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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님의 서재입니다.

전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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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작품등록일 :
2011.11.10 19:59
최근연재일 :
2015.12.1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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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1.06.17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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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사냥이야기 148 - 흑야 3

DUMMY

백성들은 제국 차원의 거대한 흐름에 둔감했지만 소소한 재미를 던져주는 사건은 누구보다 민감했다. 입담으로 즐기는 차원을 넘어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건 엽마군에서 펼치는 마갑기 축구 경기였다. 다른 건물은 뜸한데 한 곳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함상세가에서 운영하는 상영관에 들어가려고 인파는 한없이 뒤로 밀렸다.


``오늘 결승이지? 어제 할 경기를 오늘로 미룬 거 맞지? 시상식하면 안 돼!"


마른 오징어를 씹으며 어느 소년이 소리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모용무백은 눈썹을 찌푸렸다.


``결승이 맞아 얼른 들어가자."


날씨가 흐린 가운데 기어코 빗방울이 조금씩 내렸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번호가 박힌 의자에 앉기 전에 모용무백은 먼저 자리를 잡은 한 무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 일곱 명을 거느린 자신의 경쟁자 해동민이 편안한 자세로 영상화면을 구경했다. 떼를 지어 함께 움직이는 다른 녀석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너도 왔었냐? 어디에 찍었냐?"


힐끔 자신을 보고 선수들이 입장하는 장면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해동민에게 모용무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풀었다. 힘깨나 쓴다는 세가의 자식들은 자신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유독 한 녀석만 자신을 우습게 여겼다. 가끔 훈계도 하고 도주할 길을 막고 협박도 했지만 그때마다 싸움으로 번졌다. 순찰 중인 치안대원이 다가와야 해결이 되었다. 폭력으로 치안소에 갇히면 며칠 동안 나오지 못했다. 치안소장에 의해 무관에 소식이 전달되면 징계가 내려졌다. 그러나 자신이나 해동민은 한 번도 무관에서 징계를 받은 적이 없었다. 치안소에 들어가자마자 집으로 연락이 닿아 바로 풀려났다.


자신이 나오는 거야 당연했다. 그러나 해동민이 치안소에서 나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 가신(家臣)을 통해 치안소장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때 치안소장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자신의 목을 자르는 게 더 빠릅니다라고 외치며 귀족원 감사단 제2 과에 소속된 허준표 남작을 쫓아냈다.


``승패는 9대 7, 여포님에게 찍었다. 그러는 넌?"


대답을 들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얼떨결에 대답이 나갔다. 대답할 마음이 없었는데도 가볍게 입이 열렸다.


``당연히 흑치부족을 이끄는 흑치소공에게 찍었다. 누구도 깨지 못해! 승패는 8대 7이다."


두 소년은 상대를 노려보더니 콧방귀을 거세게 낀 것처럼 고개를 세우며 삽시간에 서로를 외면했다. 차가운 냉기류가 두 소년 집단에 형성됐다.


엽마군에서 세운 마갑기 축구경기의 규칙은 일반적인 축구와 궤도를 달리했다. 마갑기 축구경기는 집단 공격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고 규칙을 만들었다. 11명의 선수가 아니라 11팀의 선수가 출전한다. 축구경기가 거대한 평야에서 벌어질 때는 만 명 단위로 격전이 벌어진다. 중경의 축구경기장에서 벌어질 때는 공간의 한계로 백십 명이 대표로 출전한다. 총 이백이십 대의 마갑기가 경기장에서 뛰게 된다.


세세한 규칙은 존재했지만 크게 제작된 공을 골대 안으로 넣으면 승리했다. 몸싸움, 상대에 대한 태클, 온몸을 사용해서 공을 잡는 행동 등등 모두 허용했다.


반칙은 팀원마다 몸에 걸린 밧줄이 끊기거나 풀어져 이탈할 경우에 주어졌다. 한 팀은 하나의 기사단처럼 같이 움직여야 했다. 리더와 한 몸이 되어 팀원은 뛰어야 했다. 리더는 리더끼리 몸동작을 통해 의견을 나누며 작전을 짜야 했다. 제한된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는 건 일반 축구와 같았다.


별부를 제외한 엽마군에 적을 둔 기사라면 열두 개의 팀 중 하나에 소속되어야 했다. 소속된 팀이 우승하면 한 달 동안의 휴가가 기다렸다. 지금은 상영관을 통해 들어오는 돈이 있어 포상금까지 지급되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결승전이 벌어질 때마다 제국의 시선이 엽마군 마갑기 축구경기장에 쏟아졌다. 그런 것에 여포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경쟁자인 흑치소공을 이기고 싶었다. 그것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현재 승패는 7대 8이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속공에 1점을 내준 게 컸다. 앞으로 경기는 10분 남겼다. 여기서 점수를 내지 않으면 이길 가능성은 한없이 작아졌다.


``무조건 앞으로 달려라, 마지막을 맡기겠다. "


중앙 후열로 이동하기 전에 왼쪽 날개의 리더 최계남을 스치며 소곤거렸다. 여포의 시선은 레드러쉬에 소속되었지만 실력은 골드러쉬인 마갑기가 마지막을 장식하기를 기원했다. 그를 유심히 보다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점을 내준 상태였다. 중앙선에 선 심판이 공격하라는 휘슬을 불자 여포는 돌격하기 쉽게 몸을 숙였다. 뒷열의 리더들이 볼 수 있게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중앙선에 위치한 앞열에게 소리쳤다.


``붙어!"


앞열에 위치한 다섯 팀이 한꺼번에 자신이 책임질 상대를 향해 쏘아졌다. 상대의 몸을 잡고 제어불능 상태로 만들 때 여포는 뛰기 시작했다. 앞열에게 포획되지 않은 적팀이 달려오자 몸통으로 밀어붙이며 우측으로 길을 뚫었다. 계속 쫓으려는 걸 상대를 책임진 앞열이 달라붙어 늘어졌다. 너무 빨리 나서서 허리에 묶인 고무줄이 출렁거렸지만 팀원들은 신속하게 뒤쫓았다.


자신만 노리는 흑치소공이 좌측으로 가리라 예상하고 갔다가 방향을 바꿔 달려오고 있었다. 신호에 따라 허공을 뚫고 공은 자신에게 날아왔다. 팀원들이 상대팀에 의해 붙잡혔다. 그래서 공이 예상보다 앞섰다. 최대한 고무줄을 늘려 실수하지 않도록 정확하게 온몸으로 붙잡았다. 그 덕분에 몸은 바닥으로 굴렀다. 허리에 묶인 고무줄이 한없이 꼬였지만 상관없었다.


팀원들이 흑치소공의 팀에게 하나씩 발목이 잡히자 벌떡 일어선 여포는 예정된 공간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그가 힘껏 골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끝에서 끝으로 공을 던져야 했다.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자신은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공이 잘못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최선을 다해 허공으로 던졌다.


공이 날아가자 상대팀이 급반전했다. 후속으로 달려오던 팀들이 상대의 발목을 잡고 뒤쫓지 못하게 쓰러졌다. 상대팀에게 공이 잡히지 않도록 분신쇄골할 때 최계남이 이끄는 팀은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뛰었다. 정확하게 날아왔지만 팀원 중에 하나가 찰나적으로 상대팀에게 붙잡혔다가 뿌리친 탓에 생각보다 높게 공이 날았다. 늦으면 허사였다.


``사다리를 펼쳐!"


이대로 가면 놓쳤다. 리더의 지시가 떨어지자 앞에서 달리는 마갑기들이 멈춰섰다. 그 뒷열이 다람쥐처럼 뛰어 어깨에 올라탔다. 멈춘 마갑기는 오르기 쉽게 손까지 잡으며 도왔다. 최계남은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팀원의 어깨와 허리를 지침대 삼아 허공으로 솟구쳤다.


뛰어온 상대팀에 의해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었지만 최계남은 신중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공을 붙잡았다. 이어서 연속 동작으로 골대를 향해 공을 던졌다. 골키퍼가 골대를 막으려고 시도했다. 골대의 동그라미 안으로 골키퍼조차 들어서지 못하는 탓에 방향만 맞추어 사다리와 비슷한 방어벽을 펼쳤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소용이 없었다. 골대를 향해 던질 수 있는 라인 안까지 온 이상 자신의 승리였다. 내심 확신했지만 실수할까봐 공이 골대 안으로 날아가는 순간까지 집중했다.


사다리가 완전히 무너진 탓에 떨어진 몸은 구르는 와중이었지만 예상한 대로 커다랗게 휘어진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자 온몸에서 힘이 솟구쳤다. 승패는 8대 8이었다.


상대팀이 작전 타임을 요청했다.


다시 경기장에 올라서자 관중들의 함성이 요란하게 터졌다. 하늘의 공기마저 진동할 정도로 함성은 경기장에 선 선수들의 가슴까지 가득 채웠다. 흥분한 열기가 꺼지지 않는 가운데 경기는 속행되었다.


해동민의 시선은 연신 경기장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선수들이 펼치는 한 동작마다 절묘한 기술이 숨은 탓에 알게 모르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 상대를 붙잡는 손 모양이나 뿌리치는 손 동작은 쉽게 모방하기 어려웠다. 너무 찰나적으로 스치는 화면이라 아쉬움이 컸다. 그것도 전문적으로 무예를 익히는 사람이 아닌 마법사에 의해 중계가 되는 모양이었다. 절묘한 손 동작이 터졌는데도 무심하게 지나쳐 궁금증만 증폭시켰다.


그때 해동민의 귀를 자극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쉽군! 학표권에서 호조각으로 넘어가는 장면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던 모용무백은 슬그머니 옆으로 얼굴을 움직였다. 누군가 자신을 보는 느낌에 소름이 돋으려 했다. 불길한 예상은 맞았다. 경쟁자 해동민이 보고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친 둘은 정색하며 서로를 외면했다.


옆 자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쟁자가 있어 상영관에서 보여주는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와 달리 자꾸 옆 자리에 앉은 경쟁자가 거슬렸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시간은 지났다. 경기 종료 3분 남았었는데 중요한 장면마저 놓쳤다. 괜히 심술만 솟구쳤다. 모용무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 판 붙을까?"


``누가 겁낼 줄 알고!"


말을 꺼내자마자 나오는 대답에 두 소년은 자리를 박차고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작은 무도장이었다. 다섯 명의 소년들이 사범에게서 수련을 받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해동민과 모용무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자리를 빌리겠습니다!"


작은 무도장에서 사범을 맡고 있던 송비홍은 난감해졌다.


``지금 아버님이 안 계신다. 조금 뒤에 오실 테니 그때까지 참아라. 승부는 어떤 방식으로 할 거야?"


``마지막으로 팔 대 팔 대결을 펼칠까 합니다. 괜찮겠지?"


모용무백의 입에서 마지막이란 소리가 나오자 해동민은 게슴츠레 흘겨봤다. 그동안 질기게 보았던 얼굴을 이제 못 본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젠 못 보는 거야?"


우발적으로 속마음부터 나왔다.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에 호기심마저 드러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모용무백의 눈가에 이채가 서렸다가 사라졌다.


``엽마군에서 학생들을 모으고 있다. 그중에 별부란 곳에서 직접 학생을 가르치는 코스가 생겼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그곳에 들어간다."


엽마군 별부란 소리가 나오는 순간부터 해동민의 가슴은 떨렸다.


``네 똘마니 일곱 명까지 모두 가는 거야?"


``똘마니라니? 우리 집안의 가솔 중에 무인으로서 자질을 갖춘 젖먹이들을 고르고 골라서 키운 당사자들이야. 이들이 별부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어. 네가 데리고 있는 녀석들과 차원이 틀려."


또다시 잘난 척 으스대는 모용무백의 태도에 해동민의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엽마군 별부에서 소년들을 뽑는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당연하지!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으니깐 하지만 청년이 되기 직전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면서 별부에서 관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니 기정사실이 될 거야. 엽마군에서 학생을 모으겠다는 건 3년 전부터 소문이 돌았었어. 연구소를 짓느라 차일피일 미루던 건물을 완공한 게 한 달 전이니 본격적으로 모으겠지. 별부에서 학생을 모으는 건 내년이지만 실험적으로 약간 모아서 한다고 하셨어."


미주알고주알 다 떠벌리려다가 참는 기색에 역력했다. 그 와중에 자랑스럽게 외치는 모용무백을 보며 해동민은 고민에 빠졌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엽마군 별부, 그곳은 절대지존들의 세계였다.


결심이 선 해동민은 자신을 따르는 일곱 소년에게 돌아섰다.


``팔 대 팔 대결을 하자. 진다면 이대로 살겠지만 이기면 우리 모두 엽마군 별부에 갈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형님을 설득하겠다. 그곳이 어떤 세계인지 모두 알 거다. 수천의 마족이라도 엽마군 별부라는 이름을 들으면 벌벌 떤다. 우리가 장성하면 별부에서 활동할 수 있다. 우리도 수천의 마족을 갖고 놀 수 있다."


해동민을 대형으로 둔 일곱 소년이 환호하며 결의를 다졌다. 작은 무도장을 연 송만갑은 어느새 다가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소년들은 냉혹한 현실을 아직 몰랐다. 그렇지만 엽마군 별부가 그 어떤 곳보다 대단하다는 건 알았다. 그들에게 수천의 마족과 수만의 천족은 두렵지 않았다. 오직 엽마군 별부가 이상향이었다. 그 마음이 백성들의 마음이었고 간절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작게나마 무도장을 연 어느 노인의 소망이었다. 이대로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시대는 제국에게 전쟁을 원했다. 작게나마 제국에 도움이 되고자 무도장은 연 십이독수(十二獨手)의 후예 송만갑은 미래를 짊어진 소년들에게 다가섰다.


``팔 대 팔 대결을 펼친다고 했지? 헐헐헐, 좋을 때야 좋을 때."


아들과 수련생들이 주변을 정리했다. 대결을 펼치다 일어날 검풍을 피해 액자와 꽃병을 치웠다. 한편에 쌓기 시작하자 송만갑은 두 소년 집단을 앞에 세웠다.


``저녁이 가까웠으니 먹고 나서 하자. 얼마를 걸 거냐? 평소처럼 큰 은전 한 개로 할 거면 심판으로 나서지 않겠다. 마지막 대결이 될지 모르잖아 될 수 있으면 많이 걸어라."


안 그런 척 행동하지만 두 소년은 세력가의 자제였다. 없는 살림에 세력가의 자제에게서 수고비를 뜯는 건 나쁘지 않았다. 늙어서 세월의 때만 잔뜩 낀 송만갑은 히죽 웃으며 두 소년을 지그시 응시했다.


모용무백과 해동민, 저도 모르게 둘은 눈싸움을 펼쳤다. 기세에서 죽기 싫어 상대의 눈초리를 피하지 않았다. 귓전으로 박히는 예사롭지 않은 노인의 말에 자연스럽게 반응해서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금전 두 개를 걸겠다. 네 능력으로 가능할까?"


일부러 자극하기 위해 빈정대는 말투가 모용무백에게서 흘러나왔다. 상대가 흥분할수록 이길 확률은 높아졌다. 경쟁자에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기고 싶은 게 속마음이었다.


``째째하게 굴지 말고 금전이 아닌 미스릴 두 개로 하자."


해동민은 그동안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만든 미스릴 두 개를 속주머니에서 꺼냈다. 미스릴 두 개가 무척 아까웠지만 눈앞의 모용무백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모용무백이 소리쳤다.


``밖에 손위사가 있어? 있다면 별장에 가서 집사에게 미스릴 두 개를 갖고 와 아니 다섯 개!"


기세에서 지고 싶지 않은 건 모용무백도 마찬가지였다.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해동민의 태도에 참을 수 없었다.


``미스릴 다섯 개는 가능하겠지? 그 정도 능력도 없으면서 나에게 여태껏 덤빈 건 아니겠지?"


이미 기호지세였다. 여기서 무너지는 건 그동안 쌓은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소년이지만 의형을 따라 통만 커진 해동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소리쳤다.


``막내야! 별장에 가서 주집사에게 내가 부탁한다고 미스릴 다섯 개를 갖고 와라."


잠깐 멈춰 두 개가 있으니 세 개만 갖고 오라는 말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외치는 순간 자존심이 뭉개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절대 눈앞의 모용무백에게 질 수 없었다. 제발 순수하게 은집사가 미스릴 다섯 개를 내놓아야 할 텐데 하는 간절한 바람만 커졌다.


십이독수 송만갑은 경쟁 관계인 둘이 오랫동안 앙숙이기를 원했다. 경쟁자처럼 실력이 쑥쑥 느는 계기는 없었다. 참혹한 결말만 없다면 대환영할 일이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나? 저녁거리는 은전 스무 개면 배터지게 마련할 수 있으니 이것만 우선 쓰자고."


큰 소리로 며느리를 부른 송만갑은 시장에 가서 먹을거리를 사 오라고 당부했다. 작은 무도장에 있는 모두가 먹을 거라 수련생 세 명도 함께 붙여 보냈다. 한 명이 빠진 열다섯 명의 소년들에게 손으로 가만가만 가까이 올 것을 지시한 송만갑은 짚으로 엮은 마루에 앉았다. 무관에서의 수련장은 바위를 깔거나 배수시설을 갖춘 시설 아니면 일정한 공간에 모래를 깔기도 했다. 수련 방식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송만갑이 연 무도장은 손바닥만큼 작은 곳이라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짚으로 엮은 마루를 썼다. 근본적인 이유는 수학성이 원체 비싼 대지라 넓은 공간을 쉽게 가질 수 없었다.


``너희들을 처음 보았을 때가 이곳으로 이사한 다음 날이었지. 비가 오는 와중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아 눈길을 끌었었다. 그러고 보니 3년이 훌쩍 지났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종종 너희들의 대결에 심판관으로 나섰다. 너희들과 함께 해서 참으로 즐거운 나날이었다. 밖에서 듣자니 엽마군 별부로 갈 생각이더라. 그래서 그동안 붙은 정으로 너희에게 한마디 충고나 할까 싶어졌다. 늙은이의 노망일지 몰라도 그냥 들어둬라."


가볍게 말을 꺼내고 눈을 감았다 뜬 송만갑은 소년들을 하나씩 눈여겨보았다. 이제 못 볼 것이라 생각하니 아쉬움도 컸다.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제자로 거두고 싶기도 했지만 세력가의 자제들이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나름의 무예를 익힐 수 있었다. 괜히 끼어들어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엽마군 별부에 있는 절대지존이나 천무지존이라고 해도 나와 같은 늙은이에 불과하다. 굳이 그들을 한없이 높게만 생각할 게 없다. 무예란 말이다. 약간은 만만하게 보아야 익히기 편하다. 절대지존의 무예는 일반인에게 한없이 높게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진짜 절벽이 되어 눈앞이 깜깜해져서 배우지 못한다. 그때는 이 늙은이의 말을 생각하거라. 그들도 나와 같은 비루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씩하나씩 기본에 충실하면 넘을 수 있다는 걸 꼭 기억하거라."


소년들은 늙은 송만갑의 소리를 신중하게 듣다가 가볍게 여겼다. 별로 대단할 게 없는 말이었다. 그에 비해 해동민과 모용무백은 눈을 크게 떴다. 예사롭지 않다는 건 익히 알았지만 아버지가 항상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해동민도 기본에 충실하라는 당부를 매번 의형에게 들어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 그런데 또 들었다. 더 이상 다른 교훈은 내리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잡담을 나누자 뭐라 질문하기도 어색했다.


시장에서 여러 음식거리를 사왔다. 안에서 한창 요리하기 바쁜 상황에서 한 사람이 작은 무도장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뒤로 은집사가 조용히 들어섰다.


해동민은 의형을 보자마자 뛰어가 반기려다가 자신이 벌인 일이 생각났다. 쑥스러워서 우뚝 선 채 창피한 얼굴을 가리기 바빴다.


``안녕하십니까? 집사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생에게 많은 가르침을 내리신다고 하기에 고마운 마음에 언젠가 찾아뵐까 했었습니다. 이제서야 찾게 되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염치없지만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부탁합니다."


깊게 허리를 숙인 채 의형은 작은 무도장을 운영하는 노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건하면서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오히려 자신의 옆에 선 초라한 노인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일까 싶을 정도로 의형의 태도는 진지했다.


``헐헐헐 그렇게 말씀하시니 해동민에게 계속 가르침을 내리겠습니다. 워낙 궁핍한 생활이라 공짜로 베풀 생각은 없습니다. 다홍치마 격으로 제 아들에게 좋은 자리를 부탁하겠습니다. 이왕이면 엽마군 별부 정도면 딱 좋겠습니다. 하도 집에 가두어 놓고 잔소리만 늘어놓았더니 불만이 커져서 귀찮아졌습니다."


``동생에게 가르침을 내리시는데 그게 어렵겠습니까. 앞으로 많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제 동생이라 강하게 매를 들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염치없지만 그 부분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뜻밖의 부탁을 꺼내자 십이독수 송만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제가 젊을 적에 크게 다쳐서 어려울 거 같습니다만 해보는 데까지 매를 들겠습니다.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용기를 내겠습니다."


``오히려 커다란 부탁을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할 뿐입니다. 제 동생이라 모질게 건들지 못했습니다. 워낙 가능성이 커서 아깝고 난처했었습니다. 노야의 큰 결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몇 번의 대화가 더 이어졌다. 일부러라도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찾아 상대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 노력마저 엿보였다. 어딘지 서로를 조심하는 부분이 많았다. 오늘따라 의형이 너무 조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형의 태도가 어색했다. 요리가 끝난 음식들이 수련장으로 쓰이는 마루에 내려지자 해동민은 다른 생각은 않고 배고픔부터 해결했다. 열여섯 명의 소년들이 왁지지껄하게 떠들자 시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시끄러움 속에 잔잔하게 십이독수 송만갑의 목소리가 철장패의 귓전에 박혔다.


``아까 동민이가 외쳤습니다. 수천의 마족이라도 엽마군 별부의 이름을 들으면 벌벌 떤다고 하더군요. 믿어도 되겠습니까? 믿어도 된다면 동민이를 저의 제자로 삼을까 합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목소리에 담긴 내공의 힘이 시끄러움을 뚫고 다가왔다. 귀에 박히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상승절학이라 불리는 전음술 중 육합전성의 응용이었다. 다른 사람은 들리지 않겠지만 자신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그것도 육합전성으로 펼쳤다. 육합전성은 한 개인에게 보내는 게 아니라 무리 전체에 가까이에서 말하는 듯한 효과가 있었다. 그걸 압축해 한 사람에게 보낸다는 건 내공의 힘보다 일반 상리를 벗어난 내력의 운용술에 달렸다. 그 와중에 연속으로 묻는다는 건 그만큼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는 증거였다.


``수천의 마족이 몇 차례에 걸쳐 온다고 해도 겁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끝난다면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예상하지 못한 공격입니다. 이미 눈에 드러난 존재는 두렵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천계와 마계에 대해 모른다는 게 걱정입니다.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천계의 천왕과 마계의 마왕들이 어떤 수작으로 우리 세계를 도모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지하게 답변했지만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맛있어 보이는 제육볶음을 철장패는 상추에 싸서 입에 넣었다. 달달하면서 매콤한 제육볶음이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육볶음을 한 움큼 그릇에 담아 밥과 비볐다.


보는 순간 절대지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당대 철패왕에게 물었다.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에 십이독수 송만갑은 일부러라도 걱정을 털어냈다. 확실하게 자신은 늙었다. 당대 철패왕은 저 먼 곳을 바라보는데 자신은 겨우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만 헉헉거렸다. 왠지 제국의 미래가 마냥 어둡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고 패기에 넘친 절대지존이 제국의 기둥이 되어 꿈틀거렸다. 자신은 늙었지만 마찬가지로 절대지존의 후예였다. 늙은 만큼 세상에 대해 노련했다. 서서히 피어나는 소년들을 무럭무럭 자라도록 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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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알림] 씁니다. +22 21.02.28 718 0 -
296 대륙쟁패 14 - 악마답게 6 +28 15.12.11 2,539 73 11쪽
295 대륙쟁패 13 - 악마답게 5 +6 15.12.07 1,660 54 10쪽
294 대륙쟁패 12 - 악마답게 4 +8 15.11.30 2,033 68 10쪽
293 대륙쟁패 11 - 악마답게 3 +9 15.11.26 1,492 63 8쪽
292 대륙쟁패 10 - 악마답게 2 +13 15.11.25 1,591 54 11쪽
291 대륙쟁패 9 - 악마답게 +10 15.11.20 1,845 72 14쪽
290 대륙쟁패 8 - 너에게 미쳤다 c +9 15.11.17 1,628 59 16쪽
289 대륙쟁패 7 - 너에게 미쳤다 b +11 15.11.14 1,607 67 17쪽
288 대륙쟁패 6 - 너에게 미쳤다. a2 +11 15.11.12 1,509 69 11쪽
287 대륙쟁패 5 - 너에게 미쳤다. a +20 15.11.11 1,843 77 9쪽
286 [알림] 계속 쓸까 합니다. +64 15.11.11 2,378 40 1쪽
285 대륙쟁패 4 - 당신에게 미쳤다 4 +86 11.11.10 6,844 124 16쪽
284 대륙쟁패 3 - 당신에게 미쳤다 3 +25 11.11.04 4,553 87 22쪽
283 대륙쟁패 2 - 당신에게 미쳤다 2 +21 11.11.02 4,801 97 16쪽
282 대륙쟁패(전쟁이야기II) 1 - 당신에게 미쳤다 +52 11.11.01 5,525 103 12쪽
281 사냥이야기 159 - 흑야 end - e +81 11.07.05 7,492 117 25쪽
280 사냥이야기 158 - 흑야 end - d +24 11.07.03 5,265 94 22쪽
279 사냥이야기 157 - 흑야 end - c +12 11.07.03 4,994 83 25쪽
278 사냥이야기 156 - 흑야 end - b +18 11.06.30 5,344 94 26쪽
277 사냥이야기 155 - 흑야 end - a +28 11.06.30 5,458 90 21쪽
276 사냥이야기 154 - 흑야 넷 +27 11.06.26 5,540 95 25쪽
275 사냥이야기 153 - 흑야 셋 +18 11.06.24 5,221 85 28쪽
274 사냥이야기 152 - 흑야 둘 +16 11.06.22 5,003 90 20쪽
273 사냥이야기 151 - 흑야 하나 +8 11.06.22 5,058 85 24쪽
272 사냥이야기 150 - 흑야 5 +19 11.06.21 5,035 86 17쪽
271 사냥이야기 149 - 흑야 4 +7 11.06.21 5,506 85 20쪽
» 사냥이야기 148 - 흑야 3 +28 11.06.17 5,349 90 23쪽
269 사냥이야기 147 - 흑야 2 +26 11.06.16 5,465 97 20쪽
268 사냥이야기 146 - 흑야 +30 11.06.15 5,843 9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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