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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 님의 서재입니다.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전쟁·밀리터리

완결

riekun
작품등록일 :
2020.05.04 18:35
최근연재일 :
2020.12.0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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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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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4)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DUMMY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4)


전술소체는 인형과 달리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 한 명의 전술소체 조종사가 네 기의 전술소체를 동시에 조종할 수 있다는 얘기는 전술소체의 모든 것이 전적으로 전술소체 조종사에게 달려 있다는 얘기가 된다.


길바닥 위에 생긴 구멍 안에서 새까만 물체 하나가 마치 그림자가 벌떡 일어서듯이 튀어나왔다. 전술소체 조종사가 그 대상을 제때 발견하지 못한 건 갑자기 솟아오른 전술소체의 조각 일부분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라고?


‘C타입 건설 장비다.’


아, 그래. 건설 장비로군. 딱 봐도 알겠네. 정말 건설 장비처럼 생겼어... 그녀는 눈을 한 번 깜빡인 다음, 곰방대 끄트머리에 살담배를 조심스레 털어 넣는 그에게 말했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저 까만 게 무슨 건설장비야. 그냥 손잡이가 달린 직육면체 블록이지. 그는 히힛,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괴상한 소리를 했다.


‘디자인이 씨발이니까 C타입이 맞... 흠흠. 일반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다른 인형들도 그렇게 다룰 수밖에 없지.’


담배를 채워 넣은 곰방대를 들자 옆에 서 있던 디나미가 새끼 손가락 끝으로 살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가락 안쪽에 점화 장치가 설치된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드라중공 인형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딥마인드의 소체 최적화 과정이 끝나갈 무렵 그가 물었다.


‘기분이 어떻지?’


그녀는 양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며, 지금 기분으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었다.


‘그래.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것 같겠지.’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후, 탄식을 내뱉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네 힘이 아니다. 넌 여전히 총알 한 방에 구멍이 뚫리고, 인간의 말 한마디에 무릎 꿇는다. 언제나 빼앗길 수 있는 힘이지.’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그건 인간이랑 다를 게 없네. 마음에 들어.


‘그런 마음가짐이면 충분하겠군. 내가 직접 디자인한 세상에 둘도 없는 소체이니 잘 사용해라. 아- 그렇지. 소체를 교체하는 동안 재미있는 데이터가 들어왔다.’


그가 보여 준 건 BB소대의 행적을 소상하게 정리한 데이터였다. 어디서 얻은 데이터인지는 알 듯했으나 이 데이터가 어째서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인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비블라인의 전술소체가 얼리버드의 구역에 투입되었다는 정보에서 그녀의 눈이 멈췄다.

내 동료의 흔적이 도중에 끊겼는데?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답은 뻔하지 않나.’


그렇군. 알겠어. 정보 고마워. ...소체 교체도 고맙고. 그녀는 머뭇거리며 딥마인드에 떠오른 단어를 내뱉었다. ...아버지.


‘떼끼. 농담 마라.’


그가 실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디나미와 비네스를 빌려 주지. 맘껏 날뛰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거다.’


그때의 기분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전술인형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한 전술소체 8기가 눈앞에 있었음에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정말로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구체 모양이었던 전술소체는 뒤늦게 그녀를 발견하고는 변형을 시작했다.


느려.


무릎을 굽히고, 발목에 힘을 준다.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나가면 5미터의 거리를 단번에 좁히는 건 일도 아니다. 고성능 전술인형은 이런 기분을 매번 느낄 수 있다는 것인가. 태어났을 때부터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의 높이가 정해져 있다는 건 정말 불공평한 처사다.


전술소체가 인간처럼 두 다리로 대지 위에 섰을 때, 그녀는 이미 그들의 코앞에 도달한다. 네 개의 고리가 달린 손잡이의 센서가 그녀의 딥마인드와 연동된다.


아이드라중공 건설 장비 C타입-썬더볼트 라이트암 작동, 철거 모드.


첫 번째 전술소체의 앞에 도달했을 때, 그녀의 오른쪽 망토 자락이 폭발할 것처럼 팽창했다. 비틀린 허리와 뒤로 당겨진 어깨, 그리고 망토 자락이 위로 날아갈 듯 펼쳐지며 나타난 것은 새까맣고 거미줄처럼 복잡한 구조의 뼈대로 이루어진 커다란 주먹이었다. 그녀가 휘두른 거대한 주먹은 마치 철거 공사를 진행하는 크레인의 레킹볼처럼 바람을 찢으며 나아가 전술소체 한 기를 날려 버린다.


[씨발! 깜짝이야! 저게 뭐야!]


얼마나 당황했는지 통신기를 너머로 발작하여 조종기를 걷어차는 소리가 전해졌다.


[2호 당황하지 마라. 시간을 벌 테니 사격하라.]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알고 있다면 전술소체 조종사 능력이 얼마나 신기에 가까운지 알 수 있다. 상대의 주먹에 정타를 맞은 전술소체의 화면이 꺼지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전술소체가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


그와 동시에 왼편에서 멀찌감치 있던 다른 한 기는 사출기가 장착된 오른팔을 들어 탄환을 발사한다. 재장전의 시간을 벌기 위해 뒤로 움직이자 그 자리로 마지막 한 기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오른팔을 들었다. 이 모든 게 한 사람의 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당연히, 안타깝게도, 첫 번째 몸통 박치기는 빗나갔다. 단숨에 5미터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신체 능력을 지닌 인형은 급발진한 전술인형의 속도마저도 갓난아기의 장난처럼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하얀 늑대의 리더는 경험이 풍부한 자였다. 이미 회피할 것을 예상했다. 최초로 발사된 탄환은 그녀의 움직임을 멈추기 위해 가슴을 노리고 날아간다. 하지만 그녀의 춤은 끝나지 않았다.


인형은 커다란 주먹을 망치의 머리처럼 뒤집어 지지대로 삼아 공중으로 몸을 피했고, 그 행동을 예측하고 발사된 탄환이 망토에 막히는 것을 본 하얀 늑대 리더는 ‘아차.’하는 마음에 급히 돌진한 전술소체를 후퇴시키려고 했다.


[망토가 방탄 섬유다. 2소대는 철갑탄으로 재장전하여 응사하라.]


후위에 있던 전술소체들의 오른팔에서 탄환 한 발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출기 바깥으로 배출된다.


뒤로 물러나도록 조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술소체는 앞으로 나가는 힘을 이기지 못했다. 야구 글로브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야구공처럼 커다란 주먹에 안착한다. 그리고 인형은 그 커다란 손으로 전술소체를 움켜쥔다.


아그작. 과자를 씹는 듯한 소리가 났다. 비록 경량화를 목적으로 제작된 가벼운 합금이었지만 그래도 쇳조각이었다. 결코 어린아이의 손에 쥐여진 솜사탕처럼 찌그러질 물건은 아니었다.


[단순히 크기만 큰 게 아니다. 반중력 제어 해제, 접근전을 피하라.]


리더의 명령에 따라 하얀 늑대들은 일제히 거리를 벌리면서 재장전한 철갑탄을 발사한다.


카메라에 포착된 영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탄피가 아니라 멀쩡한 탄환이었다. 발사하지도 않은 총알을 버리는 건 결코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수십 개일 수 없다. 분명 딥마인드는 예전 그대로일 텐데도 논리 회로 판단이 더 빨라진 기분이 들었다.


아이드라중공 건설 장비 C타입-썬더볼트 레프트암 작동, 우산 모드.


얇은 골격 수십 개가 재빠르게 구조를 교차하면서 오른팔에 장착된 주먹보다는 작으나 그녀의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는 크기의 우산으로 변했다. 철거 현장에서 비산하는 파편으로부터 소체를 보호하기 위해 개발된 형태였다. 단순히 막아 내는 데에만 쓰이지 않는다.


아이드라중공 기술자들은 폭파 현장에서도 장비가 쓰일 수 있도록 대포알만 한 파편이 튀어도 막아낼 수 있게끔 설계했다. 큰 파편을 막아도 장비가 망가지지 않도록 사용하는 인형의 딥마인드 연산 능력을 빌려 날아오는 물체에 대한 도탄 각도를 산출하여 변형한다.


발사된 철갑탄 중 몇 발이 우산에 막혀 튕겨나가자 전술소체들의 움직임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그러나 우산을 관통한 탄환도 있었기에 장기전은 불리했다.


움직여라 내 다리!


다시 한 번, 무릎이 굽혀진다. 발목에 실린 힘이 땅바닥을 박찬다. 공중으로 낮게 떠오른 몸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전술소체를 향해 벼락처럼 날아간다.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방패처럼 앞세운 우산과 등지고 있던 벽 사이에서 전술소체는 구두에 밟힌 사과처럼 짓눌려 파괴됐다.


그 사이에 한 기의 전술소체가 우산이 막고 있는 방향을 우회하여 돌아온다. 그녀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전술소체를 던져 반대편으로 접근한 녀석을 방해한 후 다시 한 번 무릎을 굽혔다. 하얀 늑대 리더는 인형의 몸을 가리고 있는 우산의 높이가 낮아지자 급히 무전을 개방해 명령을 내렸다.


[산개! 산개하라!]


전술소체들이 사격을 멈추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낄 새도 없이, 지하 통로에서 전술소체를 삼켰던 어둠이 우산 안에서 커다란 입을 벌린 채 반대편에 서 있던 전술소체를 향해 날아갔다.


[맙소사! 로켓 펀치는 또 뭐야!]


2호 조종사의 비명 같은 외침을 들으며 하얀 늑대 리더는 외곽으로 빠져 있던 두 개의 소대 중 5소대를 급히 소환했다.


[리더가 5호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들리는가? 재송신한다. 리더가 5호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치익, 재송신- 치익- 재송신- 바란- 요청-]


외곽에서 수신되는 무전에 화이트 노이즈가 잔뜩 섞여 있다. 하얀 늑대의 리더는 처음으로 이성을 잠깐 잃을 뻔했다. 어떻게 된 게 이런 촌동네에서 전파 방해 같은 고급 기술이 가능한 것이냐! 대체 본부는 무슨 확신을 가지고 이번 작전을 입안했단 말인가!


커다란 주먹이 날아가면서 이어진 골격을 조준해 철갑탄을 발사했으나 교묘하게 손목을 틀어 피탄 면적을 줄여 피했다.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2호, 대 인형 파편수류탄 챙겼는가?]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 재장전까지 3초.]


재장전은 문제가 아니다. 저 인형의 공격 방식과 패턴은 이미 다 드러났다. 재공격까지는 힘을 축적할 시간이 필요하고, 인형의 오른편에 있지 않는다면 원거리 공격도 받는다. 하지만 직선으로 날아오는 속도에 반응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예측하라.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반응하라. 어차피 움직이는 건 직선이지 않은가.


[내가 방패가 되겠다. 인간의 존엄을 걸고 어떻게든 성공하라.]


[발사각 계산, 조준 보정, 발사 준비 완료. 신호를 달라.]


[셋]


상대가 눈치챌 수 없도록 전술소체 2기를 좌우로 펼친다. [둘] 일부러 인형의 ‘오른편’으로 전술소체를 보낸다. 우산을 펼치고 있는 인형이 미끼를 물었다. 뚫어져라 화면을 통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리더는 있는 힘껏 조종간을 당기며 외쳤다.


[발사!]


빗나갔어! 상대의 반응이 빨랐다. 역시 같은 수법이 세 번이나 통하길 바라는 건 무리였나! 라고 생각할 때, 퉁- 하는 맥빠진 소리가 났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분명 연구소에서 일할 때 다뤄 본 무기 중에서...


순간 머리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작은 물체가 보였다. 성능이 향상된 그녀의 눈이 놓칠 리가 없었다. 수-류탄? 왜 빗나갔지? 빗나갔다고? 빗나갔을 리가. 대체 뭘 노리고...


그녀의 눈에 자신이 나왔던 구멍이 지구의 내핵으로 향하는 거대한 입구처럼 보였다. 저 아래에는 동료가 있다. 이 개자식들! 빈틈이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서두르자 동작이 커졌다.


[저 녀석을 잡아!]


하얀 늑대 리더의 전술소체가 그녀를 붙잡고 늘어지기 위해 접근한다. 단지 붙잡으려는 의도뿐만이 아니라 조금 더 접근해서 발사할 철갑탄의 관통력과 명중률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저리 꺼져!”


커다란 손을 활짝 펼쳐 칼날처럼 휘두르자 접근하던 전술소체들이 화들짝 놀라 물러난다. 그녀는 먼저 들어간 수류탄을 따라 구멍 안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전술소체들이 뒤따라오지 못하도록 착실하게 주먹으로 구멍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콰앙-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구멍으로 쏙 들어간 수류탄은 멀리 가지 않았다. 지하 통로로 내려가자마자 수류탄의 위치를 확인한 필리아는 왼손에 들고 있는 우산을 좀 더 촘촘하게 재배열한 후 형태를 돔커버처럼 뒤집었다.


콰앙-! 소리는 컸지만 우산 안에서 터진 수류탄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못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는 생각에 의기양양했던 필리아는 자신이 실수한 점에 대해 곱씹었다.


“...필리아. 할 말은 무척 많은데, 궁금한 거부터 물어볼게. 한 번 구해 준 건 두 번 죽이려는 의도였어?”


“두 번 구해 주고 싶었거든.”


“몸은 어때?”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가 좀 짜증날 정도야.”


“훌륭하네. BB소대로 돌아온 걸 환영해.”


“일은 마무리해야 하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비블라인 늑대들까지 냄새를 맡고 달라드는 거야?”


“조금이라 하기엔 넘치고 많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일들이 일어났거든. 이 인간 때문에.”


라비는 손가락으로 복부에 검은색 천을 붕대 삼아 칭칭 감아 놓은 흄을 가리켰다. 필리아는 흄의 상태보다도 그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전술인형이 더 신경 쓰였다. 왼팔의 천을 붕대로 쓴 것인지 어깨까지 하얀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저장장치에 설치된 데이터베이스가 훨씬 풍부해진 덕분에 전술인형의 모델명을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플로렌스 사의 전술인형이 팀에 끼어 있다니. 나 해고된 거야?”


“흐흥, 인력난이라 인턴쉽을 운영하고 있거든. 당분간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


“암살을 목적으로 만든 인형이랑? 예비 소체를 아홉 개 정도 가지고 있는 거야? 농담이지?”


“저쪽에게 직접 물어보던가.”


그래. 저쪽에 직접 물어봐. 나도 궁금하니까. 대체 저 인간은 어째서 가만히 엎드려 있지 않고 괜히 앞으로 나서서 총알을 맞은 걸까.


B. B.의 구역으로 택배을 전해 주는 안제를 통해 반중력 제어 장치를 몇 번 구경한 적은 있었으나 그것에 당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인형들이 모두 반중력에 묶인 상태에서 흄은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상대의 모습은 어둠의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이쪽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반격은 커녕 바짝 엎드려 목숨을 보존하는 게 옳은 판단이다.


전술인형 베즈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려고 했다. 그런 점이 참으로 전술인형 같았다. 라비는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력 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딱 하나, 딥마인드를 지배한 생각은 ‘여기서 죽는가?’였다.


첫 번째 탄환을 막아 낸 후, 베즈마는 짐승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자신의 모든 걸 쏟아내려고 했다. 그때 인간이 일어섰다. 반중력의 제어를 받는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떼어 내고 필사적으로 베즈마의 옆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리자니, 분명 방패가 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즈마의 곁으로 가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대체 뭐였을까.


아니. 아니지. 라비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멍청한 행동이다. 전술소체 조종사나 전술인형 지휘관이 어째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자. 단순히 인간이 귀한 시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총알 한 방을 복부에 맞아 쓰러졌다. 인간은 약해서 죽이기가 너무 쉽다. 그리고 지휘관을 잃은 장기말은 쓰잘머리가 없다.


하지만. 정말로 하지만- 반쯤 넋이 나간 베즈마의 저 표정과 반중력 제어가 풀리자마자 흄의 상태를 확인하고 적절한 응급처치를 하는 모습을 보자니 소용이 없는 짓은 아니었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1군단 사령부, 재송신 바랍니다.”


지엔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여기고 다시 되묻는다. 네트워크 통신을 중계하던 쇼콜라도 꽤나 놀랐는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물론 인간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녀 역시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제1군단 사령부 명령은 변함 없습니다. 지엔 소위. 화물을 꼭 확보하십시오.]


“아니, 제 보고의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다시 보고합니다. 현재 주벤에샤로 비블라인의 전술소체가 투입됐음을 확인했습니다. 전술소체 투입되기 앞서 원인 불명의 전자전 공격을 받아 제 휘하의 전술인형들이 셧다운됐습니다. 비블라인이 신병기를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지금 당장 증원을 요청합니다.”


[귀관의 요청은 제1군단 사령부 작전실에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지엔 소위는 그에 앞서 화물 확보에 주력하십시오.]


“아니 자꾸 화물이라 하는데, 오히려 그랜트 흄 소위와 합류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게다가 갑자기 제1군단 사령부에서 권고가 아닌 정식 명령을 내리는 까닭은 뭡니까? 제3군단 특무부는 합당한 설명이 있기 전까지는 시행할 수 없음을 정식으로 밝힙니다.”


지엔 소위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제3군단은 첩보와 자사의 이익을 위해 설립됐다. 제13사단도 제3군단 휘하다. 오직 적대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반 군대를 모방해 움직이는 제1군단 사령부와는 설립 목적과 명령 체계가 완전히 상이하다.


등을 활짝 편 올곧은 자세로 정면을 쳐다보고 있던 쇼콜라가 갑자기 지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대장님, 제1군단 사령관 부관으로부터 통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아- 그 녀석은 좀 껄끄러운데. 알았어. 연결해 줘.”


“네, 진행하겠습니다. 네트워크 상태 확인, 감청 파장 확인, 비허용 접속 여부 확인, 제1군단 사령관 부관과 연결하겠습니다.”


쇼콜라가 고개를 숙인다.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다시 들자, 그녀 입을 통해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통신 보안. 제1군단 사령관 부관 아르메 준위입니다. 쉬엔저 지엔 소위, 들리십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아르메 준위는 짧은 전술인형의 역사상 가든군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 전술인형이다. 그리고 인형으로서는 처음으로 위관 계급이 수여됐다. 비록 형식적인 것이었으나 그만큼 군에 세운 전공이 높기 때문에 제1군단 사령관의 부관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지내온 시간만큼 많은 군인들의 깊은 신뢰를 얻었다.


지엔이 까다롭다고 말한 건 바로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쌓은 인맥이다. 인형이 거짓말을 못하는 이상, 그가 한 말은 높은 언덕 위에서 쏟아버린 물줄기처럼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게 된다. 바닥은 방수 코팅 처리가 돼 있어서 말 한 마디도 빠지지 않을 거다.


즉, 말조심을 해야 하는 상대다.


“통신 보안. 호출 받은 제3군단 특무부 소속, 쉬엔저 지엔 소위입니다. 수신 양호합니다. 말하십시오.”


[작전에 관해 설명을 요청했기에 직접 통신을 연결했습니다.]


아, 그러시군. 왜 사람이 나서지 않고? 라는 말은 옆으로 밀어두고, 지엔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하십시오.”


[그랜트 흄 소위를 직접 만났습니까?]


“현지 세력과 마찰이 있습니다만, 확보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직접 조우하지는 않았습니다.”


[15분 전에 그랜트 흄 소위로부터 비블라인의 기습 공격이 있었음을 보고받았습니다.]


지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그렇다면 이미 증원 요청을 받았다는 얘긴가? 그는 당연히 그랬을 거라 추측한 후, 대답을 신중하게 골랐다.


“알겠습니다. 내 임무는 무엇습니까?”


[바로 그 임무 때문입니다만, 앞서 사령부에서 전달한 것과 마찬가지로 ‘화물’을 확보해 주십시오.]


아니, 지금 장난하나? 지엔은 쇼콜라를 향해 손끝으로 목을 긋는 동작을 취했다. 쇼콜라는 급히 통신 채널을 임의로 닫았다.


“그랜트 흄 소위 상태 체크, 코드1 상황이야?”


“제1군단 사령부에서 내려온 명령서를 검색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지엔이 열쇠를 잡고 돌리듯 검지와 중지를 모아 시계 방향으로 돌리자 쇼콜라는 다시 통신을 연결했다.


“재송신 바랍니다. 현장에 비블라인의 전자전으로 짐작되는 통신 방해가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련하군. 혹시 지금 나 혼자 쉐도우복싱을 하고 있는 건가? 지엔의 이마에 떠오른 주름살이 깊은 골짜기를 형성한다. 지엔은 앞서 말을 다시 반복했다.


“재송신 바랍니다.”

[지엔 소위. 상대의 속내를 떠보는 게 제3군단의 기본 소양임을 자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솔직해져야 하나? 지엔은 잠시 특무부 사무실에서 암호문으로 작성된 끝없는 서류의 파도를 헤쳐 나가며 욕설을 숨처럼 내뱉고 있을 자신의 선배들을 떠올렸다. 휴가를 받아오자 차라리 병가를 쓰라며 계단에서 밀려고 했던 도깨비들이다. 몸 어딘가에 뿔을 숨기고 있을 그 인간들의 웃는 낯짝을 떠올리자니 ‘솔직함’을 지옥에 던져 놓고 휘파람을 불며 뒤돌아 나올 수가 있었다.


필요하다면 혓바닥에도 도깨비의 뿔을 달아라. 그게 제3군단의 기본 소양이다.


“자꾸 ‘화물’을 확보하라는데, 구체적으로 말해 주십시오. 그랜트 흄 소위를 포박해 제1군단 사령부로 출두시키란 얘깁니까?”


[아닙니다. 문장 그대로 화물을 가지고 오면 됩니다.]


이게 뭔 소리지? 그는 잠깐 옆의 허공을 쳐다보며 고민했다. 내가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나? 아니면 저 고명한 전술인형이 단어 공부를 잘못했나?


[지엔 소위, 헛갈리는 듯하여 다시 통보하겠습니다. 지엔 소위에게 내려진 명령은 화물 확보입니다. ‘머리가 가장 중요하니, 머리만 가져와도 된다.’는 게 사령부의 의사입니다.]


지엔은 가시가 돋은 듯 까칠한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이 망할 인형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머리? 사람 머리? 지금이 뭐 전란을 얘기하는 시대인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는 어투로 답한다.


“알겠습니다. 그랜트 흄 소위의 목숨은 신경 쓰지 마라는 얘기가 맞는지 확인 바랍니다.”


[정확합니다. 그랜트 흄 소위의 요청으로 귀관의 소대에 배치되어 있었던 전술인형 베즈마를 임시 소대원으로 차출했습니다. 접촉은 쉬울 것입니다. 전술소체의 공격을 받아 그랜트 흄 소위가 ‘안타깝게도’ 사망했다면 어쩔 수 없으나, 귀관의 소대가 손을 써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지금 전송하는 코드1 해제 암호를 입력하면 됩니다.]


제3군단의 특기라 할 수 있는 밑작업까지 해 두었다. 제1군단 사령부는 진심이다. 그렇게까지 머리가 필요하다고?


“궁금한 게 있으니 하나 묻겠습니다. 13사단 ...가든 플랜트에서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었길래 제1군단까지 관여하는 겁니까?


전술인형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정보 보안 등급에 따라 언제 제1군단의 뒤통수를 쳐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게 헛수고이며, 가든 플랜트의 미움만 받는 짓거리라면 즉시 포기하고 제3군단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제1군단 사령부에서는 ‘남쪽을 수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판단합니다.]


이런 젠장할, 뒤통수 정도가 아니라 목을 쳐야 하는 수준의 얘기가 됐네.


작가의말

추석 잘 보내고 계십니까.

이번 주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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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6. 혼자만의 전쟁 (8) 20.12.05 18 0 25쪽
39 2-6. 혼자만의 전쟁 (7) 20.11.28 11 0 19쪽
38 2-6. 혼자만의 전쟁 (6) 20.11.21 14 0 19쪽
37 2-6. 혼자만의 전쟁 (5) 20.11.14 18 0 19쪽
36 2-6. 혼자만의 전쟁 (4) 20.11.07 16 0 20쪽
35 2-6. 혼자만의 전쟁 (3) 20.10.31 12 0 19쪽
34 2-6. 혼자만의 전쟁 (2) 20.10.24 49 0 20쪽
33 2-6. 혼자만의 전쟁 (1) 20.10.17 14 1 20쪽
32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5) 20.10.10 14 1 21쪽
»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4) 20.10.03 16 0 23쪽
30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3) 20.09.26 13 1 19쪽
29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2) 20.09.19 19 0 19쪽
28 월간 BB 소대 - 인류는 질병 면역을 꿈꾸는가 20.09.13 13 0 11쪽
27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1) 20.09.12 12 0 16쪽
26 2-4. 가장 깊고, 가장 높고 (2) 20.09.06 14 0 11쪽
25 2-4. 가장 깊고, 가장 높고 (1) 20.09.05 15 0 13쪽
24 2-3. 술래잡기 (2) 20.08.29 20 0 23쪽
23 2-3. 술래잡기 (1) 20.08.22 23 0 18쪽
22 2-2. 닥터 마고스 (1) 20.08.15 23 0 19쪽
21 2-1. 이름 없음 (7) 20.08.08 23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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