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우오오오오오!!!
레나의 힘을 흡수한 카르갈이 포효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황금빛 마력은 카르갈의 피부 표면에서 꿀렁이며 점차 탁한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레나의 마력을 자신의 마력으로 변환하는 과정인 듯했다.
- 콰득! 콰득! 콰드득!
마력을 흡수한 카르갈은 외형도 변화했다.
멋없는 종기 같던 뿔은 수사슴의 뿔처럼 크고 길게 뻗었고 오돌토돌 징그러운 돌기는 반짝이는 비늘로 변해 갑옷처럼 전신을 덮었다.
거기다 안 그래도 거대하던 몸집이 1.5배는 더 거대해진 데에 더해⋯.
- 촤라라락!
팔 쪽의 비늘이 손을 향해 모여들더니 이내 검의 형태를 이뤄냈다.
- 크하하하! 다른 놈들은 먹어 치울 가치도 없는 하찮은 능력뿐이었는데 드디어 좀 쓸 만한 걸 얻었군!
거기다 말본새로 봐서 카르갈은 마력뿐만 아니라 특성이나 스킬같은 능력까지 함께 흡수가 가능한 모양이다.
“허, 참 대단한 대장님 모셨네 당신들. 몬스터한테 자기 힘 상납한 헌터는 최초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열이 확 올라 쌍욕을 한 바가지 퍼부을 뻔했지만 여기서 우리끼리 말싸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으니 입술을 꽉 깨물고 최대한 열관리를 했는데도 결국 비아냥이 새어 나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일본 헌터가 뭐 하러 한국까지 와서 깽판 치나 했는데, 차라리 침공 같은 거면 몰라, 몬스터한테 자기 힘 갖다 바치러 온 거였어? 진짜 할 짓도 없는 인간이네.”
“아, 아니야, 레나 님은⋯!”
“레나 님은 뭐? 할 말 있으면 해봐. 어떻게 실드치나 들어나 보자.”
“⋯⋯⋯⋯.”
반사적으로 레나의 편을 들어주려던 미즈키는 내 되물음에 입을 꾹 닫았다.
무조건 편을 들어주려고 억지를 써도 헌터로서, 인간으로서 실격인 행위임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나 보다.
“자자, 일단 좀 진정하자. 진정하고.”
내가 열이 올라 보이자 옆에서 형이 내 정수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 꼬라지를 봐라 이게 진정할 상황으로 보이나, 나는 또 헛소리하면 형에게도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고 입을 풀고 있었는데.
“시간 없으니까 깔끔하게 묻고 답하고 빨리 끝내자고. 너희들 한국에 온 목적이 뭐야? 처음부터 대장 따라 하려고 왔다가 막상 직접 하려니까 무서워서 망설인 거 아니야?”
형은 차분하지만 날카롭게 일본 헌터들의 목적을 물었다.
“우, 우린 저런 거 듣지도 못했어! 표정 안 보여?! 제일 당황스러운 건 우리라고!”
그에 아이리가 당황하며 해명했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네 사람의 얼굴을 슥 둘러보았다.
뭐, 다른 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즈키의 표정만큼은 확실하게 읽을 수 있었다.
미즈키는 분노해있었다.
가장 믿고 따르던 사람의 배신에 큰 고통과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럼 한국에는 뭐 한다고 온 건데? 모른다고 하지 마, 분명 뭔가를 듣고 왔을 거 아니야, 자 하나둘셋 하면 넷이 동시에 말해, 하나, 둘, 셋.”
““““하, 한국 헌터 중에 위험한 놈이 있다고 해서⋯.””””
형의 지시에 따라 넷은 조금씩 다른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결국 결론은 한국 헌터 중에 몬스터를 도와 한국을 공격하려는 놈이 있다고 들어서 그놈을 막기 위해 출동했다는 식의 대답이었다.
“아니, 잠깐만! 지금 너희가 뭘 의심하는 건지 알아, 아는데! 우리도 진짜 피해자야, 다 속은 거라고! 대장이 뭐 어쩌자고 저런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뭐 한다고 안전한 일본 땅 떠나서 이 위험한 몬스터 소굴에 왔겠어! 나름대로 좋은 일하자는 사명감 때문에 온 건데 일이 이렇게 꼬여서 우리도 미칠 것 같아! 그리고 저길 봐, 지금 우리끼리 이러고 있을 때 아니잖아!”
유스케는 레나의 힘에 적응을 거의 마쳐 가는 카르갈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말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카르갈은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쯧.”
끝까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하필 눈앞에 저 망할 거인 새끼가 죽치고 있는 바람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는 일단 신경을 다시 그쪽으로 돌렸다.
“다들 괜찮아?”
그때 저 멀리 날아갔던 아린이가 뒤늦게 돌아왔고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 덴 이유가 있었다.
아린이는 격렬한 움직임으로 겨우 아물던 상처가 그대로 다시 벌어져 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상당히 지쳐 보였다.
“⋯너야말로 괜찮아?”
“나야 뭐⋯.”
평소라면 멀쩡하다던가 쌩쌩하다는 등의 확신에 찬 표현을 썼을 텐데, 아린이는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보다 부탁할 게 있는데.”
“어? 뭔데?”
“도망쳐.”
어떤 부탁이든 들어줄 생각이었는데 아린이의 부탁은 다름 아닌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카르갈을 한 번, 아린이를 한 번 바라봤다.
카르갈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고 우린 여전히 약하다.
그런 둘의 싸움 속에 우리가 있어봤자 뭔가의 도움은커녕 전투가 끝날 때쯤엔 누가 승리하든 여파에 휩쓸려 어느새 죽어있겠지.
“⋯⋯⋯⋯.”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뒤도 안 보고 도망치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
다 같이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목숨을 건지는 게 당연히 옳은 판단이니까.
하지만 어째선지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도 같이 가자. 일단 물러나서 어떻게 상대할지⋯.”
나는 아린이에게 함께 후퇴할 것을 권했지만 아린이는 고개를 저었다.
“힘을 흡수해 강해지는 몬스터라면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 해. 시간을 끌면 끌수록 괜히 희생만 늘고 해치우기도 힘들어질 뿐이야.”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중에 떠도는 말을 꺼내려다 깜짝 놀라 말을 멈췄다.
그 순간 내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이대로 아린이와 헤어지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뭘 그렇게 망설여?”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린이는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표정은 참 복잡한 표정이었다.
분명 아쉬운 일이지만 이미 체념해 별로 개의치 않는, 무언가를 각오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가자.”
아직도 망설이는 나를 대신해 형이 나서 내 어깨를 꽉 잡아 강제로 끌고 가다시피 했다.
내 선택으로 아린이를 버린 게 아니라 자신이 억지로 나를 끌고 간 것이라는 그 책임을 대신 짊어질 생각인 것 같았다.
“⋯어딜 가? 당신들은 여기 남아야지.”
우리가 이 자리를 떠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헌터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아린이는 그런 그들에게 검을 들이대며 막아섰다.
“예? 왜, 왜요?”
“내가 없는 곳에서 내 동료들한테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리고 무엇보다.”
당황한 유스케의 물음에 아린이는 턱짓으로 카르갈을 가리켰다.
“저걸 저렇게 만든 게 당신들 대장이잖아. 연대책임 져야지.”
“저, 저기⋯ 저희 대장이 저런 걸 만든 건 죄송하지만⋯ 솔직히 저희는 아무것도 몰랐고 또 저희가 한 짓도 아닌데⋯.”
“그래서 아무 책임도 없다고?”
“아니요, 책⋯임이 있다면 있기도 하지만 그 부분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면⋯.”
“용서해 주려고 하는 말이야.”
“예?”
“난 당신들이 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서 불안해. 그러니까 선택해, 지금 당장 다 죽을지, 당신들 대장이 저지른 잘못을 함께 책임지고 결백함을 증명할지.”
순간 목을 움켜쥐듯 조여오는 살기에 미즈키는 본능적으로 검의 손잡이를 콱 잡았다.
“⋯⋯⋯⋯.”
하지만 그녀는 손잡이를 잡은 손을 덜덜 떨기만 할 뿐 감히 검을 뽑지는 못했다.
뽑는 순간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 절레절레.
살기에 몸이 얼어붙은 다른 동료들은 겨우 눈알만 굴려 미즈키를 향해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미즈키가 검을 뽑는 순간 넷은 운명공동체가 될 게 뻔하니까.
“⋯아, 알겠습니다. 남아서 책임질 테니까⋯ 제발 그 검 좀 치워주세요. 심장에 안 좋아요.”
유스케가 조심스럽게 검 끝을 손가락으로 밀어내자 아린이는 검을 치워주었다.
그에 일본 헌터들은 일단 한숨 돌리긴 했지만 이젠 또 카르갈과 싸워야 하니 산 넘어 산인 고난에 표정이 밝지는 못했다.
하지만 표정이 밝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
안 그래도 무겁던 발걸음, 이제 겨우 떼기로 마음 먹었건만. 저 멀리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물론 카르갈에 비하면 스마트폰 진동 정도나 되는 진동이었다.
- 두웅⋯.
- 두웅⋯.
하지만 발걸음만으로도 땅을 울리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어디 만만한 존재일까.
예상대로 사방팔방에서 약 5층에서 10층 건물 높이쯤 되는 다양한 크기의 거인이 이쪽을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카르갈의 포효는 단순 포효가 아닌 자신의 부하를 불러 모으는 일종의 하울링이었다.
“에휴~ 도움 안 되면 도망이라도 잘 쳐야 하는데 그것도 똑바로 못하네.”
그 광경을 본 형은 발길을 돌려 아린이를 향해 터덜터덜 되돌아갔다.
“포위를 뚫고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난 못할 것 같아.”
나는 작은 몸집을 이용해 요리조리 피해 도망치는 건 어떨까 해서 그렇게 말해봤지만 서연도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형의 뒤를 따랐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쪽으로 몰려오는 거인의 무리를 확인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거인만 수백 마리, 그리고 느껴지는 진동 상으로 그 뒤로 또 수백 마리.
흠, 역시 안 되겠다, 저건.
그런 확신이 든 나도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안녕, 오래간만이네.”
“결국 왔구나?”
저 멀리서 엄청난 수의 거인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아린이는 왜 돌아왔냐는 물음도 없이 그렇게 맞이해주었고 대신 내게 다른 부탁을 남겼다.
“⋯자, 솔직하게 말할게, 난 저거 하나만 상대하기도 벅찰 것 같아. 까놓고 말해서 지금 상태로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네 몸은 네가 지켜야 해. 할 수 있겠어?”
“이 상황에 할 수 있고 없고가 어딨어, 무조건 해야지. 서연아!”
나는 만년빙으로 만든 단검으로 손목을 찔러 피를 내며 서연이를 불렀다.
이미 한두 번 합을 맞춰본 게 아니었기에 서연은 자연스럽게 피를 받아 세수하듯 얼굴부터 시작해 팔과 몸에 피를 바르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그런데 피를 바르던 서연이 갑자기 짐승 같은 소리를 내더니 참지 못하고 내 팔을 콱 깨물었다.
“아야야! 야! 너 왜 그래? 평소엔 잘 참았잖아!”
“미안. 실은 스킬이 진화해서 피를 흡수할 때의 느낌이 좀 달라졌어.”
“스킬이 진화했다고? 언제?”
“아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좋은 거야. 더 강해졌으니까. 다만 평소에 이성을 유지하던 방법이 잘 안 통해.”
“참을 수는 있고?”
“응, 방금처럼 한 번씩 갑자기 확 흥분될 때가 있긴 한데 괜찮아.”
당장 멀쩡히 대화가 되는 걸 보면 이성을 유지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는 듯하다.
그나저나 이 와중에 전력이 강화된 부분이 있었을 줄이야, 그나마 희소식이다.
“저⋯ 길드 마스터님? 제안 드릴게 있는데 저희가 길드 마스터님을 도와 카르갈과 싸우는 것보단 동료분들을 돕는 게 길드 마스터님께 방해도 안 되고 동료분들께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되는 데 그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여쭤봐도 될까요?”
거인에게 포위돼 꼼짝없이 함께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틈타 유스케가 아린에게 그렇게 물었다.
“⋯쓸데없는 짓 하면 저거랑 싸우는 중에도 당신들 죽일 틈 정도는 만들 수 있어. 그건 알아둬.”
“아유~ 물론이죠! 저희 그런 나쁜 놈들 아닙니다! 성심성의껏! 몬스터에 맞서겠습니다!”
아린이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유스케는 동료들에게 손짓해 서둘러 이쪽으로 붙었다.
하긴 카르갈보단 차라리 저 거인 군단과 싸우는 게 살아남을 확률이 10배는 높겠지.
“뭐, 이래저래 서로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소한 건 나중에 차차 풀기로 하고 일단은 함께 살아남아 봅시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번엔 형이 그러했듯 유스케가 먼저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다시금 잘 부탁한다.”
그러자 역시 켄토가 따라 인사했고.
“자, 잘 부탁해~.”
“잘⋯ 부탁한다.”
입장이 뒤바뀐 아이리와 미즈키도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우린 이번엔 서로 죽이기 위함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인사를 다시 한번 나누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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