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ri**** 님의 서재입니다.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전쟁·밀리터리

완결

riekun
작품등록일 :
2020.05.04 18:35
최근연재일 :
2020.12.05 13:30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1,283
추천수 :
23
글자수 :
306,495

작성
20.08.15 12:27
조회
23
추천
0
글자
19쪽

2-2. 닥터 마고스 (1)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DUMMY

2-2. 닥터 마고스 (1)


디닝 던 그레이엄. 인간이 가진 상상력과 과학과 기술력을 총 동원하여 만들어 낸 유사 인류의 프로토타입이었던 ‘인형’을 현 세대까지 발전시키고 개수한 천재. ...어긋난 천재.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걸 포기하고 결국 죽어버린 멍청한 제자.


바네트 비샤. 인형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뇌연구자. 인형의 운영체제인 딥마인드와 개성이라 부를 수 있는 인격 모델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한 바보 제자. 어긋난 천재를 사랑한다고 멋대로 착각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가랑이가 찢어져 제자리에 주저앉은 바보 제자.


다다닥, 다다닥, 다다닥, 닥.

닥터 마고스는 리듬을 타며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녀석들 머리카락이 무슨 색이었더라. 섞어도 녹색은 안 나올 거 같았는데.


“내가 몇 개월 전에 연락했을 때만 해도 머리카락 색이 달랐던 거 같은데...”

그러자 모니터 안의 여자, 닥터 D. D.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누님. 누님이라고 불러야지.]


닥터 마고스. 올해로 일흔두 살이다. 슬하를 떠난 자녀가 둘이 있고, 간간이 연락하는 종달새 같은 귀여운 손자 손녀를 모두 합하면 넷이 된다. 한때는 수십만 명의 직원이 근무했었던 아이드라중공의 회장이었으나, 지금은 은퇴하여 자신의 개인 연구소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하... 그 웃기지도 않았던 내기에 이겼다고 주장할 생각이냐? 어림도 없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으니 이 누님의 말대로 은거하던 연구소에서 빠져나와 주벤에샤로 간 거 아니었니? 귀여운 동생아.]

“...비레스, 좀 덥구나.”

“예, 주인님. 온도를 낮추겠습니다.”


마고스가 더위를 느끼거나 말거나, 닥터 D. D.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신의 용건을 계속 이야기했다.

[나를 대신해 에이전트를 하나 보냈어.]

“에이전트? 네 실험체의 뇌와 연동했다던 전술인형을 말하는 거냐?”

[L. L.은 새로운 소체에 복원 중이야. 마침 적당한 소체 하나가 손에 들어와서 그걸 비행기 편으로 보냈어. 별 문제 없다면 오늘 밤이나 내일쯤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


닥터 마고스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인 골짜기들이 많았고, 그녀의 말 때문에 그 골짜기들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인형이 여기까지 혼자 올 수 있다고?”

그의 물음에 닥터 D. D.는 그저 웃기만 한다.


마고스는 저 아이, 닥터 D. D.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고 있었다. 멍청이 하나와 바보 하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닥터 마고스가) 판단하기에 사랑의 결실이 아닌, 불법적인 실험에 필요해서 낳은 합법적인 아이다. 가장 많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했던 유년기를 집에 달라붙어 있는 인공지능과 함께 보냈고, 유년기가 지난 시점에서 뇌 수술을 받았다.


진료 기록에 따르면 뇌 종양 제거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그 수술을 집도한 이는 바네트 비샤의 친구였다. 아이는 2년마다 정기적으로 교정 수술이 필요했고, 수술과 재활이 거듭되는 그 혹독한 시간을 아이는 부모가 아닌 인공지능과 함께 견뎌 냈다. 단언하건대 닥터 D. D.는 인간보다 인형을 더 믿을 것이다.


아무리 인형을 믿어도 그렇지, 인형은 혼자서 여행할 수 없다. 디데이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 시대의 여행에는 변수가 너무도 많다. 게다가 주인이 곁에 없는 인형은 걸어다니는 귀중품과 마찬가지다. 치안이 훌륭한 도시에 도착했더라도 반인형단체들에게 10분도 지나지 않아 납치당해 분해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무튼 동생은 내가 부탁한 것만 제대로 해 주면 돼.]

닥터 마고스는 고개를 돌려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간이 작업실 끄트머리에 세워져 있는 소체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속옷만 입혀져 있는 소체 하나가 있다. 최근에 만든 작품이었다.


“네가 주문한 대로 최신작을 가져오긴 했는데, 합당한 대가를 치를 수 있을지 의문이군. 설마 내가 돈을 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머, 공짜로 해 줄 거야? 역시 동생밖에 없네.]

“...농담하는 거 아니다. 제값을 낼 수 없다면 저 소체는 절대 내줄 수 없다.”

[왜, 버릇이 나빠져서?]

“비슷하다고 해 두지.”


[걱정하지 마. 난 동생이 어째서 바깥일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애쓰는지도 잘 알고 있고, 그러면서도 내 부탁을 받아들여 거기까지 기를 쓰고 간 이유도 알고 있으니까. 아까 말한 에이전트가 저장장치 하나를 건네줄 거야. 거기에 동생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넣어두었어. 군 정보망에서 빼낸 거니까 신뢰도는 꽤 높을 거야.]


“...먼저 살펴봤나?”

닥터 D. D.는 고갤 가로저었다.

[파일을 열람하면 자동으로 군 정보부에 신호가 가게 돼. 무슨 말인지 알지?]

“내 연구소에서 뜯어봐야겠군. 그나저나 그 인형이 나를 찾아낸다고 하자. 그럼 나는 그게 네가 보낸 인형이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지?”


[그건...]

닥터 D. D.가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마고스는 잠깐 전파 방해나 모니터의 고장을 의심했다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비레스가 두 눈을 감은 채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지? 디나미가 돌아왔나?”

“아닙니다. 닥터 D. D.께서 말씀하신 인형이 트럭 앞으로 달려오는 걸 발견했습니다. 지시를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디나미의 신호는?”


비레스는 고개를 살짝 든 후 좌우로 머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마치 안테나가 신호를 감지하는 듯한 모습이다.

“신호 감도는 양호, 발신되는 신호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뭔가 조우한 모양이군.”


[군 전술인형일 거야.]

마고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는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서 모니터를 쳐다봤다. 닥터 D. D.는 여전히 생기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다.

“이런 미친... 군이 개입했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흄 소위를 데려다가 해부해 보고 싶은 기업의 어느 높으신 분이겠지. 정식으로 개입한 건 아니야.]

정식이 아니라는 말에 놀랐던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마고스가 이번 외출에 데리고 온 두 인형, 디나미와 비레스는 민수용 규격을 넘어선 성능을 갖추고 있다. 군에 파악될 경우 강제 수거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


“특무부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가?”

[아마도. 어느 군단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벤에샤는 비블라인과 국경선이 가깝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도시야. 피난민과 제대 군인들이 자리 잡지 않았다면 그냥 깡촌이나 다름 없는 곳이지. 제1군단이 움직일 리는 없어. 다른 군단이 정식으로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다면 내가 모르지는 않았겠지. 이렇게 직접 올 일도 없고.”


[그렇다면 오히려 파악하기 쉽겠네. 근처에 있는 예비부대 명단을 뽑아내면 되는 거잖아. 구해 줄까?]

마고스는 고민에 빠졌다. 이 도움을 받았을 때 닥터 D. D.에게 피해가 있는가. 이 도움을 받는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 갚아야 하는가. 반대로 이 도움을 거절했을 때 내가 입을 수 있는 피해는 무엇이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은 또 무엇인가. 지난 세월 동안 축적한 경험을 통해 산출할 수 있는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비교해 본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건 어느 쪽도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수십 억의 인구수를 자랑하던 인류가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분류한 잿병과 대양의 섬나라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감염체를 통제하지 못한 채 멸망 직전까지 갔으리라고 누가 짐작하고 예상했겠는가. 그 때문에 인간의 도우미를 자청한 인형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했고, 지금은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 탈바꿈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병에도 자유롭고, 감염체의 공격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인간의 정신을 이식할 수 있는 완전체.


세상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어째서 잿병이 발생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감염체가 인형을 공격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밝히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인간은 그 긴 세월 동안 쌓아온 존엄성을 버리고 자신들이 창조한 인형으로 도망가려 한다.

“닥터 마고스!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어! 내 소체를 받으러 왔어!”


인간 혐오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컨테이너 밖에서 다급함이 잔뜩 들어가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밤새도록 꿈속에서 헤매고 돌아온 느낌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피로감을 곱씹으며 닥터 마고스는 오른손을 들었다. 비레스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걸어가 간이 작업실의 출입문을 개방했다.


[일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동생 회사에서 개발한 장비 중, C타입 외골격 챙겼어?]

“ABC 중에서 왜 그걸 C라고 하겠나. 디자인이 씨발이니까 C지.”


뭐가 좋은지 깔깔깔 웃는 마고스를 보며 닥터 D. D.는 혀를 찼다.

[...난 진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소체 조정 끝나면 그걸 장비해 줘. 추가 비용은 지금 보내는 제3군단 특무부 파견소대 데이터로 대신할게.]






디나미가 찾으라고 말한 화물트럭을 발견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B. B.의 구역에 정식으로 거주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고, 이곳을 드나드는 인간이나 인형, 그리고 차량 또한 제한적이다. 게다가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크기의 화물트럭이라면 지나갈 수 있는 도로나 주차장도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굳이 그 장소들을 모조리 찾아볼 필요는 없었다. 화물트럭은 건물의 입구를 막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주차되어 있었다.


컨테이너를 왼손으로 두들기려던 필리아는 좌우 대각선 끄트머리 모서리 부분에 설치된 카메라를 확인하고는 동작을 멈췄다. 대신 소리를 질렀다.

“닥터 마고스!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어! 내 소체를 받으러 왔어!”


오른팔을 움직일 수 없다. 오른손이 예리한 무언가에 뎅강 잘려 나간 순간부터 감각을 비롯한 전력과 회로를 모두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절단된 혈관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배터리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소진되고 있다. 인간처럼 쇼크가 찾아오진 않겠지만 누전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표시된 배터리 잔량을 함부로 믿을 수 없다. 언제 전원이 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짧은 침묵조차 불안했던 순간, 아주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디나미인가 싶었으나 외길에서 그녀가 자신을 앞질렀을 리가 없다. 필리아는 컨테이너 안에서 나온 목소리가 디나미와 동일 기종일 거라 추측했다.


“주벤에샤 BB소대의 필리아. 닥터 D. D.의 소개를 받았고, 닥터 마고스의 인형인 디나미에게서 이곳으로 오라는 얘길 들었어.”

“지금 출입문을 개방하겠습니다. 조금만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컨테이너의 중앙 부분에 선이 그어지듯 안쪽의 빛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면서 출입문의 윤곽이 드러난다. 문은 살짝 들리더니 소리도 내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옆으로 밀린다. 컨테이너에서 계단이 내려왔다. 그러나 올라갈 수 없었다. 빛을 등진 채 메이드 복장을 갖추고 있는 인형이 손에 든 샷건의 총구를 필리아에게 겨누고 있다. 어느 노인의 목소리가 그녀의 등 너머에서 흘러나온다.


“ICP-50 시리즈로군. 묻겠다. 가동 시간을 밝혀라.”

왜지? 라고 생각한 순간, 딥마인드에서 강제 명령이 내려왔다. 저항할 수가 없었다. 필리아는 자신의 입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목소리를 들었다.


“2081일 12시 13분이 지났습니다.”

“5년이 지났군. 최근에 받은 소체 정비는 언제인가?”

“1620일 23시간 01분이 지났습니다.”


“호오, 이놈 봐라? 탈주한 인형이로군. 그래, 껄껄. 디 녀석이 어째서 내게 부탁한지 이제야 알겠군. 요놈 재밌네. 다시 말해 봐라. 어디 소속이었지?”

“아이드라중공, 호론 연구소 제1종 화기실험실 소속입니다.”

“비네스. 이 녀석이 말한 시점을 기점으로 검색을 실시한다. 그 시간을 전후로 1년 사이에 호론 연구소에서 사라진 인형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그 사이에 폐기된 인형이 있느냐?”

“...예.”

“그중 ICP-50 시리즈가 있고?”

“예. 폐기 및 재활용 처리 대상으로 결정된 인형 13기 중 1기가 ICP-50 시리즈와 동일합니다.”


“껄껄껄. 정말로 연구소에서 도망친 인형이군.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 아, 그렇지. 이제 말해도 된다.”

허억, 허억, 허억.

필리아는 제자리에 주저 앉아 오른손을 들어 입안으로 넣으려다가, 자신의 오른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린 입에서 갓난아이처럼 액이 질질 흘러나온다. 마치 기도가 막혀 공기 중에서 질식사를 한 듯한 경험이었다. 눈앞에 하얀 천이 내밀어진다.


“닦으시죠.”

“...필요 없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소매로 입가의 침을 훔치고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메이드 복장의 인형을 쳐다봤다가, 필리아의 딥마인드가 반응하지 않고 침묵하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덮쳤을 때의 디나미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이었다. 팔꿈치 아래 부분까지 덮는 긴 장갑이 없다는 게 다를 뿐 복장은 물론이고 스타일이나 형태까지, 하나하나가 완전히 똑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필리아를 노려보는 붉은색 렌즈. 과부하 상태다.


“주인님께 무례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닦으십시오.”

“끌끌. 됐다. 어차피 버릴 몸, 깨끗하게 정돈해서 뭐에 쓰겠다고. 올라와라.”

붉은색이 꺼지면서 적갈색 눈동자로 돌아왔다. 그러나 디나미와 다르게 표정이 무척 차갑고 쌀쌀맞다. 하지만 비레스는 얌전히 옆으로 비켜섰다. 슬쩍, 샷건을 등 뒤로 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닥터 마고스를 따라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서자 과도한 조명 탓에 살짝 눈이 부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눈 안에 한가득 들어온 최첨단 설비들을 발견한 필리아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컨테이너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머리 부분이 비어 있는 소체 한 기도 발견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느낌을 알 듯했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의자에 앉아 있는 닥터 마고스의 질문에 필리아는, 필연적으로 조금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딥마인드에서 내려온 강제 명령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수십 개의 바퀴벌레 다리가 꿈틀거리는 구멍 속에 억지로 손을 집어넣는 느낌이 아니라, 마른 걸레의 물기를 쥐어 짜서 4리터의 물통을 채워 넣으라는 정신적 압박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짐작은 하고 있는데, 그건 말이 안 돼.”

호오. 닥터 마고스가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린다.

“어째서?”

“내가 알고 있는 그 인간은, 반인형단체의 우두머리와 같아. 하지만 당신은 인형 조율사잖아.”


“네 녀석의 말은, 숲을 사랑하는 자의 직업이 나무꾼이어서는 안 된다는 얘긴가?”

“어?”

“아니면 쓰레기를 혐오하는 자는 환경미화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뭔가 반박하기에 애매한 예시였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생각나지 않자 필리아는 혓바닥 위에 굴리고 있었던 이름을 꺼냈다.


“내 딥마인드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인지하지 못한 코드가 논리 회로에 개입했어. 그걸 근거로 유추하자면 당신의 이름은 아이드라 본 파르엘디어. ‘인형에게 인격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인형의 자유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등의 반인형주의적 발언으로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켜 아들에게 회장 자리를 빼앗긴 인간이야.”


“껄껄. 네 딥마인드 수준이 내 아들 녀석보다 낫구나. 하지만 그것도 필시 누군가가 입력한 정보겠지.”

필리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의 말이 정답이다. <월간 BB소대>의 기자 등록을 하면서 받은 정보의 바닷속에 있는 조개 껍질 중 하나였다. 방금 필리아가 보인 추리는 가지고 있는 정보 중에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들을 추려서 얻은 결과물이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다를쏘냐.


닥터 마고스는 깍지를 낀 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채 말한다.

“난 반인형주의자 같은 게 아니다. 그저 인형을 유용한 도구라 생각하는 기술자일 뿐이지. 도구에는 애정을 쏟을 수 있다.”

깍지를 풀고 왼손을 들어 뒤집으며 말을 잇는다. 필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한다.


“애정을 가지고 관리한 총은 주인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니까. 반대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총은 중요한 순간에 기능 고장을 일으키거나 폭발하기도 한다. 주인을 해치는 경우지. 고로 난 인형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다. 좋은 인형일 경우에는 말이지. 그렇다면 너는 좋은 인형이더냐?”


그의 손바닥 위에 착한 필리아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다. 잠깐. 필리아는 숨 쉬는 행동마저 멈추고 모든 연산을 딥마인드에 집중시켜 사고한다. 착하다는 것과 좋다는 것은 달라. 저 인간은 지금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건가?

“당신은... 내게 소체만 제공하면 되는 거 아니야?”


“저건 내 작품이다. 내가 공들여 만든 애장품이지. 남에게 부탁을 받아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다. 애초에 네놈들에게 약속한 건 닥터 디 녀석이지 내가 아니잖나?”


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억울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놀림을 당하고 있다. 나를 장난가 취급하고 있어. 그녀는 왼손을 들어 검지 손가락 마디를 깨물었다. 이 인간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온갖 말을 지어 내야 한다는 게 싫다. 애초에 인형은 거짓말을 할 수도 없잖아. 바로 너희들이...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검지 손가락 마디를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음?”

그녀가 고개를 들어 인간을 주시한다.


“뭐가 좋은 인형인지는 몰라. 난... 나는... 호론 연구소에서 도망친 것도, 하수도 밑바닥을 전전하면서 연명을 포기하지 않은 것도, 오늘 내일 하는 몸을 이끌고 대륙의 북부 끄트머리까지 와서 BB소대에 들어간 것도, 지금 당신 앞에 선 것까지 모두 한 가지 생각에서 비롯된 거야. 난 계속 살고 싶어. 그 외에 다른 건 몰라. 그러니 머리 아픈 얘기 그만하고 저 소체나 이식해 줘. 아직 끝나지 않은 계약이 있어.”


마고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의 인형을 찬찬히 바라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건 씨앗이 아니라 이미 새싹 단계였다. 바보 제자가 뿌려 놓은 씨앗 중 하나가 메마른 대지 위에서 발아하고,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땅바닥 위에서 말라 죽지 않고, 땅속으로 뿌리를 더 깊게 내려 갈증을 해소할 물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 불씨였다.


작가의말

이번 주는 여기까지입니다.

장마가 끝났더니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0 2-6. 혼자만의 전쟁 (8) 20.12.05 18 0 25쪽
39 2-6. 혼자만의 전쟁 (7) 20.11.28 11 0 19쪽
38 2-6. 혼자만의 전쟁 (6) 20.11.21 14 0 19쪽
37 2-6. 혼자만의 전쟁 (5) 20.11.14 18 0 19쪽
36 2-6. 혼자만의 전쟁 (4) 20.11.07 16 0 20쪽
35 2-6. 혼자만의 전쟁 (3) 20.10.31 12 0 19쪽
34 2-6. 혼자만의 전쟁 (2) 20.10.24 49 0 20쪽
33 2-6. 혼자만의 전쟁 (1) 20.10.17 14 1 20쪽
32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5) 20.10.10 14 1 21쪽
31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4) 20.10.03 16 0 23쪽
30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3) 20.09.26 13 1 19쪽
29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2) 20.09.19 19 0 19쪽
28 월간 BB 소대 - 인류는 질병 면역을 꿈꾸는가 20.09.13 13 0 11쪽
27 2-5. 구르고, 부수고, 달리고 (1) 20.09.12 12 0 16쪽
26 2-4. 가장 깊고, 가장 높고 (2) 20.09.06 14 0 11쪽
25 2-4. 가장 깊고, 가장 높고 (1) 20.09.05 15 0 13쪽
24 2-3. 술래잡기 (2) 20.08.29 20 0 23쪽
23 2-3. 술래잡기 (1) 20.08.22 23 0 18쪽
» 2-2. 닥터 마고스 (1) 20.08.15 23 0 19쪽
21 2-1. 이름 없음 (7) 20.08.08 23 0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