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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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난 오늘, 회사를 그만뒀다.
그 일 직후에 이미 회사를 나가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었다.
생각보다 퇴사 절차는 간단했다. 총무팀 동료들에게 사직 의사를 전하고, 인사팀에서 퇴사 관련 서류를 작성하는 것으로 HMS와의 관계는 쉽게 정리되었다. 처음 관계를 맺기까지는 아주 어려운 과정이 있었지만, 관계를 끊는 일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퇴사 과정에서 최근 회사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에 대해 나에게 질문하거나 협박스러운 당부를 하는 식으로 윗선에서 나를 귀찮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었지만, 그런 일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총무팀 신차장과 조대리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것이 퇴사 과정 중에 가장 불편하고 죄송하고 힘든 일일 줄 알았다. 하지만 요즘 신입 사원들이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만두는 일이 비일비재 하기도 하고, 성격 좋은 남자들이라 그런지 두 분은 생각보다 아주 쿨하게 나를 이해해 주었다.
이보다 더 힘들었던 일은 송과장에게 선물로 줬던 은하수풀 디퓨저를 다시 돌려달라고 하는 일이었다.
송과장에게 퇴사한다는 말과 함께, 디퓨저를 만드는 지인의 작업실에서 발생한 화재로 디퓨저 샘플이 모두 불타버려서 정말 죄송하지만 지인의 부탁인데 디퓨저를 돌려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나름 핑계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송과장의 불쾌해하는 말투와 표정은... 정말 견디기 민망했다.
하지만 결국 디퓨저를 무사히 다시 손에 얻을 수 있었다. 그게 어딘가?
유일하게 지구 상에 남은 어린 은하수풀을 재배해서 잘 길러볼 생각이다. 회사도 그만두었으니, 은하수풀을 가지고 먹고사는 방법도 생각해 보는 중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은하수풀을 더 섭취하면 몸속에 있는 영희의 영혼이 더 크고 강해져서, 내가 우주로 날아갈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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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영희, 수현씨, 은하수마을 등 내 인생을 새롭게 가득 채우던 것들이 모두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연스럽게 내 인생도 예전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날이 많아졌다. 다만 집에서 하는 일은 조금 달라졌다. 하루 종일 암실 화분에 옮겨 놓은 은하수풀과 책상 위 할아버지의 타자기를 지켜보는 일이다.
은하수마을에서 인근 동산으로 탈출하자마자, 오대리를 버려두고 할아버지의 타자기를 두고 내렸던 아산공장 승합차를 세워 뒀던 곳으로 달려갔었다. 하지만 승합차는 온데간데 없었다.
다음날 퇴근하고 은하수마을이 어떻게 됐나 살펴볼 겸, 무당의 집도 들렸었다. 하지만 무당의 집은 이미 공가였다. 전날까지 사람이 살았던 곳이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폐가처럼 변해있었다.
절망했다. 아무래도 권소장 부부가 야반도주할 때 할아버지의 타자기를 가지고 간 것으로 보인다. 돌계단과 축대까지 무너져 내려 정말 형태도 없이 사라진 은하수마을을 접하고 입은 마음의 상처에 재가 뿌려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삼 일 뒤, 기적이 찾아왔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돌아왔는데, 옥탑방 문 앞에 종이상자가 놓여있었다. 송장도 붙어있지 않아 택배로 보기도 어려웠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는데, 그 안에 할아버지의 타자기가 들어 있었다.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제 퇴사도 했으니, 슬슬 회사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세상에 고발하는 일을 준비할 계획이다. 오대리가 사건에 대해 입을 닫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냥 덮기에는 너무 큰 일이기도 하고, 그러기에는 양심의 가책도 느껴진다. 아직 회사에 남은 박팀장과도 몇 번 얘기를 나누었다. 핸드폰도 없어졌고, 어떤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겪은 초자연적인 일에 대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이해시켜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딱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타자기를 도로 돌려주고, 아산공장에서의 탈출을 자의건 타의건 도와준 권소장 부부에게는 아무래도 인간적인 정상참작을 해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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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영희가 사라진 집은 전보다 더 적막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이제 쌀쌀한 가을이 와서 더 그런 것도 같다. 요즘들어 반짝 추위가 찾아와서 그런지, 집안에 있으면 겨울과도 같은 기분마저 든다.
영희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면 밖으로 나가 영희를 위해 만들었던 옥상 연못을 쳐다본다. 영희가 먹이를 주며 아끼던 물고기들을 보면 마치 영희가 남기고 간 자식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도 하루 종일 집 안에 우두커니 있다가, 하늘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옥탑방 밖으로 나왔다. 옥상 평상에 앉아 해질녘 하늘에 붉게 물든 옥상 풀장 연못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옥탑방 계단으로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아랫집 아저씨가 나타났다.
“요즘 별일 없어?”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네, 저는 뭐 항상...”
“요즘 사촌 동생이 잘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 얼마 전에 영희는 이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 그... 어디서 왔다고 그랬지? 키르...”
“키르기스스탄이요.”
이름이 어려워서 하마터면 나도 대답 못 할 뻔했다.
“아, 맞아! 아이고 돌아갔구나~ 그래도 그 여동생이 온 뒤로, 좀 사람 사는 집 같더니만... 다시 집이 조용해졌길래 뭔 일이 있나 해서...”
“하하... 좀 확실히 조용해지기는 했죠.”
“조금이 아니고 많이 조용해졌지~ 학생이라 방학 때 잠깐 한국에 들어왔던 건 가봐? 나중에 다시 온 데?”
“언젠가 다시 온다고는 했는데, 아마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렇구만... 그냥 문소리 들리길래 뭔 일 있나 한번 물어보려고 올라와 봤어~ 이제 가볼게. 푹 쉬어~”
“네, 아저씨. 내려가세요~”
아저씨가 내려가고 나니, 문득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옥탑방으로 들어가 할아버지 타자기 앞에 앉았다.
영희의 영혼이 할아버지의 타자기 속에도 들어있고, 내 몸속에도 들어있으니, 서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한정된 타자기의 기능도 뭔가 업그레이드되지 않을까?
타자기 위에 손을 올려놓고 수현씨가 가르쳐준 대로 몸에 힘을 빼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곧 가슴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의 타자기로 그 빛이 옮겨갔다. 할아버지의 타자기와 내가 하나의 같은 하얀 빛 속에 둘러싸였다.
타자기와 내 몸이 연결된 것 같다. 이제 온몸의 힘을 집중해서 초집중 모드에 들어갔다. 이마가 땀으로 촉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타자기에 ‘영희’라는 글자를 쳐봤다. 종이에 활자가 써지긴 하는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글자가 살아있는 느낌이다...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글자가 꿈틀거린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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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야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계속 편지를 쓸거야.
최대한 빨리 돌아와줘.
성민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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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많이 써보니 확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글자들이 종이 위에 살짝 떠서,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글자를 다 쓰고 타자기에서 종이를 뽑았다. 내 몸과 타자기에서 나오는 하얀 불빛이 종이로 번졌다. 이윽고 종이에서 하얀 광선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창문을 통해 쏜살같이 나가, 까만 밤하늘을 향해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내 몸과 타자기를 감싸던 불빛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보... 보내졌어!!!”
의자에서 일어나 환호하려고 했지만, 온몸에 힘을 다 써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풀려 방바닥으로 쓰러졌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젠 매일 밤 행복한 기대와 상상을 하며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끝-
변변치 않은 심해작 끝까지 찾아 읽어주신 소수의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덕분에 끝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글을 또 쓰게 된다면, 그때 다시 뵐 수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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