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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캐 님의 서재입니다.

전쟁을 끝내겠다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도캐
작품등록일 :
2023.12.04 23:48
최근연재일 :
2023.12.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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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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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DUMMY

“······으음?”


등으로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느껴진다.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생각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건가?’


믿기가 힘들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그 폭발에서 살아남았단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제로밤의 성능은 이미 테스트 해봤다. 그 폭발에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아니, 그보다 나는 살아선 안됐다.


내가 살아남을 만큼 폭발력이 대단치 않았다면 협곡도 무너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내 계획이 실패했다는 뜻이다.


“안돼!”


눈을 번쩍 뜬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덮고 있던 푹신한 솜이불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어째 익숙한 이불이었다.


“······응?”


그제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본 내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기는 내 방이었다. 이제는 잿더미가 되어버린 에든벨의 리하트 저택에 있던 내 방.


정말 꿈이라도 꾸는 걸까. 그런데 꿈이나 환상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그럼 이건?


‘···설마?’


순간 하나의 예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켠에 걸려있는 대형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대체, 이건···..”


성인식은 치룬 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어린 외모. 옷을 들춰 보니 지난 전투의 흔적 또한 온데 간데 없다.


틀림없이, 거울이 비춘 건 과거의 나였다.


···숨을 잠시 골랐다. 진정하기 위해서는 서너 번의 심호흡이 필요했다.


‘나는··· 과거로 온 건가?’


대체 어떻게? 무슨 연유로?


혹시 제로밤에 내가 모르는 기능이라도 있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 말고 폭발에 휘말린 사람들은 전부 회귀했다는 뜻인가.


근거 하나 없는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되니 무슨 생각을 하든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어느 순간 내 시야 한 구석에서 아른거리는 반투명한 느낌표를 발견했다.


[!]


흐릿해서 잘 안 보인다고 해도 이걸 이제야 보다니.

대체 얼마나 정신이 없었길래.


‘아니, 그보다 이게 나한테 왜 보이는 거지?’


처음 겪는 현상이었지만, 이 표시의 정체는 안다.

플레이어들에게 몇 번이고 들었던 적이 있다.

레벨업을 하거나 칭호같은 걸 얻어서 상태창에 변화가 생기면 이런 식으로 표시가 뜬다고 했다.


‘잠깐, 그렇다는 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플레이어들이 항상 외치던 그 단어를.


“사, 상태창.”


그러자 반투명한 화면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

-이름: 유델 리하트

-직업: 없음

-AP : 6251


〈칭호〉


『전생자』

『회귀자』

『에든벨의 망령』


〈특성〉


『유크라 검술』 Lv.2 【EXP UP! ×3】

『오러 - 절단』 Lv.2 【EXP UP! ×3】


〈스킬〉


없음

========


“······.”


각종 설명이 떠올랐지만, 나는 상태창의 내용을 차분히 읽어보지도 못했다.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비벼보았다.

그대로다.

혹시 간절한 바램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닌가 했지만, 상태창은 아무리 봐도 진짜였다.


“아니, 이게 어떻게······. 상태창이······.”


목이 메여 말도 잘 안 나온다.

과거로 온 것만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이건······


‘내가 미친 건 아니겠지······?’


문득 내 상황을 돌이켜 보니 기가 차기만 했다. 폭발에 휘말려 죽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과거로 되돌아왔고, 플레이어의 능력을 가지게 됐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정말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현실감각이 붕 뜨는 기분도 들고···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지.’


그래, 이유나 원인이야 어쨌든 내게는 잘된 일이다. 나한테 너무 형편이 좋아서 나중에 무슨 대가를 치르게 되진 않을지 걱정이 들 정도지만.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자.”


냉정해지자. 과거로 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나? 아니, 전혀.


모든 걸 다시 시작하게 됐지만, 결국 출발선에 다시 섰을 뿐이다.


곧 내게 닥칠 미래는 그대로다. 바뀐 건 하나 없다. 마냥 흥분할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한 나는 다시 한번 상태창을 확인하려고 했다.


새로 얻게 된 플레이어의 능력을 충분히 이해해놔야, 앞으로의 계획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게 그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쾅쾅쾅!!!


“도련님! 실례지만 들어가겠습니다!!”

“뭐야?”


뜬금없이 누군가 내 방문을 세게 두들기더니 벌컥 문을 열어 젖히고 들이닥쳤다.


사자머리와 방패 문양이 새겨진 무구로 무장한 병사들. 리하트 가의 병사들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순간 당황했지만 금방 사그라들고 반가운 마음이 샘솟았다.


‘그 날 죽었던 녀석들이야······’


살아 움직이는 리하트 저택의 사용인들을 보니 실감이 났다. 정말 나는 과거로 왔구나, 하고.


하지만 방에 들이닥친 경비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 놓고 재회를 기뻐할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저택 내에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침입자?”

“네! 지금부터 도련님은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귀를 기울여봤지만 바깥에서 딱히 싸우는 소리 같은 게 들려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경비들은 주위를 경계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확실히 밖에 무슨 상황이 터지긴 한 모양이다.


‘······어라, 이건?’


아, 기억이 났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것과 똑같은 상황을 겪었던 적이 있다.


체감 상 20년 전의 일임에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나. 이날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됐는데.


서력 812년. 수목의 달 15일. 전이의 날.


내가 회귀한 오늘은 플레이어들이 아르달에 전이한 그날임이 틀림없다.


즉, 그렇다는 건, 그 쳐죽일 놈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뜻이었다.





“한동석, 이연지, 김민철.”


나는 내 입속에서 그 녀석들의 이름을 웅얼거리며 불렀다. 오랜만에 입에 담아보는 그리운 이름이었다.


설마 그 녀석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날이 오다니.


“옛날 생각이 나는 걸.”


그들은 전이에 휘말려 리하트 가의 저택에서 눈을 뜬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 출신이다. 지구에서 온 건 둘째 치고 나와 고향까지 같다.


이러니 친밀감을 안 느낄 수가 있나?


전이 사태를 통해 셋과 만난 과거의 나는 그들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었다.


셋은 우리 가문의 비호 아래에서 다양한 업적을 이루었고, 결국에는 상위권 플레이어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내가 베푼 호의 만큼, 셋도 우리 가문에 친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랬던 놈들이, 그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신할 거라고는.


아드득.


“도, 도련님···?”


실수로 뿜어낸 기세에 경비병들이 흠칫해 하며 나를 돌아봤다.


···침착하자. 보는 눈이 있다. 무엇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때마다 일일이 감정에 휘둘리는 추한 꼴을 보일 건가?


‘그럴 수는 없지.’


상태창을 보고 이미 한번 커다란 감정의 격류를 겪었기 때문일까. 나는 빠르게 차분해 질 수 있었다.


“당황하게 해서 미안하다. 침입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잠시 흥분한 모양이야.”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은 저희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여덟 명의 경비병들은 능숙하게 내 방에 흩어져 출입구가 될만한 곳을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전이 사태를 아직 모른다. 분명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소식만 듣고 내게 달려 왔을 거다.


하지만 전이 사태의 진상을 아는 내게는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 이제 막 전이한 플레이어들에게 무슨 힘이 있겠나.


어차피 아무 일도 없을 걸 아는데,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그럼 어떻게 빠져나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 보다 강하니까. 하지만 에리나는? 에리나는 어떻지?”

“에리나 아가씨에게는 저희보다 실력 있는 병사들이 달려갔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은 도련님의 안전만 생각하십시오!”

“그럴 순 없다. 내가 직접 안전한지 보러 가야겠어.”


여동생을 구실로 적당히 핑계도 만들었겠다, 나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안 됩니다!”


물론 병사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이의 날 시점에 이미 2성의 경지였다. 일반 병사들이 경지에 오른 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비켜!”

“으억!”


콰당!


내 팔을 붙드는 병사를 쉽게 밀쳐내고 방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다리십시오! 무슨 위험이 있을 지 모른 단 말입니다!”

“걱정마라! 정말 난 괜찮으니까!”


등 뒤로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나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은 보이지 않게 됐다.


“······그 놈들이 처음 전이한 장소가, 분명 안뜰이었지.”


내 방에서 안뜰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나는 단숨에 안뜰까지 달려갔다.


***


안뜰에는 이미 제압된 셋이 있었다.

내가 등장하자 병사들은 자세를 바로 잡으며 경례했다.

그걸 본 셋은 내게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내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였지만 무슨 말인지는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제한 통역. 시스템의 기본적 기능 중 하나였다.


“흐흐윽. 제발 살려주세요! 정말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발, 제발!”

“뭐, 뭐든지 다 할게요. 지, 진짜요!”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산전수전 다 겪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던 베테랑 플레이어는 이곳에 없다.

그건 12년 뒤에나 찾아올 미래다.

여기에 있는 건 술 먹고 놀기 좋아하는 20대 초중반의 대학생일 뿐. 조금 더 겁주면 오줌까지 지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셋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을 죽이는 것.

그게 내가 할 일이다. 망설임 따윈 생기지 않았다.


‘이거 참,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걸.’


지금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이 놈들을 어떻게 죽일까, 에 대한 고민 뿐이었다.


“저어, 도련님. 어떻게 할까요?”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셋을 사로잡은 병사 중 하나가 내게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병사는 어쩐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침입자라는 것들이 무슨 갓난쟁이 애처럼 울고불고 난리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경계하는 기색도 많이 옅어진 듯 보였다.


‘이렇게 되면 침입자로 몰아 처형하는 건 힘들 것 같군.’


침입자라고 해도 전투 의지가 없는 자를 심문도 하지 않고 처형하는 건 무리수였다. 분명 병사들 사이에서 뒷말이 나올 거다.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으니 잘된 일이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플레이어를 죽이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니까.


‘전이 초기의 플레이어 처형은 아르달인과 플레이어들 사이의 가장 큰 갈등 중 하나니까 말이지.’


귀족 저택 안뜰에 전이한 것도 이렇게 소동이 벌어지는데, 더 위험한 곳.

예를 들면 왕족의 욕실이나 귀족 영애의 침실 같은 곳에 전이한 플레이어들은 과연 어떻게 됐겠는가.


‘연합이 결성된 명분 중 하나가 ‘억울하게 처형당한 플레이어들의 복수’였지, 아마?’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연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가.

연합은 죄없는 플레이어들을 처형한 아르달 인에게 테러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이름을 퍼뜨렸다.


만약 여기서 플레이어들을 대놓고 죽이면, 에든벨 또한 테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공격 당할 명분을 만들 수는 없지.’


병사들의 입을 막는다고 해도 안 좋은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처리하면 된다.


내가 죽였는지 아무도 모르도록.

아니, 그들이 아예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반항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군. 지하실에 가둬두도록. 심문은 내가 직접하겠다.”

“아! 알겠습니다!”


놈들을 죽일 적절한 계획을 구상하며, 나는 지하실에 이끌려 가는 셋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


‘지하실에서 당장 죽여버릴까?’


그런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좋은 수는 아니었다.


여기서 죽이더라도 시체가 남는다. 흔적도 남을 거다.

흔적을 지우고, 시체를 처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귀찮은 일이다.


게다가 지하실에서 죽이려면 비명 소리 하나 새지 않게 죽여야 했다.


‘고통 없이 죽여줘야 한다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놈들은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며 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놈들을 저택에서 떨어진 곳까지 빼돌려야 했다. 병사들한테 걸리지 않고.


벌컥.


“아··· 아!!! 제발 살려주세요!!! 저흰 아무것도 몰라요!”

“심문이라고 하셔도 저희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어요!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그냥 셋이서 길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신을 차리니 이곳에 있었습니다. 믿어주십쇼!”


내가 지하실에 들어서자마자 셋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나는 손을 들어 셋을 조용히 시킨 뒤 미소 지었다.

어디보자,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말투가 어땠더라?


“걱정하지 마. 너희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너희들 한국에서 왔지? 옷이랑 헤어스타일만 봐도 알겠네.”


놈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믿기지 않은 것을 들은 눈빛. 하지만 그 눈빛은 이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면 혹시 그쪽 분께서도···?”

“그래, 나도 한국에서 왔어. 너희랑 달리 이 세계에서 전생한 케이스지만. 아, 겉보기에 나이는 내가 어려 보여도 정신적인 나이는 훨씬 많으니 말 편하게 한다?”


셋은 내 말을 의심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어 보였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없겠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상황에서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등장했으니.


원래 의지할 곳을 잃은 사람의 신뢰를 사는 건, 다섯 살배기 꼬맹이를 속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기억을 되살려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풀어놓자 놈들의 경계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부담이 사라진 놈들은 곧장 질문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호, 혹시 저희가 왜 이곳에 순간이동한 건지 아세요? 대체 이게 뭔 일인지···?”

“···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혹시 아시나요?”


어차피 내게서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던지는 질문들이었다.


정말 귀찮았지만 나는 꾹 눌러 참으며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나도 영문을 모른 채,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어. 내가 아는 것도 너희랑 똑같지. 미안하지만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아.”

“그, 그런가요······.”


집으로 돌아갈 희망이 사라진 놈들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쩌나 이 정도로 실망하면 섭한데.


내가 이런 연기를 하면서까지 놈들에게 친절히 대한 건 다름이 아니다. 내 거짓말을 믿게 해야 했으니까.


“좋아, 대충 상황을 이해했으면 말해야 할 게 있어. 너희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야.”

“···네에? 목숨이라뇨?”


나는 괜히 분위기 잡고 무거운 표정을 연기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론부터 말할 게. 나는 너희들의 목숨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상황파악을 전혀 하지 못한 놈들은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렸다.


그나마 나선 것이 조금이나마 머릴 굴릴 줄 아는 김민철이었다.


“어째서죠? 아까처럼 부하들한테 명령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명령을 내릴 수는 있어도 이런 일의 결정권은 내게 없어. 내 아버지한테 있지.”

“······그 분이 이 저택의 주인이군요.”


핵심을 짚어낸 김민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철한 분이야. 국경을 지키며 온갖 외적과 싸워오신 분이라 적에게는 자비가 없으셔. 그분이 침입자를 용서할 리가 없지.”


내 말을 진지하게 믿는 셋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일의 결정권이 내게 없다?


그럴 리가.


명색이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 가문의 후계자인데 이 정도의 일도 처리할 권한이 없을 리가 있나.


그리고 내 아버지, 벨터 리하트 또한 적에게 자비가 없다는 말은 진실이긴 해도, 저항 의사가 없는 자를 이유도 없이 죽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놈들이 이러한 사실을 눈치챌 방법은 없었다.


“그, 그러니까, 아버지 분께서 저희를 보면 바로 죽일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내 확언에 이연지가 패닉을 일으키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 그럼, 그 사람이 지하실에 내려오면 우린 바로 죽는다는 말이잖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거 아니야?!”


한동석은 그런 이연지의 어깨를 붙잡으며 진정시켰다.


“진정해. 명령 한마디면 끝인데 굳이 우리를 지하실에 가뒀다는 건, 그 사람이 지금 이 저택에 없다는 뜻이잖아. 그렇죠?”

“그렇지.”


나는 짧은 대답으로 한동석의 말에 긍정했다.


실제로 아버지는 전이 사태 당일에 저택에 없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시기를 고려한다면 분명 척추뼈 산맥 앞에 위치한 용골 요새를 시찰하러 가셨을 거다.

한창 마수들이 활발해 질 때니까.


“아버지가 언제 돌아오실 지는 몰라. 당장 내일 오실 수도 있지.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희의 처분을 미루고 불편함 없이 식사를 제공하는 것 정도야.”

“······.”


암울한 침묵이 지하실에 내려앉았다.


당연한 반응이다. 나를 만나 이제는 살았다고 여겼을 텐데, 내 입에서 나온 건 사망 선고였으니까.


그래도··· 채찍은 이만하면 됐나?

놈들에게 잔뜩 겁을 줬으니 이번에는 희망을 줄 차례였다.

물론, 그 희망은 다시 절망으로 바뀌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너희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내 한마디에 놈들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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