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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몬스터 잡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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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4.01.11 12:43
최근연재일 :
2024.03.11 18:4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287
추천수 :
0
글자수 :
122,700

작성
24.01.30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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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살인

DUMMY

신분제 사회에서 살아오는 동안 쌓여온 분노가, 스르르 바람에 날린 실오라기처럼 그림자 밖으로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실들은 허공에서 서로 엉키고 설키면서 얇은 비단 같은 천이 되더니, 아라타루아의 어깨에 살며시 얹히는 듯하다가 느닷없이 뱀처럼 온몸을 칭칭 휘감고 조이고 쥐어짰다.


왜 저놈들만 계속 무사하냐고? 네 친구들은 다 죽어나갔는데!


아라타루아는 대답 없이, 땅에 떨어져 있던 밀림도를 집어 들었다.


몸값 협상이 결렬되자 불륜남의 얼굴에서 비로소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두려움이 떠올랐다. 수풀 속에서 옷을 벗어던질 때만 해도 반 정도는 발기돼 있었던 살덩이가, 딱해 보일 지경까지 쪼그라들어 있는 것이 그제야 아라타루아의 눈에 들어왔다.


새끼. 쫄기는.


어쩐지 웃음이 나는 광경이었다. 차라리 처음에 옷을 주워 입고 덤볐더라면 그렇게 비참한 몰골이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자신이 패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울분이 다시금 아라타루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넘어갈 거야? 저게 말이 돼? 아니 애초에 남을 죽일 생각을 했으면 자기도 죽을 각오를 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각오 없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사냥꾼의 직업윤리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니야. 상관없지. 저놈은 사냥꾼이 아니니까. 저것들은 그냥... 발정 난 꼬맹이에 불과해.


잘 보니 스무 살이나 넘었을까 싶은 애들이었다. 비웃는 소리가 귓전에 얹혔다.


꼬맹이‘들’이라고?


아라타루아는 또 무심결에 물 위에 선 여자 쪽을 흘깃거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목소리는 계속 아라타루아를 부추기고 재촉했다.


저 정신 나간 살인마 새끼를 그냥 살려보내겠다고? 저게 나중에 또다시 무고한 사람한테 칼질 안 할 거라는 보장이 있어? 저놈 때문에 죄 없이 다치고 죽는 사람이 생겨나면 그건 누구 책임인데? 누가 죽인 거냐고?


그러나 아라타루아는 망설였다.


그렇다고 멋대로 사람을 죽이는 건 너무 오만한 것 같은데.


아라타루아는, 오랜 전쟁경험을 통해 재수가 없는 놈은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무기에도 찍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운명에 달린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런 경험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놈이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불륜남의 검술실력은 아라타루아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수준이 높았다. 참전경험은 없는 듯싶었지만, 애초에 실력대로 결과가 나왔더라면 지금 무장해제된 것은 아라타루아였을 터였다.


열심히 쌓은 실력이라는 거, 알고 보면 별 의미가 없는 거 아닐까.


싸울 때 평정을 잃으면 셈을 할 수 없다. 짐승처럼 본능적인 반응만 거듭하다가 결국 진흙바닥에 처박혀 썩어가게 되는 것이다. 불륜녀 앞에서 빨리, 멋지게, 해치우려던 허영심이 놈의 발목을 잡아줬다.


불륜행각이 다 끝난 뒤였더라면 도리어 아라타루아가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일 볼 거 다 보고 난 뒤, 남자가 현자가 되는 시간에 붙게 되었다면 그렇게 멍청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불륜남이 아라타루아를 꼴사납게 밀림도를 든 얼치기 정도로 얕보고 있었다면, 아라타루아는 아라타루아대로 불륜남을 그저 여자 앞에서 허세나 부리려는 애송이 정도로 깔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서로의 기량을 보려고 하지 않는 장님과 또 다른 장님이 서로를 더듬어가며 싸움을 벌인 꼴이었다. 그것도 어찌 보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울분이 아라타루아에게 물었다.


그것뿐이야? 정말로?


아라타루아의 정신이 등 뒤의 여자에게 가 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터였다. 물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을 여자가 어떻게 됐을지만이 아라타루아의 관심사였다.


저 철없는 것들이... 멍청한 욕망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는 걸 이제 깨달았을까?


아라타루아는 밀림도를 칼집에 집어넣고 손사래를 쳐보였다.


“야 됐다. 얼른 여자애 데리고 집에 가 인마. 앞으로는 조심하고.”


그 정도면 모든 것이 원만히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륜남은 미친 사람처럼 아라타루아에게 달려들었다. 부러진 칼을 거꾸로 들고 목을 겨누고 있었다.


뭐야 이 시발?


손 흔들고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나려던 아라타루아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야이 새끼야! 미쳤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맥락이었다. 아라타루아는 허둥지둥 두 팔을 내밀어 놈을 제지하는 동시에, 황급히 허리를 옆으로 기울여 목과 머리를 위험반경에서 빼냈다.


푹!


목에 칼이 꽂히는 것은 면했지만, 부러진 칼끝이 오른팔에 박히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끄으악!”


아라타루아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방심하다 맞은 칼이라 그런지 끔찍하게 아팠다.


돌이켜보면 참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칼을 맞아도 소리를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다쳐도 꾹 참고 넘기는 것이 남자답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전술적인 기도비닉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쪽이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숨겨 불리한 흐름을 막으려고 그랬던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전장에서는 그렇게들 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아라타루아는 칼을 맞았다고 비명을 지른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이... 이 개새끼가...!”


그건 어쩐지 아라타루아가 쪼그라든 남근을 보고 웃음을 지었던 데 대한 보복 같았다. 어쩌면 물 위에 남겨두고 온 여자에 대한 아라타루아의 복잡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질투를 느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통이 아라타루아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응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싸움이 다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경솔하게 적을 자극했던 것을 뉘우쳤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 아라타루아는 바로 밀림도를 뽑아들었다.


거기서 불륜남이, 마침 검상을 입어 힘이 빠지고 칼을 뽑느라 동작까지 지체된 상대를 붙들고 늘어져 드잡이를 벌였다면 아라타루아는 바로 위험에 처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불륜남은 어처구니없게도 알아서 거리를 벌려주고 뒤로 물러서 버렸다.


스스로도 놀라는 얼굴. 아마도 검술을 오래 연습해온 동안 몸에 밴 습관 때문인 것 같았다. 나무인형 또는 대련상대를 목검으로 치고 빠져나가고 다시 치고 빠져나가는 연습을 하는 동안 만들어진.


쇄액!


아라타루아는 사냥꾼이었고, 전쟁터에 끌려갔을 때에도 창잡이나 궁수로 부려졌을 뿐이었다. 평생 한 번도 검술을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아라타루아의 칼은 뭔가에 빨려 들어가듯 깨끗하게 들어갔다.


어린 시절 글을 배울 때,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손을 누나가 잡고 이끌어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팔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여주는 듯한 기분.


부러진 칼을 내저어봐야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스걱!


아라타루아의 칼끝이 놈의 목울대를 비집고 지나갔다.


댕그랑!


부러진 장검이 땅에 떨어졌다. 목에 칼을 맞은 놈은 자기 목을 양 손으로 감쌌다. 그 모습은 자신의 목을 자기가 스스로 조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커헉!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피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목이 깨끗이 잘려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목의 큰 핏줄이 잘린 모양이었다.


프슛! 프슈슉!


놀랄 만큼 많은 양의 핏줄기가 아라타루아에게까지 내뿜어졌다.


사람의 피에서는 철과 똑같은 냄새가 난다. 그건 피와 철이 오래 전에 떨어져서 키워진 형제여서 그런 거라는 이야기를 해준 고참병이 기억났다. 얼굴이 유달리 희고 잘생긴 사람이었다.


아 맞아, 그 사람. 창칼은 용케 피했지만 폐병에 걸려 죽었었지.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그렇게 피와 철은 서로를 부르고 탐하다가 결국에는 하나가 된다. 철을 벼려 만든 칼이 인간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순간이 그랬다.


피를 다 뿜어낸 불륜남은 앞으로 퍽 엎어지더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칼질을 한 아라타루아도 그 피를 밟고 미끄러져 중심을 잃었다.


퍽석!


한쪽 무릎으로 땅을 되게 찧으며 비틀거리다가 아예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일어설 기운이 없었다.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사람을 죽인 것이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전쟁터에서의 살상경험은 나름 풍부한 편이었지만,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칼질을 하다가 사람을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죽어가는 놈에게서 피가 그렇게까지 많이 뿜어져 나왔던 적도 없었고, 그 피를 그렇게까지 많이 뒤집어써본 적도 없었다.


갑옷을 안 입어서 이런 건가?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죽는다고? 풀 치는 칼에?


하지만 놈의 칼이 부러져 있지 않았더라면 죽어 넘어진 것은 아라타루아였을 것이었다. 오싹했다. 부러진 칼에 찔린 오른팔이 그 증거였다.


뭐지? 칼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왼팔 뿐인 건가?


참담하고 아찔했다. 아라타루아는 생전 처음 만나 말 한 마디 나눠보지 않은 사람을 죽님 덕니넊다. 주저앉은 그대로 숨을 고르던 아라타루아는 그것이 자신의 첫 살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인과 전쟁은 엄연히 달랐다. 전쟁에는 죄책을 분산시켜줄 아군들과 명분이 있었지만, 살인은 아니었다.


꼭 세상천지에 혼자 남겨진 느낌.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대로 도망을 쳐야 할지 아니면 목격자를 잡아 없애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죽여 없애야 되는 거 아닐까?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반항하면?


도망치면 어쩌지? 그러다 감시인들이라도 불러들이게 되면 어떻게 하냐고? 그놈들 전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어?


어질어질해졌다.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한 것처럼 무엇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라타루아는 몸을 씻어야 한다는 생각은 해냈다. 그렇게 피칠갑을 한 채로 돌아다니게 되면 어딜 가든지 당장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이 분명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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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또 만났네요 24.03.01 6 0 11쪽
18 사소한 시비 24.02.29 7 0 11쪽
17 주점에서 24.02.28 7 0 11쪽
16 약기운 24.02.27 6 0 11쪽
15 먹으라고 24.02.06 9 0 10쪽
14 메힐리나 24.02.03 12 0 10쪽
13 약값 내라 24.02.02 8 0 10쪽
12 이상하게 서운하네 24.02.01 9 0 11쪽
11 식빵과 솥 24.01.31 11 0 10쪽
» 살인 24.01.30 13 0 11쪽
9 베테랑 24.01.27 13 0 11쪽
8 내 눈 24.01.26 12 0 11쪽
7 만남 24.01.25 13 0 12쪽
6 추격자 24.01.24 16 0 11쪽
5 불의 깃 24.01.23 17 0 11쪽
4 호기심 때문에 24.01.12 16 0 11쪽
3 뿔과 진흙의 시간 24.01.12 16 0 10쪽
2 하늘의 별을 따오라 그래 24.01.12 27 0 11쪽
1 피가 멎는다 24.01.11 45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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