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섹시한 쓰레기(3)
“왜 뜬금없이 김서윤이야.”
오늘 낮, 친구 황상훈과 대화하면서 잠깐 언급된 탓에 꿈에 그녀가 찾아온 건가 싶었다.
꿈에서는 마치 다른 인물이 된 것처럼 태연하게 김서윤의 앞에서 입을 나불거렸지만, 실상은 많이 달랐다.
사람이 맞긴 한 건지 의심이 들게끔 하는 굉장한 김서윤의 미모에 심장이 바짝 쪼그라들 정도였으니까.
“이왕 나올 거면 취조당하는 거 말고······.”
다른 걸 경험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까비.
몇 번 꿈을 꾸진 않아서 아직 어떤 패턴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들만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달까.
“로또 번호 같은 건 안 알려주더라고.”
그 또한 굉장히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는 듯 꿈은 준혁을 상대로 적절한 조절을 하고 있었다.
“근데 진짜 왜 김서윤이 나왔지?”
게다가 취조실 같은 곳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준혁은 박재욱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경찰로서 그를 심문했다.
“설마.”
‘악의 추적자’에 김서윤이 출연하기라도 하나?
만약 그렇다면 진짜 김서윤을 볼 수도 있다는 건데.
실제로 보면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아냐?
괜스레 긴장됐다.
***
“박재욱 역에 세훈이가 아니라 다른 놈이 캐스팅됐다고?? 이게 뭔 개소리야!!”
시끄럽게 고함치는 이는 스타인 엔터테인먼트 대표 권오상.
아이돌 퓨어러브 출신 정세훈을 ‘악의 추적자’ 박재욱 역에 꽂아 넣으려고 하다가 실패한 탓에 얼굴에 핏대가 설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캐스팅 디렉터랑 잘 이야기했다고 하지 않았어?”
소식을 물고 온 배우 담당 곽현수 실장은 고개를 숙였다.
“예. 분명 긍정적으로 밀어보겠다고 했습니다만······.”
“세훈이 오디션도 잘 봤다며.”
“무난하게 봤는데 미친놈 하나가 난입했거든요. 제가 봐도 비교가 안 될 수준이라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새끼야, 너는 우리 편이야? 아니면 그 새끼 대리인이야!”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래도 세훈이는 5~6화에 등장하는 악역 역할 준다고 했어요.”
권오상 대표는 분한지 책상을 쾅 내리쳤다.
“세훈이 밀어내고 캐스팅된 놈은 어디 소속인데. 소나무 엔터? 아니면 서람?”
“소속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오디션 영상이나 한번 보자.”
곽 실장은 캐스팅 디렉터를 통해 몰래 받아 온 영상을 권오상 대표에게 내밀었다.
저 역시 오디션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권오상 대표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어디 대단한 엔터가 돈으로 처발라서 배역을 따냈겠거니.
그렇게 생각했으나 영상을 보고 난 뒤는 다른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미친놈이 나타났다!’
딱 그 한 줄의 평가로 모든 걸 다 설명할 수 있었으니.
태블릿 PC에 담긴 영상을 권오상 대표는 신경질 내며 클릭했다.
“어?”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탓에 권오상 대표의 눈썹이 한껏 위로 솟구쳤다.
“이 새끼 이거 천준혁 아니야?”
“맞습니다. 요즘 엄청 이슈거든요.”
“하. 다시 연기 하겠다고 기웃거리는 모양이네.”
흥미롭다는 듯 변하는 권오상 대표의 얼굴.
영상을 보고 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얘 소속사 없는 거 확실해?”
“예. 주변에 수소문 해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본인 힘으로 배역 따낸 것 같거든요.”
“우리가 데리고 오자. 천준혁은 쉽지.”
이유 없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권오상 대표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사적으로 아시는 건가요?”
“알지. 내가 준혁이 아버지랑 형, 동생 하던 사이야. 예전에 비즈니스도 같이 했거든.”
“아빠 친구라고 해도 기억을 할까요? 워낙 어릴 때라······.”
“얘 기억력 미친 거 알잖아. 날 잊었을 리가 없어.”
***
같은 시각.
‘악의 추적자’ 드라마 제작을 맡은 M 스튜디오.
회의실에 미리 도착해 있는 석흥찬 피디와 김서윤.
모하나 작가는 20분 정도 늦는 상황.
“김 스타, 드라마 들어가기 전에 광고 몰아서 찍는다고 요즘 바쁘지 않아?”
“바쁘죠. 근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박재욱 역 맡은 천준혁 때문에?”
“네. 같은 드라마 출연하게 될 사람이니까 뭐 겸사겸사 이야기 나눠보면 좋잖아요.”
서윤이 어깨를 으쓱 당겨 올린 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우월한 키를 자랑하는 천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 배우, 왔네! 여기 앉아요. 모 작가 20분 정도 늦는다고 하네.”
“······.”
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묵례했다.
겉으로 보기엔 무척 시크해 보였지만, 준혁의 속사정은 완전 달랐다.
‘미친. 진짜 김서윤이잖아.’
진짜로 김서윤을 볼 줄이야.
꿈에 그녀가 뜬금없이 나와서 자신을 취조실에서 조여 댄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실제로 마주한 서윤은 별다른 강렬한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혼자만의 반사판을 들고 다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실 예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배우는 확실히 배우구나.’
그냥 앉아만 있어도 풍기는 아우라가 남달랐다.
긴장해서 준혁의 입꼬리가 살짝 떨려왔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더욱 힘을 꽉 준 탓에 준혁의 얼굴이 더 무표정하게 굳었다.
준혁이 말없이 자리에 앉고 나서도 서윤의 짙은 시선이 한껏 느껴졌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제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건가 싶어서 준혁은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거울이라도 한 번 보고 올 걸 그랬네.
한껏 긴장해서 목이 뻣뻣하게 굳은 것처럼 몸을 돌릴 수 없었다.
그 모습이 서윤에게는 본인을 외면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윽고 석흥찬 피디가 서윤과 준혁을 서로 소개했다.
“아직 오피셜 기사는 안 떴지만 여기는 우리 드라마 여자주인공 맡아 줄 김서윤 배우. 출연한 드라마, 영화가 잘 된 게 워낙 많지. 천 배우도 알려나?”
예, 알죠.
김서윤 모르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지금 입을 열면 목소리가 굉장히 떨릴 것 같아서 준혁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예, 뭐.”
그 대답을 듣고 석흥찬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간 공부만 하느라 TV 볼 시간 없었을 텐데.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아뇨.
공부만 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 여튼 김서윤은 잘 압니다.
하지만 직접 그렇게 부연 설명을 하는 것도 좀 이상했다.
준혁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겨우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눈을 하고 있던 서윤은 준혁과 눈을 마주치자 생글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악의 추적자에서 프로파일러 한지연 역을 맡은 김서윤이에요.”
최근에 국민 첫사랑으로 나오신 영화 잘 봤습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박재욱 역을 맡은 천준혁입니다.”
짤막한 단답 만이 튀어나왔다.
남중, 남고, 그리고 공대와 군대.
거의 10년 정도를 남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지내다 보니 정말로 여자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상대는 그냥 여자도 아니고 국민 첫사랑 김서윤 아닌가.
같이 연기를 하며 합을 맞출 사이라 생각하니 더욱 긴장돼서 목소리도 사실 잘 나오지 않았다.
준혁이 자신을 몰라보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는지 서윤은 살짝 속상한 얼굴을 했다.
“피디님, 나 더 열심히 해야 할까 봐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잖아, 김 스타.”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스타는 무슨.”
석흥찬 피디는 의지를 불태우는 서윤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이내 드라마 진행 상황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배우 캐스팅은 이번 주 중으로 다 마무리가 될 겁니다. 남자주인공으로는 이서준 배우가 캐스팅됐어요.”
이서준.
조연에서부터 시작해 이제는 주연으로 확실하게 발돋움을 한 배우.
남성적인 얼굴선을 자랑하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였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 깨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남자가 이서준이었지.’
취조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순식간에 흐름을 바꿨던 경찰이었다.
이서준 역시 연기력으로는 빠지지 않는 배우였다.
모하나 작가 작품에 장르물의 대가 석흥찬 피디가 뛰어들었다.
남, 여배우로서는 요즘 한창 높은 주가를 기록하는 김서윤과 이서준이 캐스팅됐고.
그런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영광이었다.
“천준혁 씨, 지금 소속사는 없죠?”
“네, 없습니다.”
“우리 드라마 나가고 나면 아마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쏟아질 거야.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따져서 계약해요.”
“조언 감사합니다.”
회의실에 들어온 이후 준혁이 처음으로 표정을 풀고 살짝 웃었다.
김서윤의 시선이 더 깊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끼어들어 말을 건넸다.
“피디님 조언 새겨들으시면 좋을 거예요. 소속사 계약도 연애랑 같거든요.”
“······ 연애요?”
갑자기 연애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지?
준혁의 약점 아닌 약점이라 괜히 흠칫 놀랐다.
“많이 해봤으니까 뭐 잘 아시겠지만 간 보고 재고 따질수록 상대가 더 안달 나거든요.”
연애 한 번 못 해 본 준혁으로서는 사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진 않았다.
요약하자면 잘 보고 따져라, 뭐 그 정도가 아닐까.
‘연애 못 해봤다고 해서 소속사 못 고르란 법은 없으니까.’
“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잘해볼게요.”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준혁은 그냥 그렇게 대꾸했다.
연애 못 해 본 티를 내는 건 어쩐지 자존심도 상했고.
석흥찬 피디는 걱정할 것 없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김동춘 국장님이랑도 잘 아는 사이니까 연락 온 소속사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고 해요. 아마 이 업계 빠삭하게 알고 있으셔서 도움 많이 주실 겁니다.”
“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어. 편하게 물어봐요.”
“드라마 출연할 때 의상이나 메이크업 같은 건 혹시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어릴 때 영화를 찍을 때는 준혁에게 담당 스타일리스트가 붙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누가 고용했는지는 세세하게 물어본 적 없어서 사실 잘 알지 못했다.
“그건 걱정 말아요. 어차피 소속사 있는 신인 배우들도 개인 스타일리스트 잘 안 붙여주려고 해. 남는 게 없거든.”
드라마 분장팀과 의상팀 실력 좋으니까 거기서 해결하면 된다는 석흥찬의 말에 준혁은 마음을 놓았다.
“대본이랑 촬영 콘티 보고 촬영 전에 나랑 모하나 작가와 의상 상의하면 되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자, 이건 대본 초고.”
준혁은 설레는 마음으로 대본을 받아 들었다.
오디션장에서 받은 종이 한 장과 다르게 두툼함이 느껴졌다.
“읽어봐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준혁은 얼른 대본을 펼쳤다.
단편적인 것만 봤을 때와 다르게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는 전체 대본이었기에 더더욱 머릿속에 확연하게 그림이 그려졌다.
집중해서 대본을 훑어보는 준혁에게 서윤이 물었다.
“그런데 왜 아역 배우 생활 계속 안 했어요?”
준혁이 대본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암기력 좋은 거야 뭐 말 안 해도 아는 거고. 연기도 사실 나쁘지 않았잖아요.”
“제가 출연한 영화를 보셨습니까?”
무슨 말투가 이따위냐.
제대한 지가 언젠데 다나까를 쓰고 앉았어.
준혁은 뒤늦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정말 뚝딱거리는 자신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네? 아뇨. 저는 이게 편해서.”
감히 어떻게 김서윤에게 말을 편하게 놓겠는가.
그리고 편하게 대하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저보다 데뷔 빠르시잖아요. 천준혁 배우님 영화 보고 배우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와.
이거 진짜 꿈인가.
그냥 립서비스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준혁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천 배우랑 김 스타는 언젠가 한 번 작품에서 만날 운명이었나 보네.”
“그러게요?”
뒤늦게 모하나 작가도 회의실로 들어섰다.
“늦어서 진짜 쏘리. 사고 났는지 다 와서 차가 엄청나게 막혔어.”
모하나 작가는 대본을 읽고 있던 준혁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얼굴을 밝혔다.
“대본은 좀 봤어요?”
“네. 재밌어요.”
“정말? 매번 들어도 그 소린 좋아, 진짜.”
모하나 작가가 이윽고 자리에 앉았다.
석흥찬 피디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오디션장에서도 그러더니 두 분은 눈빛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모양이네.’
신기해하는 준혁을 향해 모하나 작가가 부탁했다.
“박재욱 나오는 장면 연기 한, 두 개만 더 보여줄 수 있어요? 톤 좀 맞춰보고 싶어서.”
“작가님, 제가 그럼 상대 대사 칠게요.”
“어우, 고급 인력이? 그래 주면 나야 좋지.”
“천준혁 선배님이 하고 싶은 씬 골라보세요.”
준혁이 데뷔가 더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서윤이 그렇게 불렀다.
데뷔만 빨랐을 뿐, 선배라고 불리기엔 너무도 연기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기에 그 호칭은 조금 무리수였다.
“편하게 불러 주시면 안 됩니까?”
미친.
제발 이 말투 좀 어떻게 안 되냐.
스스로의 입을 마구 때리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래, 처음 만나는 거라 어색해서 그래.
다음에 볼 때는 지금보단 나아지겠지.
차라리 사적인 대화를 섞는 것보다 대본에 있는 인물이 되어 대사를 치는 게 천만 배 편할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럼 준혁 씨도 저 편하게 불러 주세요. 제가 더 어리니까.”
“예. 노력은 해볼게요.”
노력한다고 될진 모르지만.
이윽고 준혁은 장면 하나를 골랐다.
“1화 40씬 해볼게요. 김서윤 배우님이 상대역 해주시는 겁니까?”
“그럴게요.”
대본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준혁은 손에서 내려놓았다.
부드럽게 눈매가 접힌다.
“머리 염색했네요? 잘 어울려요.”
서윤을 어색하게 보던 준혁이 사라진 건 순식간.
잘난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면 단둘이 드라이브나 할래요?”
반듯한 수의사 박재욱만이 회의실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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