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과거-
적막한 공간에 대비되는 널따란 방에서 알 수 없는 공식들이 영상으로 떠다닌다. 토막 난 피라미드처럼 공식들은 제멋대로 쌓여있고, 메모리를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소현은 전자볼펜의 끝을 위로 향했다.
"후-아! 완성인가?!"
팽창했던 망상은 어김없이 현실로 완성됐다. 하지만 기분이 조금 묘했는데-
"이거… 막상 여기까지 오니까, 떨리네."
방금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알고리즘이 꽤나 독특해서였다. 물론 알고리즘 자체에 문제가 있다거나, 실수를 했다거나, 그런 자잘한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그 '결과'라는 게 때론 허무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인생에 몇 안될 표정을 이 때 한번 지어줬다.
∂: 뭐야. 그 바보 같은 표정?
"???"
'내가 음악을 켜둔 건가? …아닌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떠다니는 공식이 다 일뿐, 있을 리 없는 무언가가 있을 리가 없었다.
-라고 생각하는 찰나.
∂: 여기라고, 여기!
창문 근처로 이상한 솜사탕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뭐야, 솜사탕이 말을 한다?!"
손가락으로 두어 번 찌르자, 솜사탕이 점점 작아졌다.
∂: 아앗-… 간지러우니까 그만둬.
"신기한 녀석이네… 아, 그것보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 ……
∂: 말하는 솜사탕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당연하지-"
"지금 내가 죽느냐, 마느냐의 문제니까."
∂: 그래, 지금 떠 다니는 이 공식들이 보여?
나는 의자에 기대어 공식들을 응시했다.
∂: 응.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이 알고리즘은 지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식이야.-"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말이지."
∂: …
솜사탕이 말이 없자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쉽게 말하면 인류가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 '한 차원 더'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차원'에서 우리를 관리하는 녀석들에 대해서 깨닫고-"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지."
∂: …존재라니?
"하하하, 잘도 능청 떠는구나."
의자에서 일어나 솜사탕을 찔렀다.
"존재라는 걸 널 말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신'과 같은 존재 말이야."
∂: …하하.
∂: -푸-하하하하!
∂: 하지만 틀렸어. 난 '신'이 아니라… '왕'인걸?-
∂: 그보다 어떻게 눈치 챈 거야?
"그건, 알고리즘의 중간과정부터 예상했었어. 이 공식을 세워가는 자체가 '신'을 '구성'해 나가는 것과 같으니까."
∂: 내가 올 걸 미리 알았다는 건가?
"그래, 그리고 이렇게 말을 걸 것도 말이야."
∂: 그래서 아까 그런 태도를 한 건가. 능청은 네 쪽이 한 수위인걸?-
∂: 그럼 결정해줘, 너는 '계속해서 이 세계를 살아갈 것인가'…
∂: 아니면 '죽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흐흠…"
"-정말 그것을 물어보러 온 거야?"
∂: 그거야 너의 대답에 따라 다르지.
"푸하하, 그럼 너도 사실 알고 있잖아.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조금은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야-"
"난 그저 너와 '이야기'하는 게 목적이었다는 걸."
∂: 정말이지… 넌 끝을 알 수 없어. 하핫,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지만.
"그래서, 진짜로 내게 원하는 게 뭐지?"
∂: 난 너에게 거래를 제안하려고 해.
"일단은 들어보도록 할까."
∂: 너도 눈치챘다시피, 넌 '현실'세계에서는 가치가 없어.
∂: 그리고 기억의 일부 또한 사라지겠지.
"기억에 일부가 사라진다…라. 조금 귀찮군."
∂: 끝이 아니야, 그리고 넌 계속해서 '전진'해야만 해.
"전진이라니, 무슨 소리지?"
∂: 아까 말한 것과 같아. 나는 너에게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했잖아. 그렇다면 살아가기 위해선 그만한 '조건'이 필요한 건 당연하잖아.
"아하, 그렇군. 이해했어."
∂: 이제부터는 내가 '제안'하는 이야기야. 너가 '현실'세계로 갔을 때, 나는 너를 몰래 도와주는 것 뿐만 아니라…-
∂: 적당한 시기가 되면 기억을 돌려줄게.
"호오… 정말인가?"
∂: 물론이야!
"그렇다면 너가 원하는 건 뭐지?"
∂: 별건 아니고…
∂: 그에 대한 대가로 너의 재능을 줘.
"푸…푸핫."
∂: ? 왜 웃는 거야?
"하하하…! 넌 인류에게 있어서는 신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네."
∂: …
"바깥세상에는 '너 조차' 평준화 될 무언가가 있겠지. 그래서 재능을 탐내는 거고."
∂: 말했잖아. '신'이 아닌, '왕'이라고.-
∂: 후후후. 뭐 좋아. 좋을 대로 해석해.
∂: 그래서 결론은 역시 'OK'겠지?
∂: 기억을 되찾는 것보다 너에게 유리한 것은 없을 테니까.
"푸하하하-!"
∂: …?
"미안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기억 따위 언제든지 찾을 수 있어. 조금 귀찮겠지만."
∂: 그게 과연 마음대로 될까…
∂: 그리고 너는 이미 '네 자릿수'정도의 정점에 달하는 실력들이 있잖아.
∂: 굳이 '재능'이 없어도 문제가 되진 않을 텐데.
"글쎄. 너무 좋을 대로 해석하는데?"
∂: 으음, 아쉽네. 아쉬워.
솜사탕은 낙심하며 허공을 빙빙 떠돌았다.
"… 그렇게 내 '재능'이 탐나?"
∂: 그야 당연하지. 나는 '재능'을 모으는 게 취미이니까.
"…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부탁하는 걸 들어줄 수 있을까?"
∂: ……!
∂: 그게 뭔데! 말해볼래?
"내가 그쪽 세계에 간다면,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까-"
"그쪽세계에 '왕'들을 우연을 가장해 한자리에 모아줘."
"그리고…"
"기억을 돌려주는 대신에, '지구'에 '나'의 복사본을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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