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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flas 님의 서재입니다.

안녕, 잘 지내?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현대판타지

studioflas
작품등록일 :
2023.02.22 17:23
최근연재일 :
2023.03.17 17:21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239
추천수 :
3
글자수 :
173,749

작성
23.02.2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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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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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1교시:생활과 윤리

즐감하세요!




DUMMY

겨울 방학이 끝나고 새 봄,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의 새로운 인생도 시작 당해버렸다. 선택한 적도 없고, 원치도 않았던 여자의 인생 말이다.


꼭.. 버스에서 졸다가 누가 깨우길래 감사하다고 내렸더니, 엉뚱한 역에서 내린 억울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버스가 끊겨서 집에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거고.


해라의 몸으로 들어온 지 일주일. 그 동안 우리는 원래의 몸을 돌아가지 못한 채 오히려 서로의 삶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처음엔 화장실에 가고, 샤워를 하는 것조차 난감했다. 평행 차원의 나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여자애다 보니 내 도덕심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안 씻고, 안 싸고 살 수가 있겠어?


하지만 막상 거사..? 를 치르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처음보는 여자의 몸인데 성적인 흥분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예쁘고 아름답다는 감상에 취해 나르시스트가 될 것만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이 일을 해라에게 고백했었다.



-미안하지만 씻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게 왜? 나도 이미 씻었는데.


-아.. 아, 그, 그랬어?



심지어 해라가 내 몸을 봤다는 데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왜 그런 걸까? 난 궁금함을 참지 못해 물었고···



-당연하지. 네가 여자니까. 넌 이성과 감정이 사람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 보통은 그렇게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고, 마음이 온전히 내 것인 것처럼 느껴지지?


-당연한 거 아냐 ㅇㅇ?


-그건 뇌의 트릭이야. 네 몸이 이성과 감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처럼 속이는 거지. 인간은 유전자의 운전기사고 호르몬의 가사 도우미야. 네 유전자의 선택과 네 호르몬이 원하는 일을 마치 네 자유 의사로 선택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게 뇌의 역할이지.


-그럼 잠깐.. ㅡㅡ 내가 너의 유전자와 호르몬에 지배받고 있으니까 내 생각은 아무 소용없다는 거???


-그럴 리가. 분명 괴리가 심할 거야,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후천적으로 학습으로 경험한 지식은 분명히 영향을 줄 거야. 하지만 본능에 직결된 행동 같은 것들은 지금까지 네 경험을 깡그리 무시할 정도로 강할 걸.


-본능에 직결된 행동 ㅇㅇ?


-그런 거 있잖아?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거. 참고로 난 잠을 많이 못 자, 경험해보면 알 거야. 그런데 넌 참 잘 자더라. 이것도 유전자의 영향이야.



그리고 그때 해라가 한 말처럼, 나는 일주일간 그 괴리감과 싸워야 했다. 그렇게 변해버린 나의 모습에 기억과 경험은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식욕이 줄어든 것은 제일 적응하기 쉬운 변화에 속했다. 그 정도야 체격도 줄었으니 당연하다고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변화는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도 적응되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기억력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호기심도 굉장히 많아진 것 같았다.


처음엔 신상 봄 코트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원단과 제조방식을 공부하고 있었다. 직접 만만들 것 아니면서 말이다. 아니, 잠깐이지만 직접 만들까 생각까지 했었지.


아무래도 해라는 이 기억력과 호기심을 이용해, 성적을 높이는데 썼던 모양이다. 제작 공정의 전문 용어들을 단 한번 본 것으로 모두 기억해 버리다니, 예전에 나라면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정말··· 그럴 때면 참 당황스러웠다. 난 모델이 꿈이었지, 원단 제작자가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걸 공부하느라 음악 쇼를 빼먹었고, 채아를 몇 번이나 데리러 가지도 못했고, 운동도 까먹게 되었다.


분명 내 머리는 공부보다 패션계 일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엉덩이는 의자에 붙어 있는 게 제일 좋을 걸? 하고 약 올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다른 몸이 바뀌는 영화들처럼 내 주변까지 다 변했다면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다른 차원을 넘어와도 역시 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대로였다.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이세 문화 고등학교. 이세 그룹 교육 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다.


이세 그룹이 운영하다 보니 당연히 학비 허들이 어마어마하지만 잘 나가는 가족들을 둔 입장에서 비용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성적.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공부를 했던 건 사실이고, 덕분에 이세 문화 고등학교에 입학도 할 수 있었지만 정작 입학하고 보니 여기저기에서 몰려든 공부벌레들의 모습에 질려 손을 놓고 말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전의 상실 같은 거 말이다.


점점 성적은 떨어져가고, 중학교 때 쌓은 기본기로도 버틸 수가 없을 때가 되자 이제는 시험날 운에 따라 석차가 정해지는 위치까지 도착했다.


그나마 진로는 일찍 정해 뒀고, 특별심화반인 아이보리 클래스만 제외하면 성적으로 압박하는 학교는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은 많이 홀가분해진 상태였다.


다만 지금 나는 반하라가 아니라 반해라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와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탓일까? 이 녀석은 전국구에서 노는 아이보리 클래스에서도 1, 2등을 다투는 수재 중의 수재였다. 나는 절대 이 녀석의 실력을 모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또 다른 문제가 존재했다.


나의 가장 친한 베프 안은솔.. 그 놈이 해라의 남자친구라는 것이었다.


아니, 해라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 까지만 해도 이 녀석은 사회성이랑은 담 쌓고, 공부만 해온 줄 알았다. 하지만 웬 걸? 남자친구라니.


정말 의외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나는 어째서 해라와 은솔이가 사귀게 되었는지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유를 듣고 나니, 그런대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작년에 전학 온 주현오가 문제였다. 원래 세계에서도 작년에 전학 왔고, 곧 나, 은솔이 그리고 현오는 금새 베프가 될 정도로 친해졌다.


문제는 이쪽 세계의 현오였다. 이쪽 세계에서 현오는 친구가 아니라, 남친이 되길 원한 모양이다. 그런데 해라는 사교성이 없었고, 또 공부 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해라에게 차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오는 포기할 줄 몰랐다고 한다. 오히려 더 자신만만하게 자기에게 반하게 만들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단다.



-얼마전에 은솔이가 자기랑 사귀쟀어. 데이트하자고도 안 할 거고, 공부에 방해되는 일도 안 할 거래. 그럼 아무리 현오라 해도 남친 있는 여자한테 들이대지 않을 거라고 해서.


-뭐임? ;; 위장 연애?


-뭐, 그런가? 어쨌든 1년간 남친 역할을 해주기로 했고, 같은 대학교에 가게 된다면 그때 가서도 파리떼 퇴치용으로 자길 이용하면 된 대.



그러니까 현오를 떼 놓기 위해 일부러 사귄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건 은솔이 답지 않은데..? 너무 진심이잖아? 뭐, 대학교에 가서도 이용하라고? 걘.. 뭐, 파리채 휴먼이냐? 장래희망이 시스코래?


난 은솔이의 성격을 잘 안다. 내향적이고 생각이 많아서 가끔 속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런 녀석이 먼저 이런 제안을 했다고? 게다가··· 좋아하는 애도 있는 놈이?


이쪽 차원에서는 성격도 바뀐 걸까? 좋아하는 대상도··· 바뀐 걸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한 상황은 또 아니었다. 은솔인 항상 눈치채지 못한 곳에서 배려하는 녀석이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면 게임을 할 때도 항상 자긴 남는 포지션을 선택한다. 그게 재미없는 서포터일지라도 말이다. 항상 다른 사람보다 도로가로 걸었고, 다 같이 밥을 먹으면 가장 느린 친구에 맞춰 식사를 했다.


나도 이런 걸 하루 아침에 안 게 아니었다. 십 수년 동안 붙어 다니다 보니, 조금씩 눈에 들어온 것들이었다.



-그니깐 현오가 들러붙으면 방학동안 남친이 생겼다고 말 하란 거임?


-응.


-우엑 최악이네. 팬티도 돌려 입는 베프랑 사귄다고? ㄷㄷㄷ


-뭐? 뭘 돌려 입어? 그게 가능해? 상상만해도 비위 상하는데?


-뭐 어때? 친구끼리.


-난 싫어, 내가 이 몸에 있는 동안은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왠지 내 문자를 보며 경멸하고 있을 것 같은 해라를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운전을 하던 누나는 내 모습에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누구? 은솔이?”


“아··· 응.”



해라라고 대답할 수는 없어서 대충 은솔이라고 둘러대긴 했다. 다만 그 대답에 누나의 표정은 묘하게 어두워 보였다.



“그런데··· 은솔이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응, 그렇지 뭐.”


“어릴 때 장난감을 찾았다 했더니, 둘이서 비밀폰으로 쓰기로 한 거니?”


“비밀폰? 아, 뭐.. 그러기로 했어. 앞이나 봐, 운전 집중해.”


“응? 아, 응. 그래.”



누나에겐 자세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키즈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건 은솔이라고 둘러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누나 태도가 이상하네. 평소엔 내가 틱틱대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을 텐데 말이다.


웬일로 고분고분한 거야? 아니, 웬일도 아닌가? 아무래도 요 며칠간 지켜본 바로 누나랑 해라의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어.



“누.. 아니, 언니. 혹시 내가 뭐 잘못 했어? 아니면 언니가 나한테 뭐 잘못했다거나?”


“응? 아니, 그런 거 없어.”



누가 봐도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이다. 운전에 집중하는 척하며 애써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으니까.



쓰읍··· 뭐지, 이 묘한 분위기? 해라에게 직접 물어봐야 되나?



하지만 내가 문자를 쓰려고 하기도 전에 누나의 차는 학교 앞에 도착해버렸다.



“자, 이거. 가지고 있어. 돌아올 때 차비로도 쓰고, 채아 간식도 사줘.”



그리고 누나는 내게 자신의 카드를 건내 줬다.


뭐야? 이 차별대우는? 저쪽 차원에서는 그렇게 카드 달라고 떼써도 안 주더니··· 역시 공부를 잘하고 봐야하는 걸까? 아니면 누나가 해라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그래도 꿈에 그리던 누나카드! 항상 용돈달라고 전화해서 한바탕 쌈박질하던 삶과는 작별이다! 좋아, 학교 끝나면 오늘은 쇼핑부터 해야 겠어.



“알았어, 잘 쓸게. 고마워, 누··· 언니!!! 운전 조심하고!!!”


“응..? 아, 어.. 그래. 너, 너도 공부 열심히 해.”



누나는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땡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학교의 모습도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모습도 변한 건 없었다. 다만 나와 주변인들의 관계는 확실히 달랐다.


보통 교문 근처에서 내려 교실까지 가는 동안 누구는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하거나, 누구는 머리를 치고 도망가며 놀리거나, 누구는 헤드락을 걸고 발길질을 하는데.. 오늘은 단 한 놈도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가서 인사를 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라의 충고가 떠올라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해라는 내 마음대로 화장을 하고, 꾸미는 것 까지는 이해해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주변 관계를 망가트리진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지금 내 위치가 공부를 집중하기엔 가장 좋은 상태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게 공부하기 좋은 상태라고? 그냥 자발적 아싸 아냐? 사회적 고립을 공부하기 좋은 상태라고 표현하다니, 해라가 의대에 가더라도 절대 정신과는 가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층 현관에 들어설 때, 복도를 지나던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는 밝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 해라 왔구나. 이미지 변신해서 몰라볼 뻔했네?”


“엥..? 김대로 쌤? 아, 안녕하세요?”


“어, 어? 그, 그래. 올 한해도 잘해보자!”


“네, 넵..!”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쌤은 잠시 당황하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지나쳐 갔다.


뭐야, 내가 제일 싫어하던 수학 선생님이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이것도 해라가 말한 공부하기 좋은 상태라고?



어우.. 해라야, 김대로 쌤이랑 친해질 시간에 친구 한 명을 더 사겨라···



진짜 현상유지하자는 약속만 안 했어도 직접 발로 뛰어서 친구들 좀 사귀게 해주고 싶었다. 그 정도로 이 녀석의 인생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뭐.. 오늘은 애들이 내게 먼저 접근해오지 못하는 다른 이유도 생긴 모양이지만 말이다.


“신입생이야?”


“리본이 3학년 색인데?”


“반..해라 맞지? 반해라 같은데..?”


“에이, 설마.. 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와, 역시 피는 못 속이네.”


“원래도 킹쁘긴 했지, 누구들처럼 티를 안내서 그렇지.”


“뭐? 그 누구가 누군데!”



수근대는 목소리가 귀에 들려와 모른 척, 안 들은 척했지만 마음 속은 뿌듯했다.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노력한 것들이 결실을 맺은 거니까 말이다.


내가 봤을 때, 해라는 역시 우리 집안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당대의 청춘스타, 누나는 아이돌 출신 탑 여배우. 당연하게도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도 모델로서 발돋움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라 역시 그에 어울리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수수했던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평생 화장도 안 해온 눈치였고, 눈썹을 다듬거나 머리도 그냥 자라는 대로 내팽개쳐진 상태였다. 그렇게 무관심으로 방목 당한 미모다 보니 조금만 손봐도 확 살아난 것이었다.


사실 화장을 하고, 귀를 뚫고, 교복에 어울리는 명품 코트를 산 건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였다.


여자가 된 건 끔찍한 일이었지만, 자신을 꾸미는 건 남자일 때 보다 확실히 재밌었다. 성별의 차이도 있었지만 새로운 몸으로 연구한 메이크업과 패션이 인정받길 원했었다.


국립공원처럼 자유롭게 자란 모발들이 뒤엉키고, 눌려서 억지 곱슬이 된 꼴도 보기 싫어 제대로 쫙 펴버렸다. sns의 메이크업 영상을 보며, 하루 종일 얼굴에 낙서를 해댔고, 최근 맞춤 교복들을 전신 사진에 대조하며 살펴도 봤었다.


그렇게 변신에 성공한 게 지금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아서, 사실은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여자가 된 것도 꽤 재밌는 거 같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잠깐 해라의 몸이 되었다는 게 즐거웠지만, 나는 곧장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그냥 전에 하던 게임이 한참 질리던 중, 새로운 게임을 하게 된 기분 같은 거다, 이건 그냥 예쁜 인형 옷 입히기 같은 거다. 그냥··· 평범하던 애를 예쁘게 꾸며서 인정받았단 카타르시스일 뿐이다. 그래, 그런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3층에 도착한 나는 하마터면 9반으로 갈 뻔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내가 배정된 반이었고, 해라는 1반, 그러니까 특별심화반으로 분류되어 아이보리 클래스라고 불리는 교실로 가야 했다.


특별심화반인 아이보리 클래스는 1학년 때부터 존재했다. 그리고 다른 반과 달리 1, 2, 3학년 내내 반 이동이 크게 없었다. 그건 석차 20위 이내에 진입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처럼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항상 쉬는 시간이 되어도 아이보리 클래스 옆을 지날 때는 고요한 침묵만 가득했었지.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인연 없던 곳에 들어서 버렸다.


드르륵 교실 문을 열면 누군가는 반겨주고, 누군가는 장난을 걸어오는 게 내가 살아오던 삶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교실에 있는 마네킹들은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 비슷한 자세, 비슷한 눈빛으로 고개 숙인 채, 자습을 하는 이 녀석들을 보니 이제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절대 졸면 안 돼. 난 수업 중에 졸아 본 적 없어.



아직 가장 힘든 건 시작도 안 했다는 걸 말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 진짜 아무것도 신경 안 쓴다. 아직 등교 시간인데도 교실안에는 펜 굴리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전부였다.


일주일 만에 지금의 나를 재탄생 시켰는데.. 적어도 이 반에서는 사각형의 책상과 사각형의 교재가 눈에 보이는 전부 같았다.



아니, 이 녀석들 이런 미모를 보고도 반응 안 한다고? 하, 참나! 자존심 상해서!···.. 어.. 어? 자, 자존심이라니? 뭐, 뭐하는 거야! 나?



아이보리 반 아이들이 나를 보고도 반응이 없다는 데 어째선지 내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내 정체성이 흔들릴까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곧장 냉정을 찾기로 했다. 그래, 지금은 이런 걸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오늘 하루 수업을 졸지 않고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 진짜네? 진짜! 해라야, 반해라!”



그리고 그때, 책상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까무잡잡하게 피부를 태운 키 큰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주현오..”



현오는 작년에 전학을 온 같은 학년 친구로 원래 고교 수영 스타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전학이 많지 않은 학교고, 성적 경쟁이 치열한 학교다 보니 체육 특기생이 전학을 오는 경우는 잘 없었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었다.


뭐, 알고 보니 체육 특기생은 커녕, 부상으로 인해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의외로 선택과목들의 시험 성적이 좋았던 모양이다.


현오는 수영을 한 덕분에 녀석은 공부벌레만 가득한 우리 학교에서도 눈부신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다. 190에 가까운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체육 시간만 되면 볼 수 있는 근육질의 몸까지.


조금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유쾌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어서 주변 친구, 특히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대단한 녀석이었다.



“애들 얘기가 진짜네? 방학 동안 무슨 일 있었어?”



현오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며 소란을 떨었고, 그 모습에 주변 아이들이 째려보며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는 날 유령취급 했으면서 말이다.



“일단 나가자.”



나는 애들 공부에 방해될까 현오를 끌고 복도로 나왔고, 녀석은 뭐가 그렇게 신기한 건지 철장안의 동물을 구경하듯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감탄을 연발했다.



“와, 너 이러면 진짜 실망인데.”


“뭐가?”


“이제 애들 엄청 꼬일 거 같아서. 안되겠다, 너 내일부터 다시 원상복구해.”


“왜? 내가 그렇게 변했어?”


“변한 게 문제가 아니야. 진짜 예쁘다. 뭐야, 뭘 한 거야? 화장 하나로 이렇게 바뀐다고? 스타일도 확 바뀌었어. 같은 교복 맞아? 교복도 수선한 거야?”



뭐, 이 녀석이 칭찬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네, 눈썰미도 있어 보이고. 사실 교복도 체형에 맞춰··· 잠깐 그만, 말리지 마. 이 녀석 뭐야? 아무리 해라가 좋아도 칭찬이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됐어, 그만해. 뭐, 칭찬해준 건 고마운데 거기 까지만 해. 너무 띄워주니까 부담되잖아.”


“띄워주다니, 누가? 너 지금 엄청 예쁜 건 사실인데. 내가 원상 복구하라는 게 농담 같아?”


“농담이 아니라도 네가 참견할 이유는 없잖아? 너 때문에 이미지 변신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은 현오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지긋이 바라봐 왔다.



“너 꼭 누구 때문에 변신한 것처럼 들린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네가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야 됐으니까 그만 가봐, 너 때문에 애들 몰렸잖아.”



언제부터 였을까? 어느샌가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 많아졌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우리를 빙 둘러싸고 무대를 만들어 놓진 않았지만 먼발치에서 아닌 척하며 구경하고 있는 애들이 늘어난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싫은 건 아니었고, 이미 익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선들 중엔 나와 현오를 알콩달콩하게 엮는 상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당장 무대는 아니라도 콜로세움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때문은 아닌 거 같은데? 오늘은 너도 엄청 주목받고 있어. 남자애들 봐.”



그러고보니 남자애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평소에 여자애들의 시선만 신경 써서 그랬던 걸까? 이제 보니 분명 남자애들의 시선은 내게 꽂히고 있었다. 그리고..



뭐야.. 왜, 왜? 미쳤어? 심장이 고장이라도 났나?



갑자기 가슴이 간질간질거리고, 콩닥대는 느낌에 온 몸에 피가 싹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건 분명··· 내가 남자애들 시선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다.



아..! 그렇구나, 이게··· 호르몬! X발! 역겹네,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정신차려 반하라!



나는 지금 내 표정을 숨기려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이며 현오를 밀어냈다. 이 녀석이 내 기분을 눈치챈다면 지금 당장 창문을 뛰어내릴 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야···! 너, 너 그만 가. 나도 빨리 가서 수업 준비해야 겠어···!”



그러자 현오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뺨이 닿을 것 같은 거리로 얼굴을 밀착했다. 그리고는 소름 돋을 정도로 간지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왜, 아직 시간 남았는데? 야, 너무 밀어내기만 하는 거 아냐? 밀당도 밸런스를 잘 맞춰야지. 너무 밀어서 내가 힘이 빠지기라도 하면 너도 같이 쓰러질지도 몰라?”


“···꺼, 껴져. 가라고. 낯 부끄러운 이상한 말이나 하고 말야.”


“어휴, 그러니까 네가 연애를 못하지. 밀어내지만 말고 가끔은···”



현오의 커다란 손이 다가왔고,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돌돌 말 듯 매만진다. 갈 곳 없는 손이 망설이는 동안 내 가슴은 더 심하게 요동쳤다.


손가락이 가까워질수록··· 나도 모르게 스킨십을 기대하고 있었다.



안 돼,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정신차려, 반하라. 그래, 은솔이를 이용하자. 그 파리채 녀석을 말이야.



나는 내 뺨으로 다가오는 현오의 손을 탁 쳐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가 못 한대, 그거?”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한마디를 툭 던지며, 현오의 어깨를 툭 치며 교실로 향했고, 한바퀴 빙글 돌면서 녀석의 벙찐 얼굴을 감상하며 놀렸다.



“너보단 잘 하고 있는 걸?”


“뭐··· 뭐?!”



녀석은 마지막까지 입을 다물지 못해, 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당황시킨 것에 대한 복수를 성공이라도 한 듯한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소통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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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교시:체육 23.03.07 12 0 15쪽
10 2교시:체육 23.03.06 11 0 31쪽
9 1교시:생활과 윤리 23.03.03 11 0 26쪽
8 1교시:생활과 윤리 23.03.02 12 0 16쪽
7 1교시:생활과 윤리 23.03.01 12 0 27쪽
6 1교시:생활과 윤리 23.02.28 11 0 18쪽
» 1교시:생활과 윤리 23.02.27 13 0 23쪽
4 1교시:생활과 윤리 23.02.24 12 0 21쪽
3 1교시:생활과 윤리 23.02.23 15 0 16쪽
2 1교시:생활과 윤리 23.02.22 18 2 19쪽
1 프롤로그:등교시간 +2 23.02.22 32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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