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내복이아빠의 서재

노래하는 남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내복이아빠
그림/삽화
내복이아빠
작품등록일 :
2011.05.26 12:44
최근연재일 :
2019.01.29 07:06
연재수 :
61 회
조회수 :
9,194
추천수 :
90
글자수 :
250,466

작성
17.11.21 14:00
조회
159
추천
1
글자
7쪽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1

DUMMY

"일어나거라!"


그를 거칠게 흔들어 대는 손길에, 이리는 눈을 떴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잔뜩 찌푸린 눈꺼풀 위로 쏟아졌다.

커다란 창이 달려 있는 자그마한 방. 이리는 나무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며, 보기 좋게 잘 다듬어진 근육의 상체가 드러났다. 이리의 팔이 허공을 향해 쭉 펴지자 허리가 곧게 펴지며 뼛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침이니라. 언제까지 잠만 잘 게냐."


이리는 고개를 돌려 요상한 말투를 쓰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기씨."


이불을 걷어낸 이리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제 갓 스무 살 되었을 법 한 뽀얀 얼굴의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리 나오너라. 햇살이 밝도다."


"예. 나가서 기다리시이소."


이리는 침대에서 내려서며 말했고,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인, 아가씨라 불린 여자는 방을 나갔다.

이리는 아랫사람을 불러 씻을 준비와 옷을 부탁했다. 세안를 하고 기다란 머리를 정갈하게 묶어 올린 이리는 깔끔하게 다림질 된 검은색 옷을 걸쳤다. 그리고 역시나 검은 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허리띠와 긴칼을 찬 이리는 곧 방문을 나섰다.

배가 조금 고프긴 했지만 아침때가 훨씬 지나기도 했고, 가람가야의 셋째 딸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큰 실례이기에 그냥 나갔다.

햇살이 따스한 봄날의 아침이었다.

벨칼 씨족의 집을 그 여자와 함께 나선 이리는, 붉은 머리를 곱게 묶은 여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여자의 발걸음은 나비처럼 가벼웠고, 이리의 발걸음은 마치 그 그림자인 듯 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날씨 정말 좋지 않느냐."


"예."


이리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자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두 사람이 가람가야의 성을 자유로이 걸어 다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자 쪽을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 왔다. 여자는 인사 하나 하나에 밝은 미소로 대답하며 사뿐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말쑥한 모습의 이리는 긴 다리를 뻗으며 말없이 걸을 뿐이었다.

동쪽 성문을 나선 그들은 이윽고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올라섰다. 벚나무가 가득하고 파릇한 잔디가 자라난, 아름다운 언덕이었다.

여자는 벚꽃내음을 품으로 끌어안듯 두 팔을 모으며 감탄하였다.


"와- 보거라! 벚꽃이 가득하다!"


"예."


이리는 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언덕 위는 확실히 장관이었지만, 그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항상 시큰둥하구나. 뭐, 그런 점이 매력이긴 하노라."


잔디 위를 붉은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거닐고 있는 여자는 가람가야의 주인 가람가야 지민의 셋째 딸, 첫째 오라비인 가람가야 미진과 둘째 언니인 미소의 다음인 막내딸 가람가야 미다였다. 그는 아직 머리올림도 치르지 않은 소녀였다.

이리는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며 언덕을 누비는 미다의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자신이 머리올림을 치렀던 몇 해 전 여름을 떠올려 보았다.

잘 웃던 이리의 형, 이리에게 그 누구보다 잘해 주었던 핏줄, 이리가 벨칼 씨족의 햐근쥬진이 되면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자신의 쌍둥이 형 가이가 문득 떠올랐다.

이리는 햇살의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잔디 위에 앉았다.


"-후."


저 천진난만한 붉은 머리의 아기씨도 형제와 싸우고, 헤어지며 그 성씨를 가지기 위해 다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저 나리씨인 이리네 보다 더 심한 싸움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가련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관심을 끊었다. 어차피 이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느냐? 한숨을 쉬는구나."


미다가 이리에게 다가왔다. 이리의 한숨소리를 들었는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이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기씨."


"왜 부르느뇨?"


"아기씨는 와 자꾸 저한테 오십니까."


이리의 말을 들은 미다는 두 손을 등 뒤로 깍지 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여 이리와 눈을 맞추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 싫어하는 이리는 곧 고개를 돌렸지만, 미다는 포기하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여 이리의 얼굴을 마주보며 싱글거렸다.


"왜, 누가 뭐라고 하더냐? 시지니가?"


이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다음에는 시지니도 데려오도록 하겠다. 그럼 되느냐?"


그런 녀석, 마주치면 괜히 말다툼만 생긴다.

말 많고 찌질한 동기 놈은 최대한 안 마주치는 것이 조용히 사는 방법이다.


"아닙니다."


언덕 위로 살랑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에, 몇 장의 벚꽃이 흩날렸다. 이리는 손을 뻗어 잔디 위에 떨어진 벚꽃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촉촉했다. 살아있었다.

곧 바스러질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돌아 가시지예."


배가 고파진 이리가 미다 쪽을 쳐다보며 말했고, 미다는 아쉬운 듯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 서 걸었다. 이리는 역시나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새장 속에 갇힌 새 같은 여자. 이리는 미다를 바라보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맘껏 나래질하고 뛰어보지만, 결국 막혀 있는 천장, 갈려있는 벽에 부딪히고 마는 그런 새.

그것도 결국 이리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여태껏 해온 것처럼, 신경 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시키는 일들만 하면 될 터였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없이 고을을 향해 걸었다.

성문이 보일 때 쯤, 앞서가던 미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붉디붉은 머리칼이 햇살에 환히 빛났다. 이리는 눈이 부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리야."


"예."


"그대가 모톨아치가 아니었다면, 벨칼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 보노라."


무슨 뜻일까.


이리는 미다의 벌어진 입술이 아주 조금 떨린다 느꼈지만, 그것 역시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랬다면 저도 아기씨랑 이러고 있진 않을 겁니다."


이리의 말을 들은 미다는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더니, 곧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랬겠구나! 결국 다 좋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니라. 난 그래서 그대가 좋도다."


가끔씩 이해가 안가는 말투로 이해 못 할 말을 하는 미다였고, 언제나처럼 이리는 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미다는 자신에게 각 잡힌 동작으로 경례를 하는 성문의 살피아치들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주며 발랄한 걸음으로 가람가야 내성 쪽을 향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노래하는 남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1 제6장 잃어버린 것들 - 3 19.01.29 44 1 13쪽
60 제6장 잃어버린 것들 - 2 19.01.27 35 1 14쪽
59 제6장 잃어버린 것들 - 1 19.01.24 36 1 12쪽
58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15 18.01.03 135 1 8쪽
57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14 17.12.16 116 1 9쪽
56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13 17.12.11 86 1 11쪽
55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12 17.12.08 110 1 9쪽
54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11 17.12.06 117 1 9쪽
53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10 17.12.03 103 1 13쪽
52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9 17.12.01 124 1 12쪽
51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8 17.11.30 123 1 11쪽
50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7 17.11.28 139 1 10쪽
49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6 17.11.27 107 1 9쪽
48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5 17.11.24 101 1 8쪽
47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4 17.11.22 119 1 9쪽
46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3 17.11.22 110 1 11쪽
45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2 17.11.21 129 1 11쪽
» 제5장 붉은 머리의 여자 - 1 17.11.21 160 1 7쪽
43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10 17.11.02 140 1 9쪽
42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9 17.10.20 117 1 12쪽
41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8 17.10.18 127 1 13쪽
40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7 17.10.18 132 1 8쪽
39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6 17.10.17 141 1 8쪽
38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5 17.10.17 121 1 12쪽
37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4 17.10.15 196 1 13쪽
36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3 17.10.15 240 1 8쪽
35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2 17.10.14 121 1 9쪽
34 제4장 지난날의 그림자 - 1 17.10.14 112 1 10쪽
33 제3장 도망 - 9 17.10.14 135 1 8쪽
32 제3장 도망 - 8 17.10.13 150 1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