 놓아주었다. 에아론은 주인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흰자를 보이며 어머니를 힐끗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지."


오른편에 있던 아스테리아가 에아론의 귓가에 속삭였다.

에아론은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지만 웅얼거리며 말한 터라 발음이 뭉개졌다. 그래도 프라는 용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렴. 또 줄 테니까."


에아론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하도 긴장해서 먹었던 탓인지 결국 그날 체하고 말았다.

프라의 달라진 태도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그간 참여하지 않았던 가족 행사에 꼬박꼬박 얼굴을 보이는 것은 물론 하인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워나가기까지 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일까? 어두운 얼굴로 바닥만 보며 걷던 지난날의 프라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프라의 변화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같이 웃음을 보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니면 굳은 얼굴로 인사만 하고 자리를 떠나거나.

전자보다는 후자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에키아가 그중 한 사람이었다.

에키아는 지금껏 성에서 지내면서 프라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눈이 마주친다 해도 따로 인사를 나누거나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저쪽에서 먼저 시선을 돌려 회피하기 일쑤였으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프라는 먼저 인사를 건네기 시작한 것이다.

복도 맞은편에서 에키아가 걸어오면 온화한 눈빛을 보이며 목례를 했다.

굳이 무시할 필요는 없었기에 에키아도 일단 인사를 받기는 했다. 다만 그 이상 예의는 보이지 않았다.

에키아는 프라에게 좋은 감정이 딱히 없었다.

누가 먼저 첫 아들을 낳느냐에 대하여 경쟁을 펼쳤던 사이였으니까.

자신이 비요른을 먼저 낳아서 천만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참으로 참담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에키아는 프라가 괜히 저러는 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어떤 꿍꿍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게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에키아가 본 바로는 프라는 야망이 큰 여인이 아니었다.


'아냐. 사람 속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만약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거라면? 지금이라도 에아론을 족장으로 내세우려는 것이라면?'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제까짓 게 첫째 부인이라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족장은 장남에게 물려주는 것이 오랜 관습이거늘.

더군다나 에키아는 첩도 아니고 정식 부인이었다.

에아론에게 차례가 돌아갈 일은 죽어도 없었다.


'잠깐만.'


일순 에키아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프라가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가령 비요른과 스바르를 해치운다는 그런-.

에키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고작 사람이 조금 밝아졌다고 이런 상상을 하는 자신이 우습게 여겨졌다.

에키아는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나 그런다고 불안한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한번 의심이 생기니 프라가 무얼 하건 눈에 밟혔다.

에키아는 프라에게 어떤 수상한 면이 있지 않나 감시했다. 하녀를 시켜서 프라의 방에 들어가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감시하고 뒤져도 딱히 수상한 걸 발견하지 못했다.

프라는 시간이 갈수록 더 밝아졌다. 그간 소홀히 했던 자기 관리도 하기 시작한 건지 살도 빠지고 화장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의 변화를 서서히 받아들였다.

아직 이상하게 보는 자들이 많았지만 이대로라면 그것도 곧 머잖아 사라질 듯했다.

결국 참다못한 에키아는 어느 날, 프라를 불렀다. 양털을 고르자는 핑계로 같이 수다나 떨자는 의미였다.

프라는 기꺼이 응하였다. 프라는 아스테리아를 대동한 채 나타났다. 둘보다는 셋이서 하는 게 더 빠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에키아는 수긍했다. 어차피 그녀 또한 프라와 단둘이 있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키아 또한 하녀 두 명을 데리고 온 참이었다.

여인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몽실몽실한 양털을 만져가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침 집안 남자들은 다 밖에 나가고 없었다.

브레고아는 첫째 비요른을 데리고 몇 주 전에 사냥을 나갔다.

둘째인 스바르와 막내 에아론은 마을에 내려가 있었다. 듣기로는 글리마를 배우러 간다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성의 정원에는 거칠고 험한 목소리 대신 부드럽고 생글거리는 웃음소리가 감돌게 되었다.


"저는 이제 꿈을 이뤘어요."


딸과 얘기를 나누던 프라가 시선을 돌렸다. 에키아가 빙긋 웃고 있었다.


"그동안 첫째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영 자리가 나지 않았었거든요. 언제쯤이면 그런 날이 올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오게 되어서 기뻐요."


프라도 화답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키아는 이어 말했다.


"요즘 들어 화사해지신 것 같아 보는 제가 기분이 좋답니다. 귀걸이도 무척 아름답고 말이에요."


프라의 귀에 걸려 있는 곡옥 모양의 옥색 귀걸이. 그동안 프라가 남들 앞에서 치장한 모습을 보인 적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저 귀걸이는 에키아로서는 이번이 처음 보는 것이었다. 프라는 반쯤 눈을 내리깔고서 손으로 귀걸이를 매만졌다.


"남편의 아내로 들어왔을 때 내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지요. 나중에 아스테리아가 시집을 가면 어머니께서 그러하셨듯이 나 또한 결혼 패물로 물려줄 생각이랍니다."

"진작에 하시지 그러셨어요. 잘 어울리는데."

"고마워요. 그래서 앞으로 기회만 되면 할 생각이지요."


별꼴이로군. 집에 남자도 없는데 귀걸이를 하고 있다니.

에키아의 눈길이 표독스럽게 변했지만 그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프라는 양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비요른이 성인식을 치를 날이 머잖았네요."

"안 그래도 저도 그것 때문에 요즘 잠을 설치고 있답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군요. 머잖아 비요른의 머리가 붉어질 날이 올 테니까요."


큰아들 얘기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에키아는 한동안 자식 자랑을 했다.

곁에 있는 하녀들이 어색한 표정을 절로 지을 정도로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프라는 차분한 얼굴로 잘 들어주었다.

그때 에키아가 화제를 바꿨다.


"막내도 벌써 열한 살이네요. 앞으로 4년만 지나면 에아론 또한 성인식을 치를 테고 그러면 정식으로 전사가 될 테지요. 시간이 참 빨라요."


프라는 말없이 미소만 보였다. 에키아는 상체를 앞으로 조금 굽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답니다. 이제부터 조금씩 전사가 되는 훈련을 받게 될 텐데 잘 해낼 수 있을지. 혹여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지만 전 에아론이 부디 잘 해내길 바라고 있어요. 직접 배 아파 낳지는 않았지만 에아론을 친자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네, 물론이죠. 우린 한 가족이니까요. 나도 비요른과 스바르를 친자식이라 생각하고 있지요."


그리고 프라는 이어 말했다.


"나도 에아론을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잘 해낼 거라 생각해요. 그 아이의 몸속에도 다른 형제와 마찬가지로 붉은머리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마다요. 전사의 피가 어디로 가진 않을 테니까요."


에키아는 눈을 빛내며 프라의 반응을 기다렸다. 프라는 미소만 흘리기만 할 뿐 딱히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에키아는 의도적으로 전사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에아론이 족장의 그릇이 아니라는 걸 간접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에아론은 족장의 곁을 지키는 호위 전사가 가장 걸맞다, 그러니 혹여 이상한 생각을 품지 않길 바란다.'라고.

에키아는 자신의 뜻을 프라가 이해한 건지 아니면 모르고 넘어간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전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테야. 후자라면 바보라는 말밖에 되지 않을 테고.'


에키아는 프라가 바보이길 바랐다.

아무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이상한 마음도 품지 않고서 그저 세월이 흘러가는대로 살아가주길 바랐다.

그렇다면 에키아도 프라와 웃으며 지내줄 용의가 있었다. 우글라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유언대로, 혈육끼리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말이다.


"전사가 될지 다른 무엇이 될지는 에아론 본인에게 달려 있다 생각해요."


그러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에키아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머리를 붉게 물들여도 에아론은 에아론이니까요."


아스테리아가 입꼬리를 살짝 말려올린 채 에키아를 보고 있었다.

빠르게 눈을 깜빡인 에키아는 이내 미소를 보였다.


"붉게 물들인 이상 선택지는 하나란다. 리아. 전사가 되는 것이지."

"하긴 그렇군요. 족장도 결국에는 전사이긴 하니까요."


에키아의 입은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청록색 눈동자가 아스테리아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때 프라가 아스테리아의 허벅지에 손가락을 살짝 올렸다. 아스테리아는 순간 프라에게 고개를 돌릴 뻔했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던 아스테리아는 곧 나른한 얼굴을 지었다. 그러고는 별 뜻 없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넓게 보면 그렇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꼭 전사의 역할만 수행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스뇰 삼촌처럼 정찰꾼이 될 수도 있는 건데요, 뭘. 결국 에아론의 선택에 달렸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선택도 선택 나름이겠지. 여하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겠다, 리아. 에아론의 의견도 존중해야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스테리아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네요, 둘째어머니. 저도 이제는 숙녀거든요."

"언제든지. 아스테리아."


그러고도 에키아는 한동안 아스테리아를 노려봤다.

만약 중간에 프라가 끼어들어서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았더라면 언제고 시선을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스테리아는 감사의 목례를 선보인 뒤로 두 번 다시 에키아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 후로도 그녀들 사이에서 대화가 수없이 오고 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나긋나긋한 태도를 보이는 프라의 모습에 에키아는 자신의 생각이 지나쳤음을 인정했다.

얘기를 나눠보니 프라가 야심을 품을 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바보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었다.

그보다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 한다면 아스테리아겠지.


'저것이 건방지게 나한테 눈을 부라려?'


아무리 직접 낳지 않았다 한들 자신은 둘째어머니였다. 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존중을 받는 게 당연했다.

에키아는 아스테리아를 어떻게 혼쭐을 내줄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굳이 혼쭐을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아스테리아는 얼마 안 가서-.

그때 성 정문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족장 일행이 기나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었다.

베아고르와 비요른, 그리고 전사 두 명이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나타났다. 하도 안 씻어서 그런지 그들의 몸에는 악취가 풍겼다.

그래도 성 사람들은 그들의 복귀를 열렬히 환영했다. 짐말에 커다란 자루가 실려 있는 걸 보니 사냥이 성공적으로 끝난 듯싶었다.


"고생하였어요. 얼른 들어가서 씻으셔요. 비요른, 너도 수고 많았다. 기특한 것."


에키아가 한달음에 달려와 남편과 아들을 맞이했다.

비요른은 입도 벙긋할 힘도 없는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성으로 들어갔다.

마굿간지기에게 말고삐를 건네주며 브레고아가 말했다.


"그간 별일 없었소?"

"있을 리가요. 언제나처럼 평온했지요."


브레고아는 더 물어보는 일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몸을 씻으러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우뚝 자리에 멈췄다.

에키아는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프라가 조신한 자세로 뒤에 서 있었다.


"오셨어요?"


브레고아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프라의 행동이 달라진 건 브레고아가 사냥을 하러 성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브레고아로서는 당연히 프라가 평소처럼 얼굴도 비치지 않고 제 방에 들어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친 데는 없으신가요?"


고운 목소리로 묻는 프라. 브레고아는 입을 몇 번 움찔거리더니 이내 말했다.


"없었소."

"다행이에요."

"무얼 하고 있었소?"

"둘째 부인과 같이 양털을 고르고 있었어요."


브레고아는 프라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손톱에는 흙과 꽃씨가 조금 묻어 있었다.

브레고아는 프라가 있는 쪽으로 상체를 약간 틀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고생했소. 어서 가서 손 씻으시오."


에키아는 프라에게 그리 곱지 않은 미소를 보이고는 남편의 뒤를 따라 성으로 들어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붉은머리 에아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 떨림 (3) +1 24.05.13 29 4 14쪽
5 떨림 (2) +3 24.05.12 33 6 16쪽
» 떨림 (1) +2 24.05.11 36 5 18쪽
3 마지막 열매 (3) +2 24.05.10 40 7 19쪽
2 마지막 열매 (2) +2 24.05.09 52 6 15쪽
1 마지막 열매 (1) +3 24.05.08 118 5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