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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두 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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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2.12.02 16:49
최근연재일 :
2022.12.27 21:28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1,486
추천수 :
26
글자수 :
136,013

작성
22.12.02 18:56
조회
76
추천
3
글자
10쪽

뭐가 들었는데

DUMMY

소년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밤늦은 시각이었지만 유온 변호삽니다, 하고 전화를 받는 목소리에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지만 수신자의 목소리가 잠겨 있지 않아도, 단단히 잠겨 있는 가방은 순순히 열리지 않는다. 비밀번호를 모르는 것은 유온도 마찬가지였다.


유온의 목소리에서는, 유품이 든 상자를 연다는 데 대한 호기심이 은근히 배어나오고 있다. 그러나 낙심해버린 소년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로 전화를 끊는다.


000000, 111111, 222222...


999999 다음부터는 막막하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과 접점이 전혀 없는 아들이, 아버지가 설정해둔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정투호는 정상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해머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가 없는 집에 해머가 있을 리도 없다. 또한 그 시각에 공구를 살 수 있을 만한 곳도 없었다.


뭐야. 아침이 되기 전까지는 열 수 없겠는데?

잠깐만. 이거라면 혹시...?


엄마의 생년월일.

그래도 가방은 열리지 않았다.


에이, 이것도 안 맞으면 그냥 자야겠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신의 생년월일을 입력해본다.


달칵.


잠금장치가 해제되자 소년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물론 아버지가 자신의 생년월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기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아들의 생년월일을 비번으로 설정할 정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필시 돈이 될 만한 것을 남겼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적인 기대감 때문.


그러나 그 기대는 금세 산산조각 나고 만다.


가방 안에는 정투호의 가운데손가락만한 유리시험관 하나가 들어있다. 그밖에 강한 충격이 가해져도 시험관이 깨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완충재가 들어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없다.


여자의 몸에 대한 갈망을 통해 거액의 유산에 대한 욕심을 억누르고 있던 정투호의 평정도 마침내 깨지고 만다. 그 저주받은 가방을 부숴버릴 것처럼 거칠게 닫고 거실 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버린다. 씩씩대고 허공에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그럼에도 정투호는 그 이상한 시험관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리지는 못한다.


아버지의 유품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얼마짜리 물건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변호사에게 그 물건의 정가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잠시 후 흥분을 억누른 정투호가 시험관을 꺼내 조심스럽게 관찰한다. 시험관은 코르크 마개로 단단히 봉해져 있고, 그 안에는 핏빛 액체가 들어있다.


아니, 단순히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시험관은 작은 공기방울 하나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밀봉되어 있다. 아무리 흔들어 봐도 내용물은 그대로다.


다른 게 더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으로, 이번에는 시험관이 들어있던 가방을 들고 흔들어본다.


그러자 어딘가에 붙어있던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나비날개처럼 나풀거리며 정투호의 눈앞에 착륙한다.


가방까지 자신을 놀리고 있는 듯해 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정투호가 앓는 소리를 낸다.


포스트잇에는 일곱 글자가 적혀 있다.


RED CELL


볼펜으로 쓴 손글씨이기는 해도 필기체가 아니다. 또박또박 끊어 쓴 대문자들. 그래서 정투호는 그 글씨를 남긴 사람이, 아마도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의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한다.


어쩌면... 한국인.

혹시 아버지가?


한 번도 아버지의 필체를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 종이는 설명서가 아니다. 궁금한 것은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정투호는 시험관을 꺼내 눈 위로 들어올린다. 전등 불빛에 비친 액체의 색은 딸기맛 젤리보다는 진하고, 으깬 적포도보다는 묽다.


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 영 꺼림칙하기만 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피를 연상하게 되어 어쩐지 섬뜩해지기까지.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액체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런 정체불명의 액체가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되어야 할 이유 역시 알 길이 없었다.


문득 만화책에서 본 일화 하나가 떠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떨어지고 있던 포도밭에 들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딴 포도로 만든 와인. 세월이 흘러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이 된 그 와인 병을 깨뜨린 남자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던 이야기.


혹시 엄청나게 비싼 마약을 만들 수 있는 화학약품 같은 거?


적어도 독은 아닐 것 같다. 청산가리는 맹독성을 가지고 있지만 비싸거나 희귀하지는 않으니까. 극소량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액체들은 너무 흔하고 값싸다.


“도대체 뭐냐고 이건?”


정투호는 마개를 열어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이번만큼은 물욕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에서다.


액체의 색은 유혹적이다. 판도라의 상자 역시 그와 같은 색이었을 것만 같다. 그 코르크 마개 끄트머리를 잡아당기기만 하면 당장 문을 열고 자신의 비밀을 내보일 것 같다.


...열어 볼까?


정투호는 마개를 돌리고 잡아당긴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게 빠지지 않는다. 코르크 마개를 열어본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으니 마음처럼 될 리 없다.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 결국 신경질적으로 마개를 쥔 손을 강하게 비틀고 만다.


퍽석!


“어어어?!”


애먼 시험관 주둥이만 깨먹고 만다. 다행히 시험관이 산산조각나지는 않았지만,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툭, 후두둑.


마개와 함께 붉은 액체 몇 방울이 쏟아지고 떨어진다.


하지만 닦아내야 할 필요는 없다. 손에 쏟아진 액체가 휘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차갑다 못해 시린 손의 감촉이, 기화열 현상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소년에게 말해준다.


드라이아이스를 녹여서 끼얹은 느낌. 드라이아이스의 연기처럼, 정투호의 눈앞에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러다간 액체가 모두 증발해 없어질 것이 아닌가.


“윽!”


얼떨결에 손바닥으로 깨진 시험관을 눌러 막은 정투호가 신음한다. 그러나 코르크마개처럼 잘 막을 수는 없다. 휘발되며 새어나오는 냉기가 손바닥으로까지 느껴질 정도.


“아 이런 휘발!”


깨진 시험관 주둥이에 찔린 손바닥에서 피가 흐른다. 본래 반투명하고 묽은 빛의 액체가 들어있었지만, 정투호의 혈액이 섞이면서 액체는 정말 포도주처럼 검붉어진다.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아마도 희귀하고 비싼 물건일 그 액체가 다 사라진 뒤의 손해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액체인지 알아보고 싶다는 호기심도 아니다.


어찌 됐든 그건 아버지의 유품이다. 귀중한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소년은 견디기 어렵다.


엄마가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이후 오래도록 영정에 대고 말을 걸어왔던 소년은, 그 액체가 휘발되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결국 소년은 조바심 속에서 그 자신조차 상상도 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만다.


꿀꺽!


정투호는 시험관을 기울여 그 안의 액체를 마셔 버린다. 액체가 다 날아가 사라져 버리기 전에.


그리고는 액체가 목을 넘어가자마자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한다.


시험관에 남은 몇 방울은 금방 증발해 버린다. 정투호는 액체를 마시다가 같이 삼킬 뻔했던 유리조각을 퉤, 하고 뱉어낸다.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액체 자체가 차갑지는 않았다. 단지 휘발성이 강했을 뿐. 탄산음료를 잔뜩 마셨을 때처럼 콧김이 훅, 하고 끼쳐 나오며 코끝이 찡해졌지만 다른 이상은 없다.


액체가 식도와 위장에 훅 스며드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에 소년은 몸서리친다. 마치 뱃속에서 무엇인가가 싹처럼 자라나면서 소년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잡아먹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대로다. 그것은 그것대로 김빠지는 일이다.


정투호는 구급함을 뒤져 손의 상처를 싸맨다. 몇 시간 뒤면 학교에 가야 하니까.


물론 마음 같아서는 학교 같은 데는 영원히 가고 싶지 않지만, 유온의 방문으로 인해 인생 계획이 변경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알람을 맞춘 뒤 소파에 드러눕는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


오전 6시 52분.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밤늦게 잠들었던 정투호가 깨어난다.


아직 늦지 않은 시각이어서 여유가 있지만, 소년은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다. 욕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한다.


“윽!”


전날 밤 대강 구급약을 발라놓은 손바닥이 따끔하더니 다시 피가 흐른다. 그냥 한 손을 들고 계속 샤워를 했으나 피는 계속 흘러나온다.


그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갑자기 싸늘한 한기에 뒷목이 서늘해진다. 뒷목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시리다. 냉장고에 들어간 것처럼.


그리고 중대한 이상이 감지된다. 깜짝 놀라 눈을 부릅뜬다. 믿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져있다.


샤워기의 물방울들이 허공에 뜬 채로 멈춰 서 있다. 정투호가 놀라 뒤로 돌아선다. 이때 실수로 쓰러뜨린 샴푸 통 역시 그대로 공중에 멈춰 선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샴푸 통을 향해 손을 내민다. 손은 아주 느리게 뻗어져나간다. 꼭 꿈속을 걸을 때처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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