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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 님의 서재입니다.

드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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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bleu
작품등록일 :
2016.10.22 21:14
최근연재일 :
2017.10.24 00:18
연재수 :
2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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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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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
글자수 :
1,636,485

작성
17.08.01 19:35
조회
90
추천
3
글자
8쪽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DUMMY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제스카르는 신하들에게 덕담을 해 주면서 귓속말도 몇 번 했다. 그 귓속말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물결처럼 흘러갔다. 물결이 한 번 흘러가자 라스카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들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메인 요리와 함께 술이 나왔다. 무슨 고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맛은 괜찮았다. 술잔이 비워지고 빈 접시를 내갈 때쯤 두 번째 귓속말의 물결이 끝났다. 그러자 인사가 시작되었다.


"친왕 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아룬드 모리나스라고 합니다. 미력하지만 국무대신 직을 맡고 있습니다."

"내무대신 브룬켈 티오레드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군사대신인......"

"외무대신......"


대신들의 인사가 끝나자 왕실 친족들이 그녀를 보러 왔다. 아이를 많이 낳는 밀렌다도 왕실은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손이 귀한데, 마리엔은 더했다. 왕비의 5촌 조카라는 젊은 셸비 경이 오자 궁정 사람들은 그를 왕세자라도 되는 듯이 정중하게 대했다. 라스카는 그가 제스카르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이 사람에겐 내가 달갑지 않겠지?'


라스카는 살짝 베일을 젖히고 그의 얼굴을 자세히 봐 두었다. 흰 얼굴에 검은 머리칼은 남들과 같았다. 보랏빛이 도는 눈동자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이십대 초반 가량의 남자였다.


"친왕 전하, 갑작스레 뵙게 되어 예의를 갖추기 어려우니 부끄럽군요. 에녹 셸비입니다."

"반가워요. 차차 알아 나가도록 해요."


당당하면서도 세련되게 말하는 일은 어려웠다. 잘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발음이 어색할 텐데 어떡하지? 다들 웃음을 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라스카는 만국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미소였다.

만만하게 보이면 안 돼. 오빠에게 폐가 될 거야.


셸비 경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물었다.


"미망인의 베일인가요?"

"네. 사정을 말씀드려야 하나요?"

"아닙니다. 슬픈 일일 텐데."


셸비 경이 물러가고 디저트가 나왔다. 다행히 마리엔에서도 디저트는 단것이었다. 라스카가 바닐라 푸딩을 먹고 있는데 세 번째 귓속말의 물결이 지나갔다.

아이언 메타가 나타났다.


"Hila Dios, 아니, 너무 길군. Hila라고 부를까?"

"그냥 이름 부르세요."

"잠깐 나 좀 볼까?"


술을 꽤 먹었을 것이 분명한데 일단은 멀쩡해 보였다. 그는 라스카를 데리고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복도는 추웠다. 라스카는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와들와들 떨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나요?"


아이언은 대답 없이 웃기 시작했다. 재미있어 미쳐 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라스카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말을 하세요. 웃지만 말고."

"너 하는 꼴이 너무 웃기다."

"제가 뭘요?"

"아주 강렬한 신고식이었어."

"그러니까 왜요?"


아이언은 킬킬 웃음을 멈추지 못하며 설명을 해주었다.


"이 놈 저 놈 추파 장난 아닌데? 칠십 먹은 국무대신한테도 그러더니 젊은 놈한테는 아주 가관이야. 정열적인 친왕 전하로 유명해지겠어."


라스카는 그 자리에 굳었다.


"제가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다정한 목소리에 미소에 베일까지 걷고 아주 훌륭했어. 열다섯 살 꼬맹이였을 때는 이런 숙녀가 될 줄 몰랐지?"


기가 찼다.


"그 정도가 추파라고요? 일상적인 예의잖아요!"

"그건 밀렌다 기준이지."


도대체 이 나라는 감정을 얼마나 억압하고 사는 거냐.


"그럼...... 저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하던 대로 해. 너무 재밌는데?"


라스카는 당황해 하다가 어떤 점에 생각이 미쳤다.


"그럼 아이언 님하고도 이렇게 둘이 얘기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아, 나는 괜찮아."


아이언은 더욱 소리 높여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나를 남자 취급 안 하거든? 그러니까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된다."

"......"


모국에서 보는 아이언 메타는 한층 더 이상한 인간이었다.


암담해졌다.

집에 보내줘.


힘겨운 연회가 끝났다. 밤이 되었다.

라스카는 씩씩거리며 두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만 웃어!"


아이언은 그녀의 말 따위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웃고 싶은 만큼 웃어댔다. 좋으시겠어. 인생이 즐거워서. 제스카르 쪽은 다행히 몇 번 더 쿡쿡 웃은 후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오늘 걸작이었어, 라스카."

"미리 조심하라고 말을 해줬어야지!"

"나도 네가 그럴 줄 몰랐는걸."


의심스러웠다. 저 말이 진심일까? 여동생의 따가운 시선을 가볍게 받아 넘기며, 그는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내밀었다.


"이걸 읽어. 도움이 될 거야. 마리엔 어이지만 괜찮겠지?"


안 괜찮았다. 마리엔 어 읽기는 아직 서툴렀다. 하지만 일단 책을 받아들고 표제를 읽어보았다.


"사회문화 비교 연구."


팔락. 한 장 더 넘겼다. 목차가 나왔다.


"제1장 밀렌다의 문화와 풍속. 제2장 마리엔의 문화와 풍속. 뭐야, 이거? 이런 책이 있었으면 어제 보여줬어야 하는 거 아냐?"


제스카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책 내용이 맞는지 틀리는지 지금까진 확신하지 못했거든. 그런데 오늘 네 행동을 보니 그 책 믿어도 될 것 같아. 정독하도록."


저자명을 확인해 보고 라스카는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Rainis Lapit? 아는 이름인데!"

"밀렌다에서도 알려진 이름인가?"

"유명한 박물학자야!"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왔다 갔다."


레이니스 로엔 클레버 라피트. 그의 연구주제는 박물학에 그치지 않았고, 그의 발걸음 역시 대륙 남부에 머물지 않았다. 어떻게 국경을 넘었을까? 로엔 라피트 가문에는 지식에 목숨 거는 성격이 유전되는 모양이었다. 제이드는 그를 잘 아는 눈치였다. 연락이 닿으면 그를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한 적도 있었다.

그 약속은 지켜질 수 없겠지. 그가 했던 다른 약속들과 마찬가지로.


라스카는 책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수행 시녀가 말없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혼자 남은 라스카는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어 나갔다. 한 문장마다 두세 번씩 사전을 찾아야 했다.

밤이 깊어 갔다. 마리엔에서 보내는 두 번째 밤.


“졸리다.”


-일찍 자야지.


“아직 책을 다 못 읽었어요.”


-내일 읽으면 돼.


“내일도 일정이 있는걸요. 실수하지 않으려면 오늘밤 다 읽어야 해요.”


-좀 실수해도 돼. 바로잡을 시간이 많잖아.


“시간이 많다고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너는 젊고, 이제 막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


“시간이 얼마나 많아야 하나요?”


눈앞에서 마리엔의 문자들이 꼬불꼬불 춤을 추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불면증은 라스카의 고질병이었지만, 며칠이나 제대로 못 자서 이제는 한계였다.


“차라리 빨리 늙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은 하지 마라. 하루하루가 소중해.


“아니요. 아니요. 빨리,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라스카는 책에 연필로 밑줄을 그었다. 모르는 단어였다. ‘gramenon.’ 사전에서 찾아보니 ‘가정생활’이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마리엔의 가정생활 관찰 일지를 읽어 내려갔다.


“언제까지 혼자 있어야 해요?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해요?”


-라스카.


“돌아오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나요? 그렇다면 왜 언제 돌아오겠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나요?”


대답이 없었다.

라스카는 베개 위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졸음이 머리를 온통 멍하게 만들었다.


“보고 싶어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당연하지. 모든 것이 상상이니까......


“보고 싶단 말이에요.”


라스카는 잠이 들었다. 손끝에 걸려 있던 연필이 툭 떨어져 멀리멀리 굴러갔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악몽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행복한 꿈이었다. 깨어난 후의 슬픔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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