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채흔비설 님의 서재입니다.

미치게 끌려

웹소설 > 작가연재 > 로맨스, 중·단편

완결

채흔비설
작품등록일 :
2022.02.22 13:34
최근연재일 :
2022.06.06 17:18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12,407
추천수 :
302
글자수 :
34,616

작성
22.02.22 14:00
조회
1,536
추천
10
글자
19쪽

1화.

DUMMY

“10분 후에 촬영 들어갑니다.”


스텝의 알림에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 서양의 드레스보다 우아하고 빛 고운 한복드레스를 입고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아름다운 자태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모델을 꾸미고 있던 메이크업과 헤어, 의상을 담당하는 스텝들도 눈과 손길이 더욱 분주해졌다.




“이 정도면 완벽해.”


“앗. 선생님 오셨어요?”


“오셨습니까.”


한복을 곱게 입은 인자하고 기품있어 보이는 지긋한 나이의 여자가 대기실로 꾸며 놓은 한옥 방에 들어서자 거울 앞에 앉아 있던 한복드레스를 입은 모델과 스텝들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역시. 이번에도 기대 이상이야. 메이크업이랑 헤어도 딱 그 정도가 좋아. 우리 모화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매력이라.”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담모화 씨는 꾸미지 않고 그냥 찍어도 바로 작품인데. 선생님 옷을 입으니 어후... 선녀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다면 그냥 담모화 씨 사진 보여주면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 거예요. 그쵸.”


오늘 이곳 안평재에서 촬영하게 될 한복드레스 화보 촬영 총책임자인 이경진은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한복디자이너 홍자희에게 한껏 들뜬 얼굴로 콧소리까지 섞어 기분 맞추는데 열을 올렸다.


“선생님. 날도 어떻게 딱 맞춰 잡으셨어요. 자목련 백목련, 거기다 안평재의 자랑인 매화, 홍매화까지 흐드러지게 만개해 이 한옥 주인이신 해천그룹 박 회장님 바람대로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네요. 정말 그림 같은 곳에서 그림 같은 최고의 예술 작품 나올 것 같아요. 호호홍.”


선생님의 한복드레스가 뛰어난 것을 찬양함과 동시에 담모화의 모습을 예술 작품처럼 승화한 제 능력을 알아 달라, 인정해 달라는 뜻도 슬쩍 담았다.


홍자희는 이경진에게 온화한 미소만 건네고는 걸음을 옮겨 양손을 맞잡고 긴장된 얼굴로 저를 보고 서 있는 담모화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면서 다른 한 손으론 탐스러운 긴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감탄 섞인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옷은 담모화 네가 다 살렸다. 고맙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아니에요. 선생님 실력이 훌륭하셔서 오히려 제가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자희의 칭찬에 한복드레스라 한복보다는 서양의 드레스처럼 풍성함이 더해진 하늘을 담은 듯한 쪽빛의 아름다운 치마와 새하얀 속살이 예쁘게 드러난 흰 시스루 저고리를 입은 모화의 두 뺨이 열어 놓은 방문 너머 눈꽃처럼 흩날리는 홍매화처럼 붉게 물들었다.


“전문 모델도, 유명 배우도 아닌 제가 선생님 작품에... 더구나 이번에는 특별히 미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이태리 패션쇼를 앞두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게 될 카탈로그와 화보 촬영이라고 해서 부담감이 너무 커 이번만큼은 안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화 많이 났었잖니. 그렇게 중요한 거니까 담모화 네가 입고 촬영해줘야 하는 거잖아. 내 옷들이 이리 알려지게 된 게 다 네 덕분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이미 선생님은 유명하신 분이시고 저야 3년 전에 그냥 우연히 그날 사고로 촬영 펑크 내신 모델분 대신 대타로 급하게 대신 촬영했던 것뿐이고 지금까지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네가 네 절친 시현이랑 어릴 때부터 붙어 다닐 때 내가 눈독 들였었잖아. 크면 내 한복 입어달라고. 죽어도 하길 싫다길래 수옥이한테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부탁했었는데. 너 좀 꼭 꼬셔 달라고. 그리고 인연이 되려니 그날은 물론이고 쭉 함께 한 거잖니.”


수옥이는 아기 때부터 절친인 정시현의 할머니 이름이다.


최수옥은 담모화 아버지와 같은 시장에서 떡집으로 건물을 몇 개나 사들인 유명한 한복디자이너 홍자희 선생 못지않은 이름난 떡집 사장이자 홍자희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선생님도 참. 제가 뭐라고.”


“예술하는 사람들은 뮤즈 뭐 그런 거 있다며. 나한테는 담모화가 뮤즈였어. 더는 한복 만들기가 싫어져 다 접고 싶었던 인생 최대의 고비. 그런 때가 있었는데 우연히 수옥이 떡집에서 시현이랑 일 돕고 있던 널 보고 심장이 내려앉았었지. 경진이 말처럼 선녀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야. 한순간에 정신없이 내 눈과 마음을 끌어당겼었어.”


“하아... 선생님도 참. 부끄럽게.”


자희의 말에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모화 네 얼굴. 지금 저 홍매화보다 더 붉다. 붉은데 참으로 이뻐. 저 꽃들보다.”


“어후... 선생님. 그만 하세요.”


“오늘은 하늘까지 우릴 돕나 보다. 저 꽃들이 개화 시기가 다 달라 이런 풍경 만들어 내기 힘든데 신기하게 딱 맞춰 아름답게 만개한 걸 보니. 하아... 그 녀석까지 함께 해줬다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그 녀석이라니요?”


“이 한옥 별장, 안평재의 주인 해천그룹의 회장이자 또 다른 내 절친인 박은자의 외손주.”


“아... ”


“역사에 유독 관심 많은데다 안평대군을 흠모해서 그분 생전의 별장이셨던 이곳 부암동에. 똑같이 한옥 별장을 지었는데 이름까지 그대로 따라 안평재라 짓고. 그런데 신기하게 그 친구 외손주가 딱 안평대군을 닮지 않았겠어. 의젓하고 인품은 물론 뛰어난 머리에 남녀노소를 구분 없이 감탄이 절로 나게 하는 외모며 빛나는 아우라까지. 이곳 안평재 분위기와 내 옷들과도 정말 완벽하게 어울리는 인물인데...”


온화한 이미지와는 달리 깐깐하고 대쪽 같은 성격이라 평소엔 말도 아끼는 데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갑자기 박 회장의 외손주를 입에 올리더니 술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모습 자체가 모화는 낯설기만 했다.


“지금 뉴욕이 아니라 한국에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구슬려 카메라 앞에 세웠을 거야. 모화 네 옆에 있으면 완벽한 그림이 됐을 녀석인데 참으로 아까워.”


“뉴욕에요?”


“3년 전에 뉴욕으로 유학 갔거든. 가기 전에 내 옷 입혀서 사진 한번 찍으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소정이가 하도 난리를 쳐서. 아. 그 녀석 엄마. 성질이 보통이 아니거든. 재벌가 아들 얼굴 쉽게 알려지면 안 된다고... 에휴. 다시 생각해도 참 아쉽구나.”


“아... 네,”


“그러고 보니. 모화 너. 지금 25살이지?”


“네.”


“나이도 동갑이네. 그래서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욕심이 났나. 아무튼. 다음에 한국 들어오면 꼭 너랑 사진 촬영 한 번 하자꾸나. 너도 보면 분명 마음에 들 거야. 오늘 다시 모화 너를 보니 두 사람 맺어주고 싶은 욕심도 나네.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찰나의 순간. 떠올리기 싫었던. 떠올리면 안 되는 누군가가 생각나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왜 그 녀석을 떠올려.


동갑인 남자가 한둘도 아닌데.


요즘 대한민국에 안평대군 능가하는 잘나고 대단한 남자들 얼마나 많은데.


모화는 티 나지 않게 심호흡하며 애써 미소를 짓고는 자연스럽게 불편한 얘기를 끊고자 했다.




“어휴, 선생님. 사적인 만남은 거절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촬영 안 도와드릴 거예요.”


“넌 꼭 누구 이어주겠다면 발끈하더라. 친손녀 같은 마음으로 잘 됐으면 해서.”


“마음만 감사하게 받을게요. 지금 연애는커녕, 살기도 벅찬 거 아시면서.”


“알았다. 알았어. 대신 우리 모화 나중에 결혼하면 꼭 내 손으로 한복 웨딩드레스 만들어줄게. 선물로. 이곳 안평재, 그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연월정 앞에서 식 올리자. 회장님께는 내가 부탁할 테니. 결혼식은 무조건 나한테 맡겨. 돌아가신 네 엄마 대신 내가 부모님 자리에 앉아 있어 줄게.”


모화는 방문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한눈에 들어오는 동양화 한 폭에 담겨 있는 듯한 아름다운 운치의 연못과 정자. 그 주변으로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색색의 목련꽃들과 매화꽃들. 그리고 바람결에 날리는 꽃들.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이곳에서 지금 입고 있는 감탄이 절로 머금어지는 우아한 한복드레스 같은 한복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봄날의 눈부신 신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늘 불행하고 슬픈 일만 겪으며 살아온 자신한테 그런 행복한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찰나의 순간, 그 꿈같은 행복한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는데 저도 모르게 일순 눈앞이 흐려졌고 눈가가 촉촉해지자 모화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냐. 그저 봄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그래. 눈부셔서 눈물이 났던 거야.



*


인왕산 아래 부암동에 자리한 한옥 별장 안평재로 향하는 차 안에는 두 남자가 차창을 활짝 열어 놓고 공기를 들이마시며 봄을 만끽했다.


“와우. 뉴욕의 빌딩 숲 냄새랑 인왕산 숲 냄새는 차원 자체가 달라. 비교 금물. 역시 내 나라, 내 고향 공기, 냄새가 최고다. 그치. 강후야.”


강후는 대답 대신 차창을 바라보며 3년 만에 이곳 부암동 풍경을 눈에 담았다.



“강후야. 우리가 복이 있나 봐. 실장님 얘기로는 그저께부터 목련꽃들까지 활짝 만개했다더라. 안평재하면 매화. 특히 홍매화가 운치 죽여주는데 거기다 목련에 자목련까지 피었으니 끝내주겠지.”


안평재로 향하는 동안 강후는 눈부신 햇살 아래 반짝이는 봄 풍경을 바라보다가 우형의 매화꽃 얘기에 지그시 눈을 감아 추억을 떠올렸다.



‘강후야. 매화꽃 너무 너무 아름답다. 그치.’


‘모화 넌, 왜 벚꽃보다 매화꽃을 더 좋아해?’


‘매화꽃이 깊이랑 운치가 더 느껴져서. 꼭 사연을 담은 것처럼... 그래서 때론 슬프게 와 닿기도 하고.’


‘담모화 너처럼?’


‘...응?’


‘아름다운데 감히 손조차 함부로 댈 수 없을 만큼 눈부시도록 너무나 아름다운데. 왠지 모르게 그 안에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은...’


‘강후야.’


‘그래서 내가 품고 싶어져. 더 이상 슬픔이 아닌 행복으로 활짝 피어나게 미소 짓게 해주고 싶다고.’



이제는 좀 달라졌을까.


25살의 담모화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이제 그늘이, 슬픔이 아닌 미소가 행복이 채워져 있을까.


“강후야. 다 왔다.”


우형의 들뜬 목소리에 강후가 눈을 떴다.


눈앞엔 으리으리한 아흔아홉 칸의 고택을 연상케 하는 드넓은 한옥과 대문 위에 떡하니 위엄을 자랑하듯 명필가의 솜씨로 만들어진 [안평재]라는 한문으로 쓰여 있는 명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채강후의 외할머니인 해천그룹의 박은자 회장은 역사에 애정과 관심이 넘쳐흐르는 데다 역사 속 인물이기도 한 비운의 왕자 안평대군을 너무도 흠모하여 이곳 인왕산 자락 아래 안평대군이 선비들과 함께 글을 읽고 시를 썼다는 그의 별장이었던 무계정사 터 근처에 20년을 기다려 땅을 다 사들이고 그가 재현하고자 했던 무릉도원을 그녀도 재현하고자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자신만의 무릉도원 안평의 이름을 딴 [안평재]라는 한옥 별장을 만들어 냈다.


박회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문에서부터 주인을 그대로 닮았구나, 인정할 정도로 와닿는 분위기가 한옥, 단순한 집이지만 기품과 위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주변에는 안평재 뿐만 아니라 박은자 회장과 같은 마음에서인지 또 다른 유명인의 한옥 별장은 물론 이미 더 오래전에 지어진 흥선대원군이 사랑했던 별장 석파장을 비롯, 이름난 미술관들과 유명한 한정식집, 카페들이 산수화를 떠올리게 풍경들을 벗 삼아 자리하고 있었다.


우형은 자주 왔던 곳이지만 이번엔 3년 만의 방문이라 그런지 다시금 새롭게 느껴져 감탄을 연발했다.


“회장님 안목 죽여준다니까.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강후도 같은 마음이다.


이곳에 있으면 잠시나마 모든 걸 잊고 꿈속에 있는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따금 숨이 막혀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아 고통스러울 때, 심한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을 때 이곳 안평재로 도망쳐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숨도 쉬어지고 거짓말처럼 두통도 사라졌다.


그래서 가끔은 그냥 세상과 등을 지고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으면 그리고 곁에 사랑하는 그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는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욕심내지 않을 거라고 간절히 바란 적도 있었다.



강후는 오래전 그 생각들을 떠올리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절대로 내 욕심, 바람 같은 건 이루어지지 않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냥 채강후란 존재는 숨만 쉬고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거야.


어차피 이번 생은 글렀어.



“도련님 오셨어요. 아이고 이젠 완전히 어른 남자 다 되셨네요. 밤에 길에서 봤으면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쳤겠어요. 우형이 너도 몰라보게 변했다.”


3년 만에 다시 만난 채강후는 부드럽고 여리던 이미지는 낯선 사람들은 선뜻 말 걸기도 주저할 것 같은 날카롭고 강한 인상으로 변해 있었다. 또한 몸 역시도 뭔가를 잊으려 그동안 운동에 미친 듯이 매달렸는지 아이돌처럼 슬림했던 라인은 떡 벌어진 태평양 같은 어깨와 탄탄한 근육질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는 것을 비록 옷 속에 가려졌지만 감탄스러운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올 만큼 한눈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낯익은 목소리에 강후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정함과 온화함이 물씬 느껴지는 50대 중반의 여성이 반가운 얼굴로 대문을 열고 나와 강후와 우형을 반겼다.


그녀 뒤로 남자 직원 두 명이 따라 나와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는 강후와 우형의 캐리어를 들고 먼저 들어갔다.


“윤 집사님도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낮지만 부드럽고 멋진 목소리에 윤 집사의 입가가 저절로 호선을 그렸다.


“어휴. 이 멋진 목소리가 얼마나 그립던지. 그럼요. 저야 항상 한결같이 잘 지내죠. 도련님은 유학 생활 많이 힘드셨죠.”


“윤 집사님 걱정 많이 하실 것 같아서 제가 3년 동안 몸과 마음 바쳐 아주 잘 모셨답니다.”


“그래. 우형아. 너도 수고 많았다. 도련님. 오실 시간 맞춰 점심 준비해 놨으니 식사 먼저 하시죠.”


대문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안채가 아닌 그들이 지내게 될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대문 안 봄 풍경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워 빠르게 걷던 강후와 우형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고 주변을 둘러보는 얼굴엔 미소가 번져갔다.


“3년 만에 집밥 드시는 거라 신경 많이 썼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강후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감탄스러운 절경에 배고픔도 잊었다. 그냥 이대로 이 분위기에 취해 대청마루에 기대어 앉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과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잠시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참. 회장님께는 인사드렸죠?”


“제일 먼저 본가 들러 인사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께서 열흘 동안은 아무도 안평재에 들이지 못하게 할 테니 도련님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하시더라고요. 그나마 다행이에요. 회장님이라도 도련님 그리 챙기시니.”


“윤 집사님. 이곳에도 듣는 귀가 많습니다. 조심하세요.”


강후가 미간을 구기며 말을 끊었다.


“괜찮아요. 저는 본가 갈 일도 없고 도련님 8살 때 처음 만나 제 손으로 키우다시피 했는데... 쫓겨나도 미련 없고 원망 안 합니다. 그저 도련님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그러지 마세요. 저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불행해지는 거 보고 싶지 않습니다.”


“에휴.”


윤 집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안 되겠다 싶은지 우형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안채 쪽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네요. 아. 그러고 보니 주차장에 차들도 많던데. 강후야. 우리만 있는 거 아니었나?”


대문 안, 입구 마당을 지나 안채와 별채가 갈라지는 입구에서 두 남자 모두 190 가까이 되는 큰 키라 담장이 어깨 정도이기에 담 너머 안채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 참. 말씀드린다는 것이 깜빡했네요. 회장님 친우 되시는 한복디자이너 홍자희 선생님 아시죠?”


“네. 당연히 알고 있죠. 선생님 오셨어요?”


“네. 오늘 그분 한복, 화보집인가 뭔가 촬영한다고 아침부터 안채 쪽에 정신없어요.”


“회장님. 가족 외엔 안평재에 사람 들이지 않으실 텐데...”


믿기지 않는 듯 우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자희 선생님만 특별히 허락하신 거예요. 각별한 사이인데다 그분 한복을 워낙 좋아하시니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셔서 일 년에 두 번, 봄에 매화랑 목련 만개할 때랑 여름에 연월정 연못에 연꽃들이 만개할 때 안평재가 가장 아름다운 때를 맞춰 그때만 사진 촬영하라고 잠시 내어주시고 하루 머무는 건 절대 허락하지 않으세요. 혹시라도 흠날까 봐.”


“당연히 그러시겠죠. 이곳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사람들 손타는 건 질색이시니... 그런데 화보 촬영이라면, 더구나 유명하신 홍자희 선생님 촬영이라면 모델도 유명한 사람이 왔겠네.”


윤 집사는 때마침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먼저 자리를 떴고 우형은 호기심에 강후 눈치를 살며시 보면서 슬금슬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후는 혹시라도 오해받아 안 좋은 얘기가 본가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갈까 걱정되어 우형을 말렸다.


“우형아.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배고프다고 했잖아. 괜히 쓸데없이 눈에 띄지 마라.”


“잠깐만 보는 건데 뭐 어때. 쓸데없이 눈에 띌 일은 안 만들 거니까 걱정은 접어두시고... 어어어. 와... 저 여자가 메인 모델인가... 엄청나게 이쁘다. 아니.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강후야. 저기 봐봐.”


강후가 관심 없다는 듯 가던 길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우형이 재빨리 그의 손목을 붙잡아 담장 아래로 데려가 한곳을 가리켰다.


“참나. 잠시만 보면 되는데. 저기 좀 보라니까. 연월정 옆 홍매화 나무 아래 서 있는 여자. 딱 채강후 스타일인데. 청초하고 단아한, 긴 생머리에 고혹적인...”


강후는 우형이 억지로 자신의 얼굴을 잡고 그쪽을 보게 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한 여자가 들어와 박혔다.


그러자 그 순간 더는 우형의 얘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담모화? 정말 담모화 너니?


이곳 안평재에 들어오니 진짜 또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래. 이건 꿈일 거야. 꿈꾸고 있는 거야.


그렇게 가슴 사무치게 그립고 그리웠던, 보고팠던 담모화 네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봄 햇살이 너무나 눈부셔서 지금 이 풍경이 아름다워서.


비행기를 오래 타고 온데다 쉬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오느라.


그래.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믿기지 않은 얼굴로 강후는 홀린 듯 꿈에 취한 듯 저도 모르게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열지 않았던 안채 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미치게 끌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런칭 알림*^^* 23.02.01 19 0 -
공지 완결 감사& 글 내림 안내. 22.06.06 111 0 -
공지 [환상적인 결혼, 이상적인 부부]1화~12화 무료 연재중입니다. 22.02.26 206 0 -
공지 오랜만에 새 작품으로 인사드립니다. 22.02.22 136 0 -
80 80화. 글 내림.(마지막 회.) +2 22.06.06 112 4 1쪽
79 79화. 글 내림. 22.06.05 75 3 1쪽
78 78화. 글 내림. +2 22.06.04 61 4 1쪽
77 77화. 글 내림. +2 22.06.03 58 3 1쪽
76 76화. 글 내림. +2 22.06.01 67 3 1쪽
75 75화. 글 내림. 22.05.31 51 2 1쪽
74 74화. 글 내림. +3 22.05.29 66 3 1쪽
73 73화. 글 내림. +2 22.05.27 55 3 1쪽
72 72화. 글 내림. +2 22.05.26 53 3 1쪽
71 71화. 글 내림. +2 22.05.24 58 3 1쪽
70 70화. 글 내림. +2 22.05.22 67 4 1쪽
69 69화. 글 내림. 22.05.16 70 3 1쪽
68 68화. 글 내림. +2 22.05.14 60 3 1쪽
67 67화. 글 내림. +2 22.05.06 90 3 1쪽
66 66화. 글 내림. 22.05.05 94 3 1쪽
65 65화. 글 내림. 22.05.04 93 3 1쪽
64 64화. 글 내림. +2 22.05.03 97 3 1쪽
63 63화. 글 내림. 22.05.02 88 3 1쪽
62 62화. 글 내림. 22.04.30 83 3 1쪽
61 61화. 글 내림. +2 22.04.28 90 4 1쪽
60 60화. 글 내림. 22.04.27 94 3 1쪽
59 59화. 글 내림. +2 22.04.26 93 4 1쪽
58 58화. 글 내림. 22.04.25 100 4 1쪽
57 57화. 글 내림. 22.04.22 96 4 1쪽
56 56화. 글 내림. 22.04.20 101 4 1쪽
55 55화. 글 내림. +4 22.04.19 115 4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