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붉다
이게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싶으면서도, 정강준은 순순히 오태영이 시키는 대로 하얀색 코너로 물러난다.
정강준이 중립 코너 포스트에 등을 기대고 양 쪽 링 줄에 한 팔씩을 걸쳐놓는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래왔었던 듯 태연자약하고 오만하다.
그제야 임정권은 정신을 차린다. 다시 일어나려는 듯 버둥거린다.
“가만있어, 가만있어! 너 위험하게 넘어졌다고 지금.”
눈 깜짝할 사이에 뒤바뀐 결과에 놀란 이성규가 두세 박자 늦게 두리번거린다.
“태영아. 어떻게 된 거야? 이기고 있었는데?”
하! 오태영이 헛웃음을 짓는다.
어떻게 된 거냐고?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땡!
타이머가 1라운드의 끝을 알리며 모두의 고막을 헤집는다.
그제야 정강준은 영원처럼 이어질 것 같던 1라운드가 겨우 3분밖에 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연해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지금까지 시간정지가 이렇게까지 짧았던 적은 없었는데.
임정권의 상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별 일 없겠지. 세게 때리지도 못했는데 뭘.
이성규가 타올을 들고 링으로 올라온다.
쓰러져 있는 임정권과 그 곁의 오태영을 흘깃 살펴보고는 정강준에게 와서 헤드기어의 벨크로를 끌러준다.
“이야... 너 진짜 대단하다! 이름이 뭐랬지? 오 코치가 직접 키울 만한 인재네.”
정강준이 쓴웃음을 짓는다.
대단하다니 무슨 멍청한 소릴. 단 한 순간도 우세였던 적이 없었는데.
차라리 말을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 터. 그러나 이성규가 아직 복싱과 타격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들통 나 버렸다.
코치 말이 맞았어. 그냥 레슬러인 것 같네. 나중에야 어떻게 변하든, 아직은.
땀으로 젖은 정강준의 머리와 얼굴과 목을 닦아준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다.
“MMA 한 번 해볼 생각 없냐? 너 정도면 금방 실력 올라올 텐데... 요즘 여기저기서 경기 자주 틀어주잖아. 알지?”
저도 미리 알아보고 온 건데... 푼돈 벌어가면서 고생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요. 당장에야 돈을 좀 만질지 모르겠지만, 세계시장 기준으로 보면 너무 페이가 짜요.
라고 말하려던 정강준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한다. 정강준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대답 없이 슬쩍 눈길을 돌려 오태영을 바라본다.
오태영은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 임정권의 눈에 들이대고 동공의 반응까지 검사하고 있다. 심각한 뇌손상을 입었다면 동공은 손전등을 비춰도 빛에 반응하지 않는다.
후우-.
오태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뇌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거든? 그래도 병원에는 한 번 가봐라.”
“어? 저 다운 당했어요?”
황당해진 오태영이 웃는다.
“뭔 소리야. 깜짝 놀랐잖아. 링 사고 터질 각이었다고.”
어리둥절해하던 임정권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링 포스트에 기대앉은 뒤에야 오태영은 정강준에게 다가온다.
이성규와는 달리 화가 난 듯한 얼굴. 따지듯이 묻는다.
“너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이번에도 정강준은 대답하지 않는다. 속으로 뇌까린다.
눈썰미는 좋은 것 같은데? 내가 사람은 잘 고른 듯.
*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이다. 정강준은 앉아있고, 오태영은 그 옆에 서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아 글쎄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그냥 본능적으로 손이 나갔나보죠. 정신 차려보니까 쓰러져 있었고.”
계속 모른다고 잡아떼자 오태영이 답답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버스 천장을 쳐다본다.
“...뭐 워낙 순식간에 일이 터지고 다운 나오는 게 복싱이긴 한데...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시합 보다가 잠깐씩 놓칠 수는 있어. 나도 알아. 그런데 이런 건 말이 안 돼.”
정강준은 시치미를 뚝 떼고 의뭉스럽게 되묻는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데요.”
“복싱은 눈으로 보고 공격을 피하는 운동이 아니야. 그러면 늦어. 주먹은 눈보다 빠르니까. 경험으로 미리 판단하고 예측해가면서 반응을 하는 거라고. 이 간격이면 이게 나올 거다 저게 나올 거다 이런 낌새를 미리 느끼고 공격 받기 전에 알아차리는 거란 말이야. 그런데 아까 거기서는 아무런 조짐이 없었어. 나도 못 봤다고. 정권이가 인파이트 뜨겠다고 일직선으로 달려들려고는 했었지만, 아까 그 간격 그 거리에서는 불꽃이 안 튀어. 튈 수가 없어. 불가능하다니까? 나는 네가 아까...”
“아까?”
“네가 잠깐 사라진 줄 알았다.”
오싹. 처음으로 정강준의 목 뒤의 솜털이 다 곤두선다.
뭐야 이거? 잡담해가면서 설렁설렁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만.
오태영이 천장을 보고 있었기 망정이지 눈을 마주하고 있었더라면 뭔가 발각 당했을지도 모른다.
우와... 이 정도 눈썰미면 백분위를 따지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거의 모의고사 전국 수석 수준의 안목 아닌가.
앞으로는 이 인간 눈을 속일 방안도 마련을 해야겠네. 시간이 멈췄을 때 위치를 많이 움직이면 안 되겠구나.
“저기 근데... 정거장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뭐? 야이 씨. 말을 해줘야 될 거 아니야?”
“아니 자기가 알아서 내려야죠. 애도 아니고.”
“아 이런 망할.”
내리는 문으로 가 선 오태영이 정강준을 다시 돌아본다. 잊을 뻔하다가 생각난 듯 말을 건넨다.
“축하한다. 아까 다운 당한 거.”
“아니 그게 축하받을 일이에요?”
“그렇지. 너 같은 경우엔.”
“왜요?”
“생애 첫 다운을 당하게 되면, 사람의 본색이 드러나게 돼 있거든. 괜찮았어, 너는. 피가 붉더라고.”
정강준은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내가 다운 당했었나? 아 맞다. 그랬었지. 그런데 다운 당한 다음에 어떻게 했었길래?
“생전 처음 다운 당하는 날엔, 다들 엉망이 돼. 개망신당하는 거지, 예외 없이. 열 셀 때까지 못 일어나는 경우가 제일 많지. 간신히 일어나봤자, 쫄아서 등 돌리고 도망 다니는 놈들이 대부분이고. 나는, 첫 다운 당하고 나서 겁먹고 시합 중에 질질 쳐 짜던 새끼도 한 놈 봤지.”
오태영과 정강준이 동시에 웃는다. 정강준은 웃겨서, 오태영은 기가 막혀서.
대단한 놈이야. 첫 다운 당하고 간신히 일어난 주제에 정권이한테 도발을 날리다니.
손짓으로 적을 부르고 있었다 분명히. 이리 와. 다시 붙자. 내가 이길 때까지.
오태영의 생각에 정강준 정도의 반응이면 모의고사 전국 수석 정도는 아니어도 한 과목 전교 1등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녹다운Knockdown이라는 과목이 있다면야 말이지만.
“첫 다운은 평생 기억하게 돼. 나도 그렇고, 너도 그럴 거야. 너 같은 경우에는 아마도 기억날 때마다 자랑스럽겠지. 스타트 잘 끊었어. 그래서 축하한다고 한 거고.”
스타트? 이제 그만두라는 말은 안 하겠다는 뜻인가.
삐익!
정강준이 손을 내밀어 정차 벨 스위치를 눌러준다. 한 정거장을 지나치고 난 뒤에도 정신 못 차리고 벨 누르는 걸 깜빡하고 있던 오태영이 움찔한다.
벨 스위치에 피처럼 새빨간 불이 들어온다.
*
“잠이 안 와요. 몸이 이상한 것 같은데 이거 왜 이러는 거예요?”
“...”
오태영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말 없이도 새벽 두 시에 정강준의 전화를 받은 분노가 전화기 너머로까지 잘 전달된다.
“야 이 개샊...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결을 해야지!”
“뇌에 이상이 생긴 거 아닌가 싶어서 전화한 거라고요.”
“아니 무슨 이런... 아 진짜 미치겠네? 지극히 정상이니까! 걱정 말고 자. 이기고 진 날은 다 그래. 스파링 자체의 흥분만 해도 워낙 강해서 원래 잠 잘 안 오는 게 정상이야. 아드레날린 때문에. 그런데 오늘은 이겨먹기까지 했으니 뭐. 기뻐서 잠을 못 주무시는 거지.”
“지는 날은요?”
“깨진 날은 열 받아서 잠을 못 자는 거고. 아 왜, 지금까지 그런 적 있었을 거 아니야? 좋아서 잠 못 잤던 날.”
“한 번도 없었는데요.”
“야. 어릴 때 어디 놀이공원 같은 데라도 가봤을 거 아니냐? 그럴 때는 전날 밤에 잠 안 오잖아 원래.”
“가본 적 없어요.”
“...너네 부모님은 대체 뭐하시는 분이냐.”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어릴 때, 아빠는 얼마 전에. 사실은 실종된 건데, 실종되고 나서 5년 동안 연락 없으면 그냥 사망한 걸로 친대요.”
“억. 그래? 어 이거 정말... 미안하다.”
“에?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지금 잠을 자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나 알려줘요. 내일 학교 가야 된단 말이에요.”
“기운을 빼서 흥분한 걸 다 소진시키면 돼.”
“아하. 그럼 야동을 보면 되는 건가요.”
“뭔 소릴 하고 있어 쪼끄만 게? 운동을 해서 기운을 빼라는 얘기지. 샌드백 치는 게 제일 좋긴 한데, 집에 없을 테니까 팔굽혀펴기라도 해. 지칠 때까지. 그럼 잠 온다.”
“알았어요. 잘 자요.”
“아 나 이 샊... 그래 잘 자라. 그리고 잠 올 때까지 콧대 손으로 잘 만져 줘. 아까 내가 체육관에서 해줬던 거 기억나지? 너는 콧대 꺾이면 손해가 클 얼굴이라 지금부터 세워놔야 돼. 아직 잘 모르겠으면 그냥 어른 말 들어.”
“알았어요. 근데 몇 살이나 더 먹었다고 어른이래? 아직 서른 살 안 됐죠?”
“어허? 어린놈이 말하는 것 좀 보소? 맞으면 낫는 병이긴 한데... 오늘은 네 마음대로 다 해봐라. 이긴 날이니까 그냥 놔둔다. 그런데 너 내일 학교 못 갈 테니까 일정은 변경해야 될 거야. 알았지?”
“어? 왜요?”
그러나 통화는 이미 끊긴 뒤. 다시 전화를 걸어도 소리샘으로 연결된다.
아니 맞고 쓰러진 애는 지극 정성으로 돌보더니만 나한테는 왜 이래?
*
“느아아아악...!”
학교에 못갈 거라는 말을 왜 했는지 아침이 되어서야 깨달은 정강준이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한다.
왜 이제 와서 머리가 아픈 거야? 그것도 뒤통수 쪽이... 맞은 적도 없는데.
오태영의 말대로 누워서 쉬어야 될 것 같긴 하지만, 결석을 하게 되면 후견인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결석했다고 쫓아와서 이것저것 털다가 복싱 하는 걸 알게 되기라도 하면... 안 되지, 안 돼. 아마 체육관에도 못 나가게 할 걸? 그나저나 앞으로 야간자습을 어떻게 째야 될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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