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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두 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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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2.12.02 16:49
최근연재일 :
2022.12.27 21:28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1,496
추천수 :
26
글자수 :
136,013

작성
22.12.03 16:57
조회
71
추천
2
글자
10쪽

실험이 성공

DUMMY

“이거 봐 엄마. 분명히... 즐기고 있는 얼굴이야. 확실해.”


혈육이기 때문일까.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정투호에게는 여실히 느껴진다. 세상에는 논리와는 상관없이 직관으로 알게 되는 영역의 지식도 있다.


사진 속의 표정이 어쩐지 낯익다. 소년이 즐거워할 때의 얼굴을 꼭 닮아서다.


책을 덮고 자리에 누워있던 정투호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번개처럼 뇌리를 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고 죽이는, 총격과 폭발로 가득한 생지옥에서 아버지가 매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비결을 알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소년의 아버지는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던져놓고 먼 길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왜? 왜 아버지는 내게 레드셀을 남긴 것일까.


의문을 곱씹는 동안 시간이 훅 지나간다. 밤이 깊어진다.


*


사진에 나온 아프리카 마을이었다.


행군하고 있던 정부군의 세시 방향에서 사막위장복을 입은 남자가 모래를 헤치며 땅에서 솟아났다. 남자가 가진 장비라고는 소총과 실탄뿐. 방탄조끼도 헬멧도 착용하지 않았지만 그대로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연사된 탄환들이 적도의 공기를 찢으며 날았다.


총성이 울리자 매복하고 있던 다른 전투원들이 마술처럼 속속 나타나 정부군에게 연사를 퍼부었다. 허리가 잘린 정부군은 속수무책으로 피격당해 쓰러지고 죽어갔다.


교전은 레지스탕스들의 승리로 끝났다. 최초의 남자가 군용 해골마스크를 내리고 얼굴을 드러냈다. 이를 희게 드러내고 동료들과 웃고 떠들면서 확인사살을 시작했다.


죽은 자들의 피로 물든 대지 위에서 기념사진이 촬영되었다. 가장 먼저 나타나 총을 쏜 중년남자의 얼굴은 일견 책 속의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뜨거운 햇살이 하늘에서 폭격처럼 내리쬐기 시작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히.


잠이 산산조각 났다.


*


정투호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난다. 허공을 휘젓던 팔에 스탠드가 걸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져 버린다.


스탠드가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정투호는 얼굴을 찡그린다. 전날 밤 시험관을 막다가 손에 생긴 상처가 다시 벌어진 모양. 눈으로 보지 않아도 감촉으로 알 수 있다. 손바닥에 피가 차오르고 있으니까.


일어나 전등을 켜자 두 눈이 유리조각에 찔린 것처럼 아프다. 마치 꿈속에서의 햇살이 정말로 현실이었던 것처럼. 전에 없던 일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피가 흐르는 손을 감싸 쥐고 방 밖으로 뛰쳐나간다. 어지간히 서둘렀는데도 손에서 핏방울이 흘러 떨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구급함에서 꺼낸 밴드와 반창고로 상처를 싸맨 다음 뒤를 돌아본다. 바닥에 떨어뜨리고 지나온 핏방울을 찾아 닦아낼 생각이었으나 그러지 못한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방울이 되어 뚝 떨어지는 감촉을 느꼈었는데, 거실 바닥은 잠들기 전과 다름이 없다.


혹시 핏방울이 떨어지다 옷에 튀었는지 살펴봤지만 그도 아니다.


아무런 흔적이 없다. 마치 손에서 떨어진 핏방울을 무엇인가가 공중에서 날름 받아먹은 것처럼.


그 순간, 다시 그 멈춤이 찾아온다. 완벽히 방음시공 된 음악실 안으로 들어선 것처럼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고,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자유낙하하던 밴드 껍데기가 멈춰 허공에 못 박혀 버린다.


시간이 멈추자 온몸의 피가 냉각되는 듯한 오한에 소름이 쭉 끼친다. 정투호는 손바닥의 상처를 다시 들여다본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밴드의 핏자국 역시 옅어진 것 같다.


꼭 상처에서 나온 피가 작은 아지랑이를 만들며 휘발하고 있는 듯한 느낌.


온몸이 저릿해지고 현기증이 인다.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정투호는 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백 미터를 전력으로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단번에 확 차오른다.


시간 정지가 풀리고 다시 소리가 돌아온다.


역시? 피와 관련이 있는 건가.


*


토요일 저녁.


정투호는 일부러 시끌벅적한 주점거리를 걷는다. 술 마시고 떠들고 싸우고... 왁자지껄하다.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 가운데서 혼자 실험을 시작한다. 반창고를 떼고 주먹을 꼭 쥐고 상처를 눌러 다시 피를 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까지 세자 다시 시간이 멈춘다.


이번에는 움직여 보는 거야.


덜컥 멈춰서 버린 거리, 소름끼치는 정적 속에서 정투호가 멈춰선 사람들 속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몸을 움직이기 어렵고 몸놀림도 아주 느리지만, 처음보다는 할만하다.


억지로 걸음을 떼어놓으면서 속으로 수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멈춰있던 시간이 폭포처럼 다시 움직인다. 동시에 숨이 가빠지고 확 차올랐다.


주변은 달라진 것이 없다. 방금 전 눈앞에서 벌어진 우주적인 사건이 마치 현실이 아니었던 듯이.


큰 차이는 아니지만, 처음 시간이 멈췄을 때보다 정지시간이 짧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인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을 한 번 멈추고 난 뒤에는 충분히 휴식을 해야만 다시 작동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더 오래 시간을 멈출 수 있지?


현기증이 인다. 시야가 흐려지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연이어 실험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시간을 멈추고 난 뒤에 나타나는 증상은 어쩐지 빈혈 증상과 비슷하다.


이거 혹시... 혈액을 소모시키는 거 아니야?


*


일요일 저녁에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실험을 진행한다. 전과 같은 일이 벌어졌고, 이번에는 여섯까지 세고 난 뒤에 정지가 풀린다.


정투호는 시간정지의 순간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리고 어쩌면 시간이 아예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흐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낸다.


하루에... 한 번 정도 쓸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왜 정지 시간이 매번 달라지는 것인지까지는 알 수가 없다.


*


정말 신비한 힘이지만, 누구에게도 말하거나 보여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경우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공전절후의 이능을 가지게 됐음에도 소년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런데 그 사실이 애석하지가 않고 재미있기만 하다. 아직 아이다운 순수함이 남아있기 때문.


소년이 보기에는 써먹을 데가 없는 능력이다. 고작 4~6초에 지나지 않는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다. 은행을 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골목골목마다 CCTV가 다 설치돼있는 세상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해질만한 장난을 칠 수도 없다.


5초 동안 고작 50미터도 달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물며 시간이 멈췄을 때는 꿈속을 걷는 것처럼 움직임이 둔해지기까지 하는데.


물론 누가 죽이겠다고 쫓아와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라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들을 걱정해야 할 만큼 치안이 엉망인 나라에 살고 있지도 않다.


물론 위험지역에서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아버지는 위급해지는 순간마다 이 이능을 사용해 무사히 몸을 빼냈을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정투호도 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도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는다.


그런 건 너무 위험하잖아.


후두둑, 빗방울이 몇 알 떨어진다. 그러나 소년은 비 피할 곳을 찾지 않고 주욱 기지개를 켠다. 개운하게, 마치 재미있는 꿈이라도 꾼 것처럼.


장례식 끝나고 많이 울적했는데 이거 덕분에 주말 재미있게 보냈네. 그거면 됐지 뭐.


그러다 흠칫하며 탄식한다.


“아! 맞다.”


비가 내릴 때 시간을 멈추게 했었더라면 훨씬 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슬로모션으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이라니. 생각만 해도 근사하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지쳐 헐떡이고 있다.


이래서야...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겠네.


현기증은 한동안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라앉았다.


*


밤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양치를 하는데 거울 속 눈동자가 이상하게 붉어 보인다.


정투호는 이유 없이 울컥한다. 거울 속의 얼굴이 어쩐지 보기 싫다. 당장 거울을 깨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갑자기 왜 이러지?


*


다시 월요일이다. 김빠지는 1교시와 2교시를 견뎌낸 학생들이 축 늘어져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친해질 놈들은 금세 친해지는 법이고, 시끄러운 놈들은 언제나 시끄럽게 떠들게 돼 있다.


스스럼없이 서로를 알아가고 어울려보는 남녀공학 교실이 풋풋하다.


그렇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정투호는 그 모양을 넘겨보고만 있다. 딱히 좋다 싫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멍하니.


그때 작고 마른 놈 하나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사방을 둘러본다. 그 뒤를 따라 불량하게 생겨먹은 둘이 더 들어와 놈의 뒤에 선다.


사람을 찾아 온 모양으로, 거들먹거리며 교실을 가로지른다. 정투호 앞에 멈춰 서더니 거리낌 없이 말을 건다.


“야. 네가 정투호냐?”


심심하던 차이기는 했지만, 껄렁껄렁한 태도가 거슬린다. 정투호는 대답도 없이 그냥 인상만 찌푸린다.


방문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는다.


“새끼가. 대답도 안 하네?”


초면에 ‘새끼’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른한 날씨에 늘어져 있다 보니 화를 내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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