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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인 님의 서재입니다.

거중인 철구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SF

완결

이종인
작품등록일 :
2018.04.10 19:38
최근연재일 :
2018.05.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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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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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유와 슌스케의 밀약

DUMMY

며칠 후 슌스케는 사신의 자격으로 조선으로 떠났다. 부산포구에 배가 도달하자 슌스케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8년 전, 도망자의 몸으로 이곳을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세이메이의 일검이 아니었다면 글로버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터. 하지만 그날, 세이메이는 다리에 철퇴를 얻어맞고 불구가 되었다. 슌스케는 그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슌스케의 사신단은 동래부사의 접대를 받고 이튿날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8년의 세월동안 조선은 변한 것이 없었다. 일본인들이 단발을 하고 서구식으로 복식을 바꿔가는 동안 조선인들은 여전히 상투를 틀고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마차가 지나는 도로는 여전히 흙과 자갈 투성이였다. 마차가 퉁퉁, 튕길 때마다 일행들이 불편을 호소했지만 슌스케는 불편한 기색은 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참으로 다행 아닌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니 말야.”

일본 사신단이 경복궁 근정전에 들어서자 조선 조정에선 난리가 났다. 일본 사신단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가 아닌 '일본제국천황사(日本帝國天皇使)'란 이름의 깃발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조선의 접견관이 슌스케에게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일본은 예부터 조선을 상국으로 여겨 그 예를 갖췄는데 작금에 이르러 함부로 제왕을 칭하니 참으로 참람하고 해괴한 짓이외다.”

“무엇이 참람하다는 것이오.”

슌스케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조선 접견관은 목청을 더욱 높였다.

“모르고 하는 말이오? 우리나라는 '전하'라 칭하는 일을, 일본에선 '폐하'라 칭하니 이게 대놓고 우리를 하대하는 것이지 않고 무엇이오.”

“그럼 조선의 전하께서도 폐하에 등극하시지요.”

화가 난 조선 접견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무릇 천하엔 규범과 법도와 질서가 있는 것이거늘. 중원에 황제가 있는데 어찌 감히 일본 국왕이 황제를 칭하는가.”

조선 접견관의 일갈에 슌스케는 웃음을 지었다.

“이런 일로 트집을 잡으시다니 참으로 유감이외다. 자국의 깊은 내막을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이만 오해를 푸시지요.”

하지만 조선 측에선 이날의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일왕의 칙서는 전해지지도 못한 채 사신단은 도성 외곽의 허름한 객관에서 대기해야 했다. 일본 사신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하릴없이 세월을 소요할 뿐이었다. 슌스케의 보좌들은 저마다 우려를 표했지만 정작 슌스케는 태연하기만 했다.

“이 정도는 다 예상한 것이다. 전하의 자존감에 상처를 냈으니 보름이 아니라 한 달이라도 기다려야지. 그보다 박선유 대감에게선 아직 전갈이 없는가.”

슌스케는 조선의 왕을 만나는 일보다 박선유를 만나는 일을 시급하게 여겼다. 조선의 실세가 누구인지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슌스케의 기다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다음 날 비가 내리던 밤, 박선유가 객관에 나타났다. 동행자도 없이 혼자였다. 갓과 도포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박선유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슌스케에게 말했다.

“이것을 보낸 사람이 당신이오?”

선유는 탁자 위에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철마산초의 설계도였다.

며칠 전 슌스케는 수행원에게 설계도를 선유에게 전달하도록 했고 설계도를 본 선유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대체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오. 어떻게 이걸 소유하고 있으며 내게 보낼 생각을 한 것이오.”

박선유가 날선 목소리로 묻자 슌스케가 대답했다.

“알고 보면 대감과 저의 인연은 참으로 깊습니다.”

슌스케는 과거 자신이 조선에서 했던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메이슨 상회의 직원으로 상회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글로버의 지시에 따라 거중인 설계도의 행방을 추적했고 그 와중에 박선유와 이극, 개복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얻었노라 말했다. 또한 천신만고 끝에 거중인 설계도와 철마산초의 설계도를 입수하여 임무를 완수하였지만 글로버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아 도망쳐야 했던 사연도 얘기했다. 선유는 의심의 경계를 풀지 않았다.

“힘겹게 얻은 물건을 이제와 돌려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원래 조선의 것이니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성 싶은가?”

“설계도는 선물로 드리려고 가져온 것일 뿐, 돌려드릴 것은 따로 있습니다. 자, 어디서부터 풀어나갈까요. 일단 사신의 자격으로 조선에 왔으니 공무에 대해 얘기를 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슌스케는 작정한 듯 머릿속에 든 온갖 해박한 지식을 쏟아냈다. 세계 시국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설파하고 구라파와 미국의 열강들이 대대적으로 동양에 몰려들어 각국을 잠식해가는 시국과 약소국들이 침략을 당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선유는 슌스케의 유창한 조선어 실력과 천하정세에 대한 박식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슌스케는 미국과 영국, 덕국, 불란서, 화란에서 당한 멸시와 천대에 대해 언급하고 그의 필생의 책략인 '동아공동체론'을 펼쳤다. 동방의 작은 나라들이 힘을 합쳐 서구에 맞서자는 그의 논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겨질 만큼 그 논리가 정연하였다. 특히 동아가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슌스케의 주장은 선유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애초에 우리 같은 동양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끼리 힘을 합치는 것만이 그들에 대항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린 나이에 구라파에 견문을 다녀온 선유 역시 슌스케의 말에 공감하였다. 슌스케는 일본의 나가사키가 미국에 강제 개항당한 사연을 말하는 대목에서 은근히 조선을 치켜세우며 선유의 환심을 샀다.

“일본은 미국에게 단 한방에 무너졌습니다. 이양인들의 횡포를 세 번이나 막아낸 일은 동양에선 조선이 유일무이합니다. 조선의 의기야말로 동양 각국이 시급히 본받아야할 점이지요.”

선유의 눈빛이 흔들리자 슌스케는 더욱 열변을 토했다.

“조선엔 실학파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엔 불세출의 인재들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을 존경합니다. ‘목민심서’는 일본의 썩어빠진 관리들에게도 일독시켜야 할 도서지요.”

“일본인인 그대가 어찌 그리 조선 문화에 대해 잘 아시오.”

“옛부터 조선의 문물을 흠모해왔습니다. 고래(古來)로 일본에 문물 전파가 시작된 곳이 이 곳 조선 땅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조선에 온 이유도 과거의 해묵은 관계에서 벗어나 장래의 공동 발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귀국에서 바라는 게 뭐요. 아무 대가없이 호의를 베풀겠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슌스케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선은 일본에게 있어서 중요한 나라입니다. 서구열강들이 조선을 침탈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있어 방파제와도 같은 나라입니다.”

“방패막으로 삼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나쁘게 받아들이시면 그렇겠군요. 하지만 역으로 말씀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조선이 무너지면 일본도 안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조선이 강건해져야 일본 또한 안전하다. 지금 아라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부동항을 얻겠다며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미국은 또 어떻습니까. 일전에 큰 치욕을 겪었으니 설욕을 하겠다며 다시 쳐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이웃한 조선과 일본이 손을 잡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선유는 한동안 침묵하였다. 슌스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편치 않았다.

“나의 뜻만으로 어디 되겠소. 전하의 뜻이 있고 민심이란 것이 있지. 일본이 과거 임진년과 정유년에 일으킨 전쟁에 대한 감정도 아직 여전하고...”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과거의 일은 따져 무엇 하겠습니까. 조선은 병자년에 오랑캐에게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오랑캐의 나라 청과 군신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습니까.

선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조선은 대원군 집권 이래 쇄국을 국가 기조로 버텨오고 있소. 대원군이 물러나고 몇 해가 지났지만 그것은 변함이 없소. 대원군이 쇄국을 전염을 시킨 것인지 쇄국이 대원군을 전염시킨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요.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아시오. 겉으론 서구를 배척하면서도 궁궐이나 양반가에서는 서양제 도자기와 향초와 회중시계를 갖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는 거요.”

“신기한 것에 호기심을 갖는 일은 만인의 습속이지요. 지금 구라파의 모든 문물이 일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일본에서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일본을 통해 그 해법을 찾아보시는 것이. 굳이 서구에게 항구를 열지 않더라도 조선은 개화할 수 있습니다.”

선유가 모처럼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대가 조선 땅을 거쳐간 일이 왠지 우연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드오.”

선유에게 호의를 느낀 슌스케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대감께서 저와 뜻이 같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개항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좋은 방도가 있겠소?”

선유의 눈빛에 강한 갈망이 피어났다. 그것을 확인한 슌스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먼저 대감의 골칫거리를 청소 해드리겠습니다.”

“골칫거리?”

슌스케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겉은 조선인이고 하는 짓은 이양인인 자가 있지요. 대감께선 그 자에게 약점을 잡히셨구요.”

선유는 슌스케가 말하는 인물이 글로버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당신이 어떻게 글로버를 아시오?”

“그자 밑에서 일을 해봐서 압니다.”

선유는 슌스케가 글로버와 자신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자는 내게 꼭 필요한 인물이오.”

선유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신뢰의 증표를 보일 테니 그 후에 나랏일을 다시 논하시지요.”

슌스케는 다시 조선에 오는 날 선유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선유를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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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최종회] 거중인의 부활 18.05.17 745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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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대철인 메이지1호 18.05.13 401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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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갈림길에 선 옛 벗들 18.05.10 569 0 7쪽
39 주인에게 짖는 개는 쓸모가 없다 18.05.09 408 0 7쪽
38 글로버의 인생역경 18.05.08 382 0 10쪽
» 박선유와 슌스케의 밀약 18.05.07 450 0 11쪽
36 슌스케의 야망 18.05.06 406 0 9쪽
35 모든 것이 예전과 다르고 18.05.05 424 0 8쪽
34 슌스케의 대철인 계획 18.05.04 425 0 8쪽
33 끝나지 않은 전쟁 18.05.03 442 0 8쪽
32 거중인의 최후 18.05.02 427 0 10쪽
31 거중인 대 거중인 18.05.01 425 0 12쪽
30 늦었어 멍청아 18.04.30 421 0 7쪽
29 사면초가 18.04.30 461 1 9쪽
28 눈에는 눈, 이에는 이 18.04.29 453 0 11쪽
27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18.04.29 463 0 9쪽
26 모진 세상, 모조리 뒤엎어 주마 18.04.28 633 0 11쪽
25 거중인 다시 일어나다 18.04.28 450 1 8쪽
24 글로버의 올가미 18.04.27 442 1 12쪽
23 심야의 대혈투 18.04.27 480 2 10쪽
22 나만 없어지면 될 일 18.04.26 439 3 10쪽
21 불란서의 침공 18.04.26 434 2 8쪽
20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셈법 18.04.25 462 1 8쪽
19 복수는 나의 것 18.04.25 514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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