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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완강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2.12.17 18:32
최근연재일 :
2022.12.21 22:23
연재수 :
3 회
조회수 :
99
추천수 :
2
글자수 :
12,221

작성
22.12.21 22:23
조회
28
추천
1
글자
10쪽

봄이 오면

DUMMY

“어때. 전화 못 끊겠지?”

“...윤정이? 누구 말하는 건데?”


석영이 차!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연오의 귀를 타고 들어와 채찍처럼 뇌를 후려쳤다.


“아이고, 작가님. 모르는 분이셨어요?”


연오는 이를 악물었다. 내심을 들킨 것이 분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가 모른다고 하니까, 내가 알려줄게. 우리학교 최초 미인대회 수상자. 잘난 작가님보다 한참 먼저 미디어에 얼굴 내비쳤던 우리 동기. 왜? 계속 기억 안 난다고 해보게?”

“...걔가 왜 너랑 같이 있는데? 너 대학에서 강의한다고 안 했어?”


석영은 대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하며 빈정거렸다.


“네가 원래 유명하긴 했지. 글 잘 쓴다고. 교수님들도 너 눈독들이고 있었고. 대학원 들어오라고 그렇게들... 그런데 그렇게 큰 상 타고 그 생활 계속 해가면서 은사님들한테 인사도 안 오냐?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래?”

“뭐하러? 해준 게 없는 사람들인데. 나 그 사람들 도움 안 받고 혼자 힘으로 해왔어. 글 쓰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잖아. 실력도 별로였고.”

“야.”


흥분이 가라앉은 듯 석영의 목소리도 차게 식어갔다.


“누가 네 사정 모르는 놈 있었냐? 고등학교 때 전국대회서 상 타놓고도 시상 일정 늦어지는 바람에 수시 못 쓰고 대강 수능 봐서 정시로 학교 들어왔던 거. 아무리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니지. 아무리 지방대라서 마뜩찮았다고 해도...”


이번에는 연오가 석영의 말을 잘랐다.


“아 왜 그따위 식으로 얘기를 몰고 가!? 지방대라 마뜩찮았던 게 아니고! 글 쓰는 데 전혀 도움 안 되면서 되는 척하는 학교였으니까 그랬던 거지! 처음에는 입학사기 당한 기분이었다고! 너도 옛날에 그 소리 했었던 적 있잖아!”


연오가 화가 단단히 나서 쏴붙이자 석영도 데시벨을 올렸다.


“안하무인인 건 여전하네? 아니 예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야. 교수들 동기들 선배 후배 다 네 밑으로 보이지? 아니 그럴 거였으면 그냥 재수해서 그 잘난 문학특기생으로 명문대 문창과 갔으면 됐잖아? 재수 안 한 건 네가 선택한 거 아니었어? 그러면 이게 네 모교고 이게 네 동문들인 거야. 네 현실이라고! 그리고 도와주려고 전화한 동기한테 이렇게 해대는 게 어디 있냐? 등단한 게 뭐 벼슬이야?”


다시 고함이 터졌다.


“아 미치겠네 시발 진짜! 너 지금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거잖아 나를!”

“그게 아니고! 말할 기회를 준다는 거잖아. 어느 쪽이 자리를 만들든 뭐가 어때서? 할 말만 하면 되지!”

“문장도 아니고 문단 단위로 표절해서 먹고 살던 년이랑, 그년 싸고돌던 것들이 다 너랑 같은 당에 투표하는 애들이었어도 지금 네가 이랬을 거 같냐? 그거 정치 이벤트잖아 새끼야. 내 얼굴 맨 앞에다 걸어놓고 그쪽 인간들 다 싸잡아서 개망신 주려는 거 아니냐고? 왜? 내가 아군 등짝에다 대고 총질하니까 속 시원했냐? 전향자 확인서라도 한 장 써줘?”


내심을 들킨 석영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알았다. 네가 아직도 그 입진보 위선자새끼들한테 미련 있는 줄은 몰랐네.”

“멋대로 떠들고 다녀. 그런데 함정 파놓고 도와주는 척 생색은 내지 마라.”


말없이 시간이 흘렀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어느 쪽도 먼저 전화를 끊지 못하는, 교착상태였다.


연오는 답답하고 초조해졌다. 전화를 끊지 못하고 있는 이유. 원서만 냈으면 떠날 수 있었던 학교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를 석영이 모를 리 없어서였다.


한숨만 쉬던 석영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윤정이... 지금 대학원 다녀.”


연오는 황당해서 말을 더듬었다.


“뭔 소리야 그게? 이제 와서 대학원?”

“나도 자세하게는 모르는데, 그때 그놈의 미인대회 나갔다가 상 타고 나서 이상한 놈들이 바람 넣는 바람에... 연예인 한다고 시간이랑 돈만 날렸던 건 알지? 그러다가 졸업 늦어졌던 것까지는 너도 알 거고. 그 뒤에도 인생이 순탄하지는 않았다는 것 같더라고.”

“아니 잠깐만. 졸업하고 좋은 데 취업했던 거 아니었어?”

“아니, 아니야. 나도 잘못 알고 있었어.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지 싶었는데... 거기 오래 못 다니고 그만뒀었대. 직장생활하고는 좀 인연이 없었던가 봐. 여러 번 그만두고 나왔다던데.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까지는 말 안 하니까 나도 모르지만... 주변에서 가만 놔뒀겠냐 그런 애를?”

“아니 그래도 그게 말이 되냐고? 이 나이에.”

“걔 원래 문학 쪽에 관심 많았잖아. 그래서 너랑도 엮였던 거고. 그거 아니었으면 너는 시발롬아 걔한테 평생 말 한 마디도 못 걸어보고 죽었을 걸? 팍팍하게 살다 보면 공부가 그리워질 수도 있지 뭐. 그런데 학부생 때야 퀸이었지만, 지금은 이 나이 먹고 대학원생이야. 대학원생은 여기서 사람 취급 못 받는다고. 바로 엊그제에도, 걔 지도교수가 사석에서 술 처먹고 취해가지고 걔를 언제 한 번 자빠뜨려버리겠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개소리 지껄인 적 있었어.”

“아니 그런 새끼를 그냥 놔둬?”

“넌 이 바닥을 잘 몰라. 나도 너 같은 성질머리였으면 사람 여럿 죽였을 걸? 그런데 난들 어쩌겠냐고? 들어와 놓고 보니까 애비 교수직이 자식새끼한테 세습되는 똥통이었던 걸. 어쨌든 그 소리가 걔 귀에도 들어가면 이것도 그만두지 않겠나 싶어. 윤정이 다음 학기에는 여기 없을 지도 몰라. 모르지, 어쩌면 너는 네 남은 인생 다 걸고 표절작가 까는 인터뷰를 한 건지 모르지만, 나는 그 기사 보면서 뭐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가지고... 궁금하면 한 번 와서 확인해보면 되잖아. 내년에 벚꽃 필 때쯤. 그래 그때까지는 걔도 학교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연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벚꽃 피는 교정에서 재회? 내 인생에도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생긴다는 건가.


“강연이 싫으면 하지 마라. 어쩔 수 없지. 교수님들한테는 내가 잘 얘기해놓을 테니까. 그리고 교수들이 괜히 귀찮게 연락 못 하게 해줄게. 아니, 못 하게 해볼게. 그런데 연오야. 만약에, 그래 진짜 만약이지만 윤정이가 너한테 전화할지도 모르니까. 너도 그 동안 하고 싶은 얘기 있었으면 그냥 전화 받아. 그때는 오늘 나한테 한 것처럼은 하지 마라.”

“...그래.”


둘은 한동안 또 말이 없었다. 석영이 다시 말을 걸 때까지. 예전과 비슷한 패턴의 대화였다.


“...그리고 네 책. 나도 있어.”

“뭐야. 어떻게 구했냐? 표절사건 터지고 나서 절판시켰는데?”

“우연히. 그래, 우연히. 절판되기 전에 내 돈 주고 사게 되더라고. 등단이 빠른 것도 아니고 베스트셀러도 아니었고 평단 평도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끌려가지고.”

“그런데 그때 책 내고 나서 보니까, 원래 내가 쓰려던 책이 아닌 것 같더라. 편집하다가 많이 잘려 가지고... 제목도 바뀌었고. 출판사랑 안 맞으면 그렇게 된다던데. 그런 걸 뭐하러 돈 주고 사?”

“야 인마. 나도 너랑 동종업계 종사자야. 너만큼 글을 쓰지는 못했지만. 네 책 있잖아? 그... 책표지에 올라가 있던 그 문장. 거기에 되게 이상하게 꽂혀 가지고... 아니다, 이제 와서 이런 소리 해봐야 뭐. 내년 봄? 그래 봄에는 다시 볼 날 있으려나 모르겠네. 언제 학교 오게 되면 사인이나 해주라. 어제 확인해 보니까 초판1쇄더만.”

“...그러든지.”

“야 그리고...”


연오는 거기까지만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석영이 기억하고 있기를 바랐다. 그런 식으로 전화를 끊는 건 대학시절 그들이 자주했던 장난이었다.


예상대로 전화가 아니라 문자가 왔다.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야이 미친 새끼야. 그 짓거리를 그 나이 처먹을 때까지 하고 앉았냐? 너도 진짜 답 없는 병신이다.’


답 없는 병신,


이라는 말이 아예 틀린 말이 아니어서 연오는 낄낄대고 웃었다.


왜? 어디 살고 있는지는 안 물어봐? 어떻게 사는지, 돈은 얼마나 남았는지... 안 궁금했냐? 등단하고 나서 10년 내내 무명이었던 작가가 어떤 몰골로 살아가고 있을지.


연오는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뭐 먹고 살만 한 줄 아나 봐? 새끼. 아무것도 모르면서.


문득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영상을 찍어서 그놈에게 보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거실 책상으로 돌아와 SF소설 파일 창을 닫았다. 도저히 뭔가를 더 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SF는 못 쓰겠어. 콘티 짜놓은 게 아깝네.


문득 작가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 작업실과 집을 겸하고 있는 그곳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작가 혼자 살기에까지 좁아터진 집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장판 이곳저곳이 울어 있었고, 보일러가 낡아 난방효율도 좋지 않았다. 집 안까지 빗방울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옥상 방수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지 천장에는 얼룩이 남아있었다. 수도관 틈새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처참한 풍경이었다. 물론, 전쟁이 터져 모든 집과 삶이 다 무너져 내린 전쟁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었으나.


또 모르지. 나중에 성공하게 되면... 그렇게 성공한 작가도 예전에는 이런 곳에서 살았다는 걸 보고 장래희망 바꿔먹고 정신 차리는 놈들이 생길지? 그러면 나도 죽어서 천당 가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 지경이 되어서도 엉뚱한 생각을 하는, 그 풍부한 상상력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망가진 것 같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동영상 촬영에 몰입하기 시작한 작가는 외투도 입지 않은 채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 역시 전에 없던 일이었다.


복도 난간 너머에는 파란 하늘과 찬란한 시골풍경...


이 있는 게 아니라, 흉하게 깎여나가 맨살이 드러난 산과 절벽이 보였다. 산줄기가 잘려 산자락이 푹 꺼져있던 그 자리에서부터 작가가 사는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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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면 22.12.21 28 1 10쪽
2 천재작가의 아파트 22.12.20 31 1 11쪽
1 과학자와 문명 22.12.19 40 0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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