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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전리품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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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2.12.04 11:42
최근연재일 :
2022.12.13 22:21
연재수 :
5 회
조회수 :
201
추천수 :
1
글자수 :
24,606

작성
22.12.04 21:41
조회
75
추천
1
글자
10쪽

은퇴금지

DUMMY

고돈의 일기


범의 해 아미사다의 달 초하루 날씨 더러움


오늘 왕명 떨어짐. 문관 무관을 불문하고 현직 관료들의 은퇴를 전면 금지한다고 함. 시발 세상 족 같음.


*


“진짜요? 음... 그런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래? 어차피 우리 집안에는 벼슬하는 사람도 없잖아.”


수험생 아들에게 새 소식을 전해준 아버지 고진이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왜 너랑 상관이 없어? 올해 은퇴하고 나갈 사람들이 버티고 안 나가면 내년에 신입 뽑는 시험이 있겠냐?”

“어? 그런데 내년 시험은 벌써 공고 다 난 거라서.”

“그럼 시험이 취소되겠지. 두고 봐라 어디. 신입 뽑는 문관시험 무관시험 다 전면 취소될 테니까.”

“어어? 그럼 난 어떡해? 아니 왜 신입을 안 뽑아? 미쳤네 이것들 진짜?”


고돈이 당장 책상머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들의 불경한 언사에 고진은 아연실색.


“이놈의 새끼가 진짜! 너 입조심 안 해? 집안 기둥뿌리 다 뽑히는 꼴 보고 싶어!?”

“아! 아야야...! 아 듣는 사람도 없는데 뭐가 어때서?”

“야이 새끼야. 애비가 죽을 고생 해가지고 이만큼 벌어놨으면 안 날려 먹게 조심조심해가면서 신분상승할 궁리를 해야지! 내가 늘 얘기하잖아. 이장님 댁 곤이 좀 보고 배우라고! 너 나중에 시험 합격한 뒤에도 그딴 소리 지껄이다가 걸릴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지 몰라? ”

“에이 씨... 그나저나 이제 어떡하지...?”

“뭘 어떡해 인마? 어차피 내년 시험은 물 건너갔으니까, 공부는 관두고 친구들이랑 놀러나 다녀. 잘 됐지 무... 악! 끄악!”

“야 인간아! 그게 수험생 아들한테 할 소리야? 집안 망하라고 고사 지내냐?”

“아이 진짜! 아프다고오! 당신도 눈깔이 있으면 쟤 공부하는 꼬락서니를 좀 봐아! 저게 어디 첫 시험에 답삭 붙을 것 같은 모양새냐고? 애가 책상머리에 진득하게 앉아있는 법이 없잖어! 어린놈이 벌써 사방팔방 미친 소 새끼마냥 돌아다니려고나 하고! 지금도 말귀 못 알아듣고 뻘소리나 하고! 지 엄마 닮아가지고 머리 나쁜 거 하며... 아옥! 아 아 아! 잠깐 잠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들에게 오늘 아버지가 개같이 쳐맞겠구나 하는 예감이 찾아오던 순간,


쿵쾅쿵!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 누구요?”

“진아! 우리 왔어. 문 열어.”


열린 문밖에는 마을주민 여덟이 서 있었다. 고진의 친구들과 마을 이장이었다. 어릴 적부터 내내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아와 서로의 사정을 제집처럼 잘 아는 사이였다.


“이장님 오셨어요?”

“소식 들었지?”

“...예.”


장정 여덟이 꾸역꾸역 들어와 아무데나 자리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는다. 평소와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딱히 침울하거나 화가 난 표정은 아닌데, 다들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뭔가 이상해.


익히 얼굴을 알고 지내온 아버지친구들인데도 어쩐지 평소처럼 반갑게 인사하고 말을 붙이기가 어렵다. 겨우 눈인사만 건네고 앉았던 고돈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묻는다.


“아빠. 오늘 약속 있었어?”

“...아니.”


아니 약속을 안 했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찾아올 수가 있나?


“임자. 가서 술상 좀 내오지.”


깜짝 놀란 고돈이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벌건 대낮에 주안상을 봐오라는 엽기적인 발상을 해내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마한테 개 털리고 있었으면서!


그러나 정말 놀랄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엄마가 그냥 말없이 상을 차리러 부엌에 들어갔던 것.


오 이건 또 뭐야? 아니 세상 천지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고돈은 집에 들어온 아빠친구들의 표정을 읽으려 해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


뭔가를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기색이 느껴지다가, 이내 착잡해 하는 동시에 후련해 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 되곤 했다. 하여간 고돈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표정들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의 얼굴이 하나같다는 것뿐이었다. 다들 복잡한 심사에 빠져있다는 건 분명했다.


고진의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인현이 물었다. 유독 피부가 깨끗해 귀티가 나는 얼굴이었지만, 귀족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친구들과 같았다.


“올해는 농사 지어봤자 아무 소용없겠네? 그때도 은퇴금지령 나온 다음에 양곡징발령 떨어졌었지?”

“아니야. 이번에는 너무 일러.”


체구는 작지만 눈이 날카로운 수곤이 대답했다. 고진의 오랜 친구. 고돈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수곤이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와중에도 고돈을 향해 쓱 웃어 보인 천모가 수곤의 말을 이었다.


“그렇지. 그때도 은퇴금지령 뜨고 금방이긴 했는데, 그때는 추수가 다 끝난 뒤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미사다의 달이잖아. 두 달? 정도나 빠른 거지.”


기홍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이장님. 이게 이렇게 일찍 뜬 적이 있었어요?”


십여 년 전 낙향한 장수생 기홍은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한편, 고돈의 공부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진 계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눈가에 깊은 주름이 그어졌다.


“아니. 처음 있는 일이야.”


술상이 나왔다. 다들 고맙다는 말도 없이, 저마다 잔을 기울이고 안주를 씹었다.


빠악!


“끄으으으...!”


눈치를 보다가 슬쩍 자리에 끼려던 고돈이 등짝에 강력한 일격을 얻어맞고 신음했다.


“어디 다 크지도 않은 게 아빠친구들 자리에 끼려고 해?”


가장 몸집이 큰 섬우가 사람 좋게 웃었다.


“놔둬요 제수씨. 곰이도 이제 다 컸지 뭐. 생일만 지나면 어른인데.”


섬우가 고돈을 곰이란 별명으로 부르자, 이장 다음으로 연장자인 호신이 픽 웃으며 나섰다.


“아직은 애야. 어림없어.”


호신의 말에 우란이 손사래를 쳤다. 활시위를 오래 당겨온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두꺼웠다.


“곰이도 많이 컸죠. 이제 한 사람 몫 할 때 됐지 뭐.”


모든 방문자들의 시선이 한 순간 고돈에게 집중되었다. 그저 그뿐 아무 일이 없었는데도 고돈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호신 수곤 기홍 천모는 아직 고돈이 애라고 했고, 섬우 우란 인현 계문 은 고돈이 이제 다 컸다고 했다.


고돈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아니 그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얘기하지?


4대4로 의견이 갈린 가운데, 장정들의 시선은 집주인 고진에게로 쏠렸다. 긴 한숨을 내쉰 고진이 말했다.


“...낚시나 하러 가자.”


낮술에 낚시까지? 이건 뭐 이혼 각이잖아? 설마. 엄마 말고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건가? 몰래 두 집 살림하다가 이제 여기는 정리하고 다른 집으로 토끼려는 거?


고진은 냉큼 낚싯대를 챙겨 휑하니 대문을 나섰다. 방문자들도 집주인 뒤를 따라 일어섰다.


혼란스러워진 아들은 평소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기홍을 붙들고 물었다.


“선생님, 이게 다 무슨 일이죠?”


낙향하기 전의 일들은 잘 모르는 기홍이 머쓱한 얼굴이 되자, 수곤이 대신 대답했다.


“12년 전이랑 똑같이 가고 있다는 거야. 그때도 은퇴금지령이 제일 먼저 떨어졌었고, 양곡징발령으로 곡식 싹 다 긁어간 다음에 전시동원령 발동시켰었거든.”

“전시동원령이요?”


수곤이 픽 웃었다.


“그래. 전쟁 터질 각이라고 인마.”


고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곤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어버린 고돈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눈짓을 했다.


봐. 내 말 맞지? 아직 애잖아.


라고 말하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장 계문이 고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마라. 범의 해에는, 재앙신의 힘이 약해지고 무운이 상승한다 하여 군사들을 움직이기에 가장 좋다고 하더구나. 아마 조정에서도 이걸 알고 오래 전부터 준비를 했을 게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고돈의 눈은 초점이 흐렸고 손은 떨렸다. 천모도 고돈을 달래려 나섰다.


“너희 집 가산이 다 그 전쟁 통에 번 돈으로 들인 건데 뭘? 우리 집도 사정 비슷하고. 전쟁이란 게 원래 잘만 굴러가 주면 그렇게 큰돈도 벌 수 있는 거니까. 걱정마라. 그때처럼만 잘 되면...”

“잘, 안 되면요?”


불길한 소리에 그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고돈에게 떨어졌다.


천모는 고돈의 뺨과 목덜미를 커다란 두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천모의 눈과 고돈의 눈이 서로 닿을 듯 마주쳤다.


많이 큰 것 같았는데. 손으로 감싸고 보니 아직 앙상하고 마른 느낌이 남아있었다.


“곰아. 사람 죽고 사는 건 다 하늘에 달려 있단다.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된다면 이 세상에 전쟁이라는 게 왜 일어나겠니?”

썰물처럼 마당이 빈 뒤, 고돈은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폈다. 하지만 도통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돌아앉아있으면서도 그 심사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엄마가


“...가서 말 털이나 빗어주든지.”


라고 말했다. 평소 같았다면 수험생한테 그런 거 시키는 집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느냐고 들이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엄마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고돈은 말없이 일어나 마구간으로 갔다.


12년 전, 범의 해에 벌어졌다는 전쟁에 대한 기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고돈은 너무 어렸으니까.


그렇지만 이야기를 듣기로는, 그때 아버지는 적의 전마 세 필을 탈취해 끌고 돌아왔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집에 남은 전마는 단 한 필뿐이었지만, 말의 몸은 언제든 전장을 달릴 수 있다는 듯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돈은 솔을 집어 들고 전마의 몸을 빗겨주기 시작했다. 밤처럼 검은 털빛을 가져 ‘밤’이라는 이름이 붙은 말이었다.


전마의 근육은 여전히 단단했고, 한 점 흠도 없는 털에는 윤기가 흘렀다.


하지만 솔질은 건성이었다. 이미 소년의 마음은, 마구간 옆 창고에 보관된 갑옷과 창검을 향해 온통 기울어져 있었다. 그즈음의 사내아이들이 다 그러하듯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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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러진 다리 22.12.08 29 0 11쪽
2 종자가 되어라 22.12.05 39 0 13쪽
» 은퇴금지 22.12.04 76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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