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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전리품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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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2.12.04 11:42
최근연재일 :
2022.12.13 22:21
연재수 :
5 회
조회수 :
202
추천수 :
1
글자수 :
24,606

작성
22.12.08 21:47
조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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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부러진 다리

DUMMY

*


고돈의 일기


범의 해 아미사다의 달 초사흘 날씨 흐림


경력직 기병의 전투감각을 되살리겠다며 의기양양하게 친구아저씨들하고 사냥 나갔던 아빠가 들것에 실려 돌아왔음. 말에서 떨어져 말발굽에 밟히는 바람에 왼다리 뼈가 박살났던 거임.

놀란 엄마가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음. 낙마사고는 평생 한 번도 없었다면서 손을 벌벌 떨었음. 엄마가 엉덩방아 찧는 모습을 본 건 오늘이 생애 처음이었던 듯.


*


“멧돼지를 쫓고 있었는데, 이게 우리 몰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에... 추적하던 중에는 개천가에서 손발이 또 안 맞아 가지고... 멧돼지는 화살 안 닿는 데까지 도망가 버렸고요, 잠깐 쉬는 동안에 말이 놀라서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이렇게 됐습니다.”

“그럼 얼굴 깨진 건요? 어떻게 된 거예요?”

“개천가 자갈밭에 떨어져 구르는 바람에... 그래도 머리부터 떨어지지는 않더라고요.”

“휴우... 그나마 돌이 뾰족한 데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네요.”

“예. 낙법은 잘 쳤는데, 말밑에 깔려서 발굽에 밟히는 바람에...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수씨.”

“아니 그런데 말이 갑자기 왜?”

“저도 모르겠어요, 제수씨. 뭐 이상한 걸 보고 놀랐던 모양이죠.”


고진과 함께 사냥을 나갔던 친구들은 다들 침통한 얼굴로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아니야... 밤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고돈이 작게 중얼거렸다. 꼭 그 말을 들은 것처럼 인현이 고돈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로 훑었다.


“제수씨. 말이라는 게 원래 워낙 예민한 동물이다 보니 종종 이런 일이 생깁니다.”

“의원은 뭐라고 해요?”


호신이 대답했다.


“운이 좋았다고 하더군요.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앉은뱅이가 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이제 전쟁 나가는 건 고사하고 다시 예전처럼 걷고 뛸 수 있게 될지도 확실치 않다고 했어요. 그리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돼도 다리를 절게 될 것 같다고.”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끝내 산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수곤이 고돈에게 손짓을 해 비틀거리는 산윤을 부축하게 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고돈은, 어떤 보이지 않는 괴물이 몸속에 파고들어 자기 심장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듯한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앞으로의 일들...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나 몸져누운 고진은 말이 없었다.


*


범의 해 아미사다의 달 초나흘 날씨 비


이장님이 집에 오셨음.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니라, 설령 누가 죽었다고 해도 이 마을에서는 10기가 동원되어야 함. 그게 이 나라의 법임.

그런데 아빠가 다쳐서 누워있기 때문에 지금 출전이 가능한 기병은 아빠 친구들 8기 밖에 안 됨. 이장님은 안 그래도 기병이 한 기 부족했기 때문에 용병을 알아보고 있었다고 함. 알아보는 김에 하나 더 알아보면 되니까 안심하라고는 했지만...

기병 구하기가 그렇게 쉬웠으면 애초에 나라에서 강제로 징발할 리도 없지 않았을까.


*


범의 해 아미사다의 달 초닷새 날씨 흐림


인현 아저씨가 왔다갔음. 누워 있던 아빠한테 밤이를 자기한테 팔고, 그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면 징발인원을 맞출 수 있지 않겠냐는 얘기를 했음.

아니 시발 그게 말이 됨?


*


“아니 그건 운전을 잘못한 아빠 잘못인데! 죄 없는 밤이를 왜 팔아요? 저렇게 순하고 착한 애를?”


하루 종일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고진이 끙,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뭐라고 이놈 자식아?”

“안 돼! 절대 안 돼!”

“저놈 자식이! 존나 열심히 키워놨더니 못하는 소리가 없어?”

“만약에 밤이를 내다팔면! 나도 저수지에 들어가서 칵 죽어버릴 거야! 어디 팔려면 팔아보든지!”

“이게?! 너 아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엄마 산윤이 달려 나오자 고돈은 냉큼 공격을 피해 달아났다. 체구에 걸맞지 않은 날렵한 동작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가출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도망가 있을 곳은 마구간뿐이었다.


“씨이... 그냥 밤이 데리고 멀리 도망가 버릴까보다...”


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고돈은 말을 걸었다.


“야. 너는 왜 갑자기 사고를 쳐 가지고 일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그래?”


말의 눈은 그 이름처럼 까맣고 맑았다. 고돈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긴 한숨을 내쉰 고돈은 솔을 들고 일없이 말 털을 빗겨주기 시작했다.


검은 비단결 같던 털이 많이 헝클어져 있었다. 말을 스쳐지나간 바람과 햇볕이 남긴 흔적들이, 소년에 의해 가지런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 엉덩이 뒤쪽,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한 자리의 털이 동그랗게 빠져 있었다. 못 보던 것이었다.


“어? 뭐야 이건?”


왜 털이 빠졌지? 어디 보자...


고돈이 더 자세히 살펴보려 손과 눈을 갖다대자 말은 갑자기 흥분해 푸릅, 푹! 거친 숨을 내뿜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뒷다리로 걷어찰 것처럼 들썩거렸다.


워워, 하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뭐냐고 이거?


*


범의 해 아미사다의 달 초엿새 날씨 갬


원래 기병 전마들은 수컷을 쓸 수 없게 돼 있음. 말이라는 짐승이 워낙 성깔이 더럽다 보니 어쩔 수 없음. 가만 놔둬도 지들끼리 서열싸움을 벌이거나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잦아서, 거세를 해야 길을 들여 전쟁에 쓸 수 있게 되는 거임.

그렇지만 아주 희귀하게, 사람을 좋아하고 성질이 얌전해서 거세를 안 시켜도 전마로 쓸 수 있는 말이 있기는 함. 우리 집 밤이 같은 애가 그런 경우임. 아빠 말로는 어릴 때부터 강아지들이랑 같이 키워서 그렇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겠음.

하여간 어제부터 뭐가 좀 이상하긴 했음. 사람 좋아하고 얌전하기만 한 밤이가 날뛰어서 아빠를 낙마시켰다는 게 영...

밤이 엉덩이에 털 빠진 자리가 하나 생겨 있음. 동그란 구멍임. 어디서 다친 거지? 흥분하지 않게 살살 달래 가면서 보니까 상처가 나거나 피가 흐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 이거 대체 뭐냐고?


*


침상에 누워있던 고진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병문안을 온 계문과 수곤이 손사래를 쳤다.


“야. 일어나지 마. 다친 사람이 왜 그래?”

“이장님 누운 채로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니야. 사냥 나가자고 한 우리가 죄인이지. 몸은 좀 어떤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 어제 현이가 와서 말을 팔라고 했다면서? 그 돈으로 용병을 사라고도 했고.”

“예. 이장님.”

“허허...”


이장 계문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고진과 수곤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결원이 생기면 안 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용병을 하나 구해야 했는데 저까지 이렇게 돼 버리니... 기병임무를 소화할 수 있는 용병 구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요.”

“그렇긴 하지. 마음 같아서는, 이번에 내가 자네 말을 빌려서 대신 가고 싶을 정도야.”

“예? 아이고 그건 좀...”

“자네 말이 맞아. 그건 어려울 것 같네. 어제 사냥을 나갔다가 자네는 다리를 다쳤지만, 나는 은퇴를 결심하게 됐으니까 말이야. 나도 늙어버렸어. 이제 옛날 같이는 도저히 못 하겠더군. 고작 멧돼지 한 마리 모는 것도 어려우니 원...”


수곤이 미간을 찌푸리고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도 말은 팔지 말고, 좀 기다려 봐. 그렇게 정성 들여서 길렀는데 아깝잖아. 인현이 그놈이 말 값이나 제대로 주겠어? 후려치려고 들겠지. 사실 나도 그동안 말 관리를 잘 못해서, 급하면 종종 수레도 끌게 하고 그랬었는데, 그놈은 아예 말을 잘 먹이지도 않고 농사일까지 다 시켜먹었어. 어제 봤지? 그놈 말 금방 퍼져버리던 거. 자기 말이 시원찮으니까 네 말 사겠다고 한 걸 거야.”

“전마 먹이는 게 어디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던가. 나도 어제 사냥 나가서 알게 됐지만, 자네 말만 쌩쌩하더군. 그냥 확 치고 나가던데?”

“얘네는 12년 동안 계속 잘 먹였어요, 이장님. 언제 보니까 콩까지 구해다 먹이더만. 제수씨가 고생 많았죠.”

“글쎄... 인현이 그 친구가 뭐라고 하든 간에, 용병을 자네 돈으로 고용하게 하지는 않을 걸세. 훈련 겸해서 같이 사냥 났다가 생긴 사고인 만큼, 같이 비용을 분담하는 게 맞다고 봐. 돈이 한두 푼 드는 일도 아니고.”

“아... 고맙습니다, 이장님.”

“아니야. 그런 말 말게. 우리 모두 사고를 당할 수 있었으니까. 혹시 자네 말고 내 다리가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용병도 이리저리 수소문해보고 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몸조리나 잘해.”

“고맙다. 그렇지만 이장님, 기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은가 싶은데요.”

“그야 그렇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동원령 전에 용병을 구한다고 해도 전마가 필요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네. 용병한테 자네 말을 빌려주는 대신, 임금을 깎는 방법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고.”

“그렇지만... 현이 그놈 말로는 용병한테 말을 빌려줬다가 그걸 타고 도망가 버리면 어떡할 거냐고 하던데요. 자기한테 싸게 파는 게 나을 거라고...“

“후우...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가 감시를 하긴 하겠지만 그것도 살아있을 때 얘기니까.”

“그런데 자네 아들은 어디 가 있는 건가? 안 보이네? 대장간에 교육이라도 받으러 갔어?”

“아 그게... 실은 지금 방에 틀어박혀서 단식 중입니다.”

“뭐라고? 돈이 그놈이 단식을 해? 이런 닝기리! 이번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하려는 건가.”

“어허... 그래서야. 장비 정비하는 거 다 배워놓으려면 시간이 부족할 텐데?”

“아니 그게 아니고... 말을 팔면 죽어버리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중이에요.”


계문과 수곤이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이놈 자식이 일이 이렇게 됐는데 개념 없이...! 내가 대신 잡아다가 혼 좀 내줄까?”


분개하는 수곤을, 계문이 손사래를 쳐 제지했다.


“자네 엊그제 했던 얘기 기억나나? 돈이가 아직 애라고 했던 거.”

“예 기억하죠. 보세요 이장님. 이거 완전히 철부지 어린애잖아요.”

“그럴까...? 자네 말이 틀렸던 건 아니고?”

“예? 그게 무슨?”


계문이 고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12년 전, 전쟁터 끌려가기 직전에 자네 상황이 어땠는지 기억하고 있나?”

“예. 기억합니다.”

“그때 자네한테는 제수씨와 다섯 살짜리 애가 세상 전부였지. 그렇지?”

“예. 그랬죠.”

“그럼 자네 아들을 잘 보게. 그때의 자네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계문이 허허,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돈이 저 녀석한테도 지키고 싶은 게 생긴 걸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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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자가 되어라 22.12.05 39 0 13쪽
1 은퇴금지 22.12.04 76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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