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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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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블랙빙고
작품등록일 :
2021.10.28 20:13
최근연재일 :
2022.10.01 11:40
연재수 :
2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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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53
추천수 :
621
글자수 :
1,208,896

작성
21.12.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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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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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영원의 정원

DUMMY

-치르렁 스르렁


낯선 쇳소리다.

소리는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수록 커졌다.


확인해보니 아멜리 부인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화랑에서의 일 때문인지, 비슷한 소리만 들어도 몸이 굳어온다.


열쇠 소리가 들려오는 곳마다 고용인들의 속도가 두 배로 빨라졌다.


“공자님? 오랜만에 집에 오셨는데 번거롭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멜리 부인. 공작 내외분이 오시니 걸맞게 준비하려면 빈틈없이 해야겠지요.”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답한 것 같다.

아멜리 부인의 미간 주름이 옅어졌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님. 편안한 산책길 되세요. 그럼 이만.”


아멜리 부인이 미스 레슬리를 발견했다.


“오전에 공지한 것은 확실히 전파했지요? 단 한 번의 실수도 안 되는 거.”

“네, 아멜리 부인. 침실과 응접실 담당 메이드들, 세탁 담당 모두에게 잘 전달했습니다. 조금 전 말씀하신 사항은 밀러씨에게 별도로 요청했고요.”


“좋아요, 미스 레슬리. 비상체제는 언제까지다?”

“오늘 저녁 만찬부터 크리스마스 파티 다음 날까지입니다. 아멜리 부인.”


공작님 내외분과 손님들은 저녁 식사 후 바로 돌아가신다.

고모님이 계속 계신다고 했으니 저들의 대화 주제는 그분을 지칭하는 것일 듯.


아멜리 부인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 메이드를 잘 뽑은 것 같네요. 좋아요. 이번 한주 잘 버텨 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아멜리 부인”


그녀들의 대화를 뒤로하고 저택을 나섰다.

커다란 양철 물뿌리개를 손에 든 파커씨가 보였다. 저택의 조경관리사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산책하러 가시나 봐요?”

“네, 호수 주변 좀 걸으려고요. 아멜리 부인이 신선한 공기를 좀 씌라고 했어요.”


“하하하! 맞는 말이네요. 런던은 공기가 너무 안 좋잖아요? 즐거운 산책 되세요. 공자님.”


잔디밭을 지나자 저택 옆으로 야구장 크기의 호수가 펼쳐졌다.


호숫가에 다다를 때였다.


“공자님!”


지수! 아니, 미스 레슬리다.

그녀는 품에 단지를 안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대청소는 다 끝났나요?”

“아뇨. 공자님. 한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 것요.”


“네. 그럼 무슨 일이라도?”

“아멜리 부인이 공자님 적적하지 않게 말동무라도 해드리라 했어요.”


아멜리 부인이 생각만큼 모질지는 않은 듯.

막상 내쫓고 보니 마음에 걸렸나 보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뭐예요?”

“공자님 좋아하시는 달달한 과자들요. 주방에서 챙겨왔어요.”


나는 단 거 별로 안 좋아한다.

백작님이 애들 입맛이었을까.

아, 열다섯 살 소년이니 아직은 애 맞구나.


단지를 품은 그녀가 내 옆에 따라붙었다.

호수 주위를 걷는 내내 그녀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단정히 올린 갈색 머리. 나를 항상 따뜻하게 바라보던 갈색 눈. 미소 지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입가 주름까지.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는 것 같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녀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저도 알아요. 공자님.”


심장이 덜컹했다.

방금 저 말은 자기도 나처럼 미래에서 왔다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백작님 몸에 들어왔다는 걸 안다는 거?


수많은 가설로 머리가 복잡해질 무렵,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저도 방에 거울 있어서 안다고요.”


마법의 거울이다.

백설 공주에 나오는.


“···그게 무슨 뜻이죠? 미스 레슬리?”

“저도······저 예쁜 거 알거든요? 그만 좀 보시라고요. 공자님.”


자기가 뱉은 말에 무안한 듯 그녀는 두세 걸음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다행히 가까이에 벤치가 있다.


“잠시만요. 미스 레슬리. 저기서 좀 쉬었다 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벤치 옆에 서서 호수를 바라봤다.


“미스 레슬리도 옆에 앉으세요.”

“아니에요. 공자님, 저는 서 있는 게 편해요.”


“과자 좀 먹으려고요. 제가 팔이 짧아서···.”

“아! 네. 그럼 잠시 앉겠습니다.”


그녀는 벤치 가장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정면으로 저택 1층의 아버지 집무실이 보인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그녀는 입을 열었다.


“공자님, 그거 아세요?”

“네?”


“이 벤치요. 백작 부인께서 좋아하시던 곳이에요. 시간 나실 때마다 와 계셨어요. 꼭 보물이라도 지키시듯요.”

“아, 네.”


“부인께서는 호수를 바라보실 때마다 케임브리지로 가족 여행 갔던 걸 말씀하셨어요. 굉장히 좋은 추억이셨나 봐요.”

“······”


내 기억 속엔 없는 가족 여행 이야기.

전해 듣기로 백작 부인께선 몇 년 전 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니 이 호숫가에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호수가 완공되고 몇 달 후에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슬슬 또 걸어 볼까요? 미스 레슬리? 보물 찾으러요.”

“그럴까요? 공자님?”


그녀는 사뿐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시 호수 둘레를 걸었다.


하늘을 둘러봤다. 푸르고 맑다.

회색빛 구름이 깔리던 런던의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이 투명하다.

하늘색과 다르게 머리는 점점 복잡해져 간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답이 나오는 것일까.

무슨 단서라도 있으면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진 않을 텐데.


-휴우


“죄송해요. 공자님”

“네? 왜요?”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신 백작 부인 말씀을 드렸네요. 계속 표정이 안 좋으신 걸 보니, 제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표정을 오해한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무룩한 눈짓과 입술 깨무는 것까지 전부 닮았다.


“아니에요. 덕분에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장소를 알게 되었잖아요.”


호숫가를 돌아 정원에 도착했다.

빽빽하게 심어진 키 큰 나무들 사이 미로처럼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곳을 지나친 후, 시간이 멈춰진 영원한 봄의 영역에 도착했다. 한겨울에도 정원 전체가 울긋불긋한 천연색의 향연이다.


어릴 적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원의 정원.’

어머니는 요정들이 마법을 부린 거라 하셨는데.


[리차드? 이곳에서 늦게까지 있으면 안 된단다. 왜냐면 여긴 요정들이 만든 곳이라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너는 이곳에서 그대로인데 엄마, 아빠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다면 슬프지 않겠니?]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으로 하신 말씀이셨겠지만 그땐 그 말이 왜 그렇게 서러웠던지. 그 말만 듣고 나면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는데.


미스 레슬리는 걸음이 빨라지더니 벤치를 가리켰다.


“공자님, 빨리요. 여기 앉으세요.”

“미스 레슬리도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공자님”


난데없이 그녀의 식물학 강의가 시작되었다.


“앞에 바닥 가득 노란색과 흰색으로 수놓은 꽃들이 ‘겨울 미나리’와 ‘스노우 드롭스’예요. 그리고 저쪽 보이세요?


얼떨결에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네? 어디요?”

“저기요. 저쪽 낙엽수 아래를 보라색으로 물들인 꽃들요. 저 꽃은 ‘시클라멘’이라고 불러요. 쟤는 꽃이나 잎에 물이 닿지 않도록 물을 줘야 해요. 그래서 땅속에 따로 물길을 만들어요.”


이번엔 그녀의 손가락이 앞쪽을 가리켰다.


“‘잉글랜드 프림로즈’예요, 공자님. 정말 귀부인 같죠?”

“그러네요, 정말 우아한 모습이에요.”


“‘프림’은 라틴어로 ‘프라임’이라 하는데, 첫 번째라는 뜻이래요. 그래서 꽃말도 첫사랑이에요. 이외에도 영원한 젊음을 나타내서 여신의 제단에 바쳐졌다고도 하고요. 영원한 희망이라고도 한데요.”


그 후로도 그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꽃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영국의 메이드들은 이런 지식이 기본상식일까.


“이런 건 원래 다 배우나요? 당장 꽃집 차려도 되겠어요. 진짜로요.”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어요. 성공회 성당에서 정원사로 일하셨거든요. 일하실 때 옆에 앉아 있으면 꽃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들려주셨어요.”


“저 같으면 몇 번을 들어도 이런 지식은 금방 까먹을 것 같은데.”


칭찬을 받은 미스 레슬리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 기억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데요. 꽃들은 전에 알고 있던 것처럼 잘 외워지더라고요. 물론 제가 좋아하기도 하지만요.”


그녀는 정원 주위를 살폈다.


“겨울에는 꽃을 볼 기회가 없잖아요. 공자님 덕분에 이곳에서 꽃들을 보니까요. 가족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졌어요. 정말 감사해요. 공자님”


지수의 가족들이 생각났다.

그들을 보며 ‘가족이란 저런 것이구나.’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줬던 사람들.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리고 싶은 생각이 들게 했던, 그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미스 레슬리? 괜찮다면 가족들 얘기 더 해주세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제 밑으로 동생 네 명이 있어요. 남동생 하나, 여동생 셋. 그중 여동생 둘은 쌍둥이예요.”

“형제자매가 많아 좋겠어요. 전 형제자매 많은 게 항상 부러웠거든요.”


“부럽긴요. 공자님. 저희는 밤마다 잠자리를 두고는 한바탕 자리싸움이 벌어지곤 했어요.”


그녀는 갸우뚱하는 나를 보고 피식 웃는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우리 집은 방 하나에 일곱 명이 함께 생활했거든요. 저와 동생들은 침대 두 개를 붙여서 잤고요. 침대라고 해야 긴 나무 상자에 짚을 넣은 매트가 다예요.”


“침대 두 개에 다섯 명이면 좀 좁았겠어요.”

“네, 맞아요. 아주 좁았어요.”


미스 레슬리는 한숨을 쉬었다.


“겨울에는 양쪽 끝이 상당히 춥고 자다가 굴러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모, 제가 맏언니이니까······저와 둘째가 주로 끝에서 잤지요”


그녀는 갑자기 허리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 하하하. 혹시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보셨어요?”


초승달 모양으로 휜 눈썹과 함께 그녀의 입가에 주름이 졌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이런 나의 심란한 마음과 상관없이 그녀는 한껏 들떠서 말을 이었다.


“꿈속에서 그 순간이 딱 느껴지거든요. ‘어? 떨어진다! 하고는 쿵! 아야!’ 그리고 다시 올라가서 자고, 또 떨어지고. 아하 하하하.”


웃을 만한 사연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서는 서로를 쳐다보며 한참 웃었다. 미스 레슬리는 눈에 눈물이 글썽일 정도.


웃음이 잦아졌다.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시면서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하고 입도 줄여야 하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구두 끝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깨를 으쓱하며 양쪽 구두 끝을 톡톡하며 부딪혔다.


“벌써 이 저택에 온 지 6년이 흘렀어요. 처음 저택에 들어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아마 왕자님이 계신다면 이런 곳에 계시겠지?’ 하면서요.”


그녀는 뭔가 생각난 듯 두 손을 모았다.


“아, 맞다. 혹시 후드 신부님은 기억나세요? 그분이 이곳을 소개해주셨어요.”


외워야 할 인물이 하나 더 늘어났다.


“근처 교구의 신부님이신가요?”


그녀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녀는 혼잣말인 듯 낮게 읊조렸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꿈이래요. 대부분은 이룰 수 없는 꿈이고요.”


그녀의 입술을 통해 세상에 나온 말들이 그녀를 깨웠다.

동화 같은 영원의 세계에 갇혔던 그녀는 차가운 현실로 풀려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공자님, 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이런 사적인 얘기는 드리면 안 되는데, 풍경에 취해서 제가 잠시 정신을 놓았나 봐요.”


덩달아 나도 벌떡 일어섰다.


“아니에요, 미스 레슬리. 제가 해달라고 한 건데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이제 슬슬 갈까요?”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너희 둘! 거기 잠시 서 봐!”


성인 남자 두 명이 어슬렁거리며 숲에서 나왔다.

그들의 조합은 블루스 브라더스의 영국판 집시들 같았다. 한 명은 홀쭉하고 한 명은 덩치가 있는.

하지만 그들은 유쾌해 보이지도, 코믹하지도 않아 보인다. 세상의 모든 불행과 궁핍함을 겪고 더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의 눈빛이다.


난 미스 레슬리를 내 뒤로 보냈다.


“여긴 사유지입니다. 혹시라도 길을 잃었다면······.”


어느 쪽이 나가는 방향일까.

아니, 영지 전체가 리버스 백작 가문 땅이니 알아서 가라고 해야 할까.


고개를 돌려 미스 레슬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긴장한 눈빛으로 숲을 가리켰다.


“왔던 방향으로 숲을 지나다 보면 큰길이 나올 거예요. 길을 따라 내려가면 남쪽 숲이 나와요.”


미스 레슬리가 말을 끝내자, 마른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웃긴 꼬맹이들이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보자마자 나가라는 거야?” 이 싸가지 없는 것들이···.”


그는 손마디를 우두둑 꺾으며 핏대를 세웠다.



너의 소원이 말을 들어달라는 거라면 일단 들어는 줄 것이다.

그런 다음, 소원 하나 들어준 대가로···.

좀 처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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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악마와 계약한 화가(1) +2 21.12.04 846 15 11쪽
8 컨트리하우스(2) +2 21.12.03 888 18 11쪽
7 컨트리하우스(1) +1 21.12.02 962 19 12쪽
6 폭력교실(2) +1 21.12.01 1,024 21 11쪽
5 폭력교실(1) +1 21.11.30 1,105 2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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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년의 초상(2) +1 21.11.27 2,731 2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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